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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코아 Apr 16. 2024

로맨틱코미디 남주의 병명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요?

2017.10.21(월)


정신건강의학과 대기실 의자에 앉아있다. 초진은 시간이 좀 걸리니 대기해 달라고 했다.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는데, 생경한 이 공간에 앉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괜히 심장이 쪼그라들어 어깨도 덩달아 위축되었다. 


숨이 잘 안 쉬어져 내과를 찾은 후로 딱 일주일이 흘렀다. 그 사이 서류전형에 합격해 면접일정을 받기도 했고, 모의면접을 보고 잘했다고 칭찬도 받았으며, 실제로 면접을 보러 경기도까지 갔다 왔고, 대기업 인적성 스터디도 했다. 그런데 계속 잠을 못 잤다. 처음엔 할 일이 많은 취준생이 못 자는 건 당연하지라고 생각했지만 정도가 심해졌다. 하루에 한두 시간씩 자기 시작하자 열일 제쳐두고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여기 앉아있다. 사실 방문까지 좀 시간이 걸린 건 우선 비용부담이 큰 점이었는데, 생경한 정신건강의학과에 대해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초진 비용이 꽤나 되는 듯했다. 물론 보험 처리가 가능했지만, 여기서 두 번째, 취준생인 나로서는 혹시나 이력에 남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비보험처리로 비용처리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병원에 들어서서도 가장 먼저 신신당부하며 요청했던 게 비보험 처리로 해달라는 점이었다. 


내 이름이 불렸다. 간호사가 검사실에 나를 앉히더니 검사지를 여러 장 내밀었다. 모두 작성한 후에 나오면 된다고 했다. 얼핏 봐도 문항이 100개가 넘는 것 같았고, 검사 항목도 여러 가지였다. 30분이나 흘렀을까. 검사지를 다 작성한 후에 또 기다렸다. 그렇게 또 1시간.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진료실로 들어서기 전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허약했던 탓에 내과, 이비인후과, 안과 등 각종 병원을 밥먹듯이 드나들었던 나지만 정신과는 처음이었다. 정신병자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눈을 또렷이 떴다. 하지만 큰 마음을 먹고 들어선 공간은 내 예상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푸근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 무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공간도 일반 내과와 다른 점 하나 없었다. 컴퓨터가 세 네대는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책상과 그 뒤로 여러 전공 서적들이 꽂혀있는 책장 두 개가 나란히 차지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의사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를 정신병자로 보는 어떠한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의 앞에 앉았다. 검사지를 들여다 보고는 내 얼굴을 바라봤다. 


"최근에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었나요?"


평이하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최대한 정상인처럼 보일까 고민했다.


"흠... 취업준비생이라서 취직준비 때문에 바쁘고 스트레스를 받긴 했어요."


"그래서 잠을 잘 못 잤고요?"


"네... 며칠 동안 한두 시간밖에 못 잤어요."


의사는 잠시 미소를 거두더니 내 눈을 바라보고 말했다.


"공황장애입니다."


심장이 쿵-하지는 않았다. 이미 그전 병원에서 공황장애 일 수 있다고 정신과를 가보라고 했을 때 받을 충격을 다 받아서인지 담담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심각한 우울증상이 동반되어서 나타납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들어보셨나요?"


다음말에는 심장이 쿵-했다. 우울정도가 심하다고 했는데, 그 후에 의사의 말이 잘 기억나진 않는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란 말은 익숙했다. 드라마에서 교통사고나 다른 사고를 당한 후 아픈 기억을 잊지 못해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 주인공들이 주로 가진 병명이었다. 그래서 그건 어떤 물리적 사고를 당해야 생기는 병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머릿속에서 떠도는 의문을 읽은 듯 의사 선생님이 설명을 해줬지만 말은 뜻으로써가 아니라 그냥 소리로써 내 귀를 통과했다. 약을 받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약알이 네 개씩 담긴 약 봉투는 이미 가방 안에 폭 담겨 있었지만 더더욱 보이지 않게 안으로 밀어 넣었다.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끔찍한 허물이라도 되는 듯.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촉발된 심각한 우울증상 및 공황장애'가 내 병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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