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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코아 Apr 30. 2024

내 안의 마지막 잎새

2017.11.14(화)


정말 착한 그였으나 우린 잘 맞지 않았다. 만난 지 5년 차가 되었고 그동안 무수한 싸움과 이별, 화해와 재회를 반복했다. 그는 서툴렀고 나는 예민했다. 


늦은 점심 허기를 달래기 위해 찾은 칼국수 집에서 주문을 마치고 물을 잔에 따라주던 중이었다.


"여자는 두 손으로 따라야지."라고 그가 말했다.


"방금 전에 남자는 한 손으로 따르는 거라면서."


"그러니까 여자는 두 손, 남자는 한 손으로 따라야 하는 거야."


그는 나에게 굉장히 헌식적이었고, 순수했으며,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살짝 가부장적이었다. 가부장적이라면 둘로 가기 서러운 환경에서 자랐기에 나는 그 부분에서 치가 떨렸는데, 그래서 대뜸 그에게 화를 내었다. 나는 거칠었고, 독설적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싸웠다. 생각보다 싸움은 커졌고, 흔한 커플들의 다툼처럼 그동안 서운했던 묵혀있던 갈등들을 켜켜이 서로 토해내다가 기승전 이별이라는 결론으로 도달했다. 그의 차를 뒤로 하고 홀로 한 시간 가까이 집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그는 나를 차단했다. 


그렇게 며칠은 분노에 사로잡혀 '네 까짓것 없이도 잘 살 수 있어.'라는 마음으로 버텼다. 하지만 이미 오랜 시간 내 안에 잠식해 있는 그의 존재는 내 몸을 이루는 구성성분으로 물 다음으로 많았기에 나는 다시 그를 찾았다.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여전히 차단상태였다. 다시 분노가 일었다. 분노와 불안과 그리움과 초조의 무한굴레에서 나는 서류전형 합격 문자를 받았다. 내가 원하던 기업이었다. 면접 일자를 체크하면서도 기쁘지 않았다. 내 신경은 온통 폰에만 가있었는데, 울리는 알람소리에 서둘러 메시지를 확인하니 그가 아닌 면접일정 문자여서 김이 샜다. 웃겼다. 취준생에게 이 보다 기쁜 일이 어딨다고. 그러자 다시 죽고 싶었다. 그냥 내 존재 자체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감정상태는 불안정 그 자체였다. 작게 일렁이는 바람에도 풀썩 떨어져 내릴 것처럼 애처로이 달려있는 마지막 잎새처럼 위태로웠다.  


그런데 신은 날 배신하지 않았다. 전화가 울렸다. 그였다. 밤에 빵을 사서 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화해했다.




2017.11.27(월)


원하던 기업의 면접 합격 문자를 받았다. 이제 건강검진만 남았기에 최종합격이나 다름없었다. 순간, 건강검진? 내가 공황장애인걸 들키진 않겠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 걱정보다 기쁜 마음이 훨씬 컸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취준생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제일 먼저 엄마에게 그 후로 남자친구와 친한 친구들에게 차례로 연락을 돌렸다. 축하받고 싶었다. 그동안의 내 지옥 같았던 순간들이 헛된 게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가치 있는 인간으로서 실존한다고 떠벌리고 싶었다. 


교수님들께도 취직 소식을 알렸는데, 기기 분석 교수님께 갔을 때였다. 공황장애가 처음 발병했던 날, 내가 손을 여러 번 들어도 무시했던 교수님이었다. 평소 인자하고 수업을 잘하시기로 호평을 받는 교수님이었는데 그 일을 계기로 그가 기존에 내게 주었던 선한 이미지는 이미 와장창 깨진 생태였다. 그래도 그날의 설명은 필요할 듯하여, 아파서 수업을 끝까지 듣지 못할 것 같아 중간에 손을 든 거라고 말했다. 교수님은 살짝 당황하시더니 반항인 줄 알았다고 했다. 아니, 어떤 학생이 수업에 손을 들면서 반항을 하겠는가. 더군다나 나는 세상 조용하고, 세상 열심히 수업을 들었으며, 성적도 늘 과 3등 안에 드는 학생이었는데. 적어도 학생이 손을 들면, 질문이든 뭐든 할 말이 있는 거다 싶어서 물어보는 게 정상 아닐까. 그는 내심 미안한 듯 헛기침을 하며, 축하한다고 했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돌아서 나올 때 홀가분하면서도 씁쓸했다. 오해를 풀었다는 생각과, 그를 한 방 먹였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런 한 편 왜 반항하는 손짓으로 봤을까라는 생각이 풀리지 않는 실타래로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선에서는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그 일 한 번으로 그가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짓긴 힘들다. 분명 그 일이 있기 전에 그는 내게 좋은 스승의 이미지였기에. 하지만 이 날 여실히 느꼈다. 좋은 이미지를 쌓아 올리긴 힘들어도 공들여 쌓은 그 이미지를 무너뜨리는 건 한순간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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