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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코아 Apr 23. 2024

취준생의 본분을 지켜라

취준생은 행복하면 안되는가

2017.11.03(화)


이게 말로만 듣던 스미스피싱 인가 했다. 스미스피싱으로 믿을 만한 구석은 '통장 계좌번호' 한 단어뿐이었으나, 그만큼 믿기지 않았다. 대학교내문학상 시 부문에 당성이 되었다는 문자였다. 새벽 내내 자소서를 쓰다 지쳐서 우연히 들어가 본 대학홈페이지에서 대학교내문학상이 진행 중인 걸 알게 되었다. 자소서를 쓰던 창을 닫고 한글 새 파일을 열었다. 그렇게 나는 자소서 대신 시를 썼다. 20분이 채 안되어 썼는데, 그 시가 덜컥 당선이 되었다. 수상일시와 상금을 받을 계좌번호를 알려달라는 문자를 눈뜨자마자 본 상태였다. 일분 남짓한 짧은 순간 '여기에 계좌번호를 보내면 촤라락 모든 내 정보가 악당들에게 그대로 넘어가 돈이 탈탈 털리는 건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스미스피싱이 아니란 말이지'. '앞번호가 우리 학교에서 쓰는 번호랑 같은데 말이야'. '바보다. 여기로 전화해 보면 되지'에 까지 생각이 미치자 전화를 걸었다. 근로학생인 듯 보이는 젊은 여학생이 전화를 받았다. 확인 절차 끝에 내가 진짜 당선자가 맞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온몸이 뛸 뜻이 기쁘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찌든 취준생 생활 속에서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순수한 기쁨과 행복 그 자체의 감정이 온몸에 퍼졌다.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도 덩달아 너무나 기쁜 목소리로 축하해 주었다. 


"우리 딸. 진짜 대단하다. 자랑스럽다."


엄마의 칭찬은 얼마 전 우울증과 공황장애 판정을 받은 찌든 취준생도 춤추게 했다.


그런데 참 인생은 웃긴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뼈저리게 공감한다. 하늘을 날 것 같았던 기분은 순식간에 하데스가 있는 저승세계까지 추락했다. 술이 문제였나. 아니, 아무래도 이 자리자체가 문제였다. 아니, 이 자리에 온 내가 문제였다. 그래. 결국 문제는 나였다. 


취업스터디를 함께 했던 무리에서 두 명의 삼성전자 합격자가 나왔다. 그들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처음 그들이 붙고 나는 떨어졌을 때, 축하하는 마음이 씁쓸한 마음보다 컸다고 하면 그건 명백히 거짓말이다. 물론, 나의 준비기간이 그들보다 훨씬 짧았지만 그게 완벽한 위로가 되진 않았다. 부러웠다. 삼성전자라는 꿈의 대기업에 합격했다는 것도 부러웠지만 그 보다 이 지긋지긋한 취준생 생활을 끝낼 수 있다는 게 가장 부러웠다. 그래도 참석 전까지는 기뻤다. 너무나 값진 상을 얻었으니까. 그런데 그 둘의 만개한 얼굴을 보자니, 그것보다 그들을 엄청 대단하다며 띄워주는 주변인들을 보자니, 나는 뭘 한 걸까.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시부문에 당선됐다고 엄청 기뻐했는데, 그건 내 처지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었다. 분명 나는 기뻤는데 기쁘지 않았다. 취준생 신분이면 그에 답게 자소서나 더 열심히 쓰고 인적성과 면접이나 더 열심히 준비해야 했다. 그렇다고 내가 시만 주야장천 쓴 것도 아니지만서도 그 모든 게, 내가 받은 상이 다 헛되게 느껴졌다. 


그에 불을 지핀 건 술자리가 파한 후 아빠와의 통화였다. 쓸데없이 취직준비나 하지 말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했다. 숨이 막혔다. 그러자 다시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공황이 시작되었다. 약을 먹었다. 지금 내가 붙들 수 있는 건 약밖에 없었다. 술과 약이 뒤섞여 신경세포는 더 빠르고 예민하게 나를 자극했다. 진정이 필요했다. 학교 공원을 정처 없이 걸었다. 걸을 기운은 없었지만 걷고 싶었다. 아니 사실 죽고 싶었다. 죽음에 대한 열망이 간절하게 타올랐다. 그래서 무작정 학과 건물을 향했다.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올랐다. 사실 흐려진 기억 속에서 옥상 문이 잠겨있었는지 열려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분명 옥상을 향하는 마지막 계단에서 돌아섰다. 그래도 아직은 살고 싶었나 보다. 그리고 불 꺼진 계단에 앉아 홀로 펑펑 울었다. 초라하고 한심한 나 자신과 아빠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뒤섞였다. 지금 내게는 구원의 손길이 필요했다. 남자친구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새벽이었지만 그는 흔쾌히 나를 데리러 와주었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이 날 벌어졌던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정신이 건강한 상태였다면 이년을 준비해서 대기업에 붙은 그들을 멋지다며 축하해 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들을 띄워주는 주변인들은 진정으로 축하할 줄 아는 멋진 이들이었다. 물론 아빠 얘기는 좀 다르다. 그래도 아빠의 속마음은 아직 한국사회에서 여자로서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한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갖길 바라셨던 마음임을 안다. 나는 이 날 많이 울었고, 많이 아팠으며, 정말 외로웠다. 새벽 내내 삶의 의지와 죽음의 갈망사이에서 허덕였다.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래서 그 당시의 남자친구에게 너무 감사하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죽음 쪽으로 조금 더 발걸음이 향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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