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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D컬렉티브 Apr 11. 2021

백남준(Paik Nam June)

: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 하지 마라. 백남준도 해냈다.

 “나는 폼잡는 예술을 하고 싶지 않다.”  

  백남준,  1999년 12월 16일 동아일보 21면 


백남준, <시스틴채플>, 1993 을 배경으로


우리는 디지털미디어를 통해서 타인의 삶을 보고, 당일의 사건과 뉴스, 광고를 접한다. 세상은 생각보다 급격하게 변하고, 새로운 정보들이 쏟아진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디지털 정보의 홍수는 다양한 방식으로 유입되고 그 경로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이뤄진다. 특히, 코로나팬데믹과 함께 찾아온 디지털 사용의 급증은 개인의 편의와 생활환경에서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자, 개인의 활동을 지속시킬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다.  


디지털과 미디어는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었고,  

타인과의 소통과 협업이 뉴미디어를 통해서 이뤄지는 시대이다.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자 소통의 도구로 디지털 네트워크의 중요성이 급증되기까지, 1960년대에 디지털과 미디어의 파급력과 그 중요성을 인식한 예술가가 있다. 바로, 백남준(Paik Nam June, 1932~2006)이다. 백남준은 텔레비전, 비디오, 해프닝, 퍼포먼스, 신디사이저, 전자음악, 로봇, 사이버네틱스 미술로 다방면에서 활동한 예술가이다.      


# 미디어 아트, 전자예술, 사이버네틱스 미술, 개척자 백남준.      

마샤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백남준은 1960년대 이후 사회가 급격하게 발전하는데, 일조한 미디어의 확산을.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 1911~1980)보다도 앞서 주목하였다. 1960년 중순, “미디어는 메시지이다.” 미디어를 통한 지구촌문화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이후로  소비문화의 발전상에서 미디어의 확산과 대중매체의 코드 활성화, 광고의 미디어 등 스펙타클한 사회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 그리고 결국 미디어가 우리의 삶의 비중을 막대하게 차지하게 된 것이다. 백남준, 역시. 그의 선택은 사회의 변화를 간파하고, 이 변화를 무시하지 않았다. 자기만의 방식과 과정으로 미디어를 수용했다.     

 

백남준이 활동한 1960년대를 전후로 미국에서는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미니멀리즘 등이 미술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작품의 가격과 함께 상품이 된 예술. 경매시장과 딜러, 컬렉터의 등장, 미술의 대중화, 그리고 풍요로운 문화부흥기였다.  하지만, 백남준은 그 길을 걷지 않았다. 대중적인 작품으로 작품을 애호하는 구매자들의 이목을 집중받는 것보다, 그의 선택은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혁신이었다. 독일에서 백남준은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Arnold Schonberg, 1874~1951)의 12음기법에 매료되었다. 백남준의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활동의 기반을 미술이 아닌 음악에서 그 시작을 알렸다. 백남준의 삶에서 미디어는, 진부한 전통적 형식주의의 미술을 고수하는 주류미술에 대한 저항이자, 거부였다.   


존 레논, 요코 오노, 백남준 ,슈야 아베, 보니노갤러리,   1971

 1971년 뉴욕 보니노 갤러리(Bonino Gallery)에서 촬영된 사진 속에 존 레논(John Lennon, 1940~1980) , 오노 요코(Ono Yoko, 1933~), 백남준, 슈야 아베의 모습과 그들의 배경이 된 텔레비전, 이 모든 상황의 조합이 도전적이다. 음악인, 플럭서스 멤버들과의 인연, 오노요코, 그리고 공학자 아베 슈야와 함께한 백남준은 어떤 경계도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 오노 요코와 백남준의 마지막 만남은 2006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퍼포먼스 장례식에서의 넥타이 자르기, '입장객의 넥타이를 자르는 행위'가 그가 생전에 어떤 예술가였는지를 알려주는 현장이었다.


백남준경계를 완전히 거부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경계는 없었을지 모른다.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방식과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개념 하에 예술을 분파로 나누는 그 개념들에 대해, 백남준은 그 경계를 스스로 파괴한다. 누군가에게 스승이 있다면, 백남준에게는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라는 스승이 존재한다. 존 케이지의 존재는 이미 1960년대 활동한 예술인들에게는 많은 영향력을 끼쳤는데, 백남준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백남준,  <굿모닝 미스터 오웰>, 뉴욕 라이브 버전,  존 케이지 스틸컷, 1984, 비디오 57, 20분초,  컬러, 사운드

1984년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Good Moring Mr. Orwell>(1984)속의 영상이미지의 한 장면으로 존 케이지가 연주하는 모습이다. 백남준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을 통해서, 최초의 인공위성을 통한 라이브 영상을 소개했다.  1958년, 백남준과 존 케이지와의 만남은 존 케이지를 위한 테이프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에서 시작됐다. 백남준은 뒤셀도르프 갤러리 22에서 1959년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테이프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1959) 초연으로,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퍼포먼스로 그에 대한 존경을 표한 바 있다. 1962년 비스바덴에서의 플럭서스 멤버들의 활동의 시발점이기도 한 존 케이지의 실험음악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백남준은 그의 실험음악구성수업을 1950년대 말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와의 교류로 많은 영감을 제공 받았다. 존 케이지는 전자음악으로 시각미술가들에게 전통적인 매체의 경계를 허무는데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백남준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백남준은 창의적이고 실험적으로 밀고나가는 강력한 리더쉽의 예술가였다.       



《오리기날레》에서 백남준,  <머리를 위한 선>, 1961 /  <심플 >, 1961


백남준은 독일 쾰른씨어터 암돔(karlheinz Stockhausen)에서 열린 《오리기날레 Originale》(1961)에서의 액션을 담당하고, <머리를 위한 선 Zen for Head >(1961), <심플 Simple>(1961)을 공연한다. 《오리기날레》는 음악연극형식의 작품이다. 백남준은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1963년 백남준의 첫 개인전에서도, 제목만으로 그의 기획은 이색적이었다. 



백남준,《음악전람회-전자텔레비전》, 1963


《음악전람회-전자텔레비전 Exhibition of Music: Electronic Television》(1963)이다. 비디오아트의 초기형태인 이 전시는 바로, 백남준은 음악, 전시, 텔레비전으로 새로운 변화를 알린, 아니 누구도 생각지 못한 부분을 파격적으로 건드린다.  보통, 미술은 캔버스에서 붓질을 하고, 자신의 생각, 철학, 관념들을 쏟아내는 장이다. 캔버스가 자아의 표출의 출구로 본 추상표현주의 작가들과 다르게, 백남준은 자신의 정체성을 미디어를 통해서 혹은 미디어와 결합한 퍼포먼스를 통해서 강렬하게 등장시킨다.  


백남준,  <자석TV >, 1965  / <TV로댕>, 1982


17인치 흑백 텔레비전 수상기와 자석으로 조합된 백남준의  <자석TV Magnet TV>(1965),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생각하는 사람 The  Thinker>(1884)과 텔레비전의 조합,  <TV 로댕 TV Rodin>(1982)은 그의 텔레비전 수상기의 회로조작을 통해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도된 것이다. 미디어테크놀로지와 퍼포먼스, 전통적인 매체거부와 파괴. 무엇이든 혼합이 가능한 형태를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TV정원 TV Garden>(1974~2000)의 경우에는 비디오아트를 설치작업으로 인공자연을 만들어낸 작품으로 유명하다.  


백남준,  <TV 정원>, 1974~2000


한국에서의 백남준의 활동은 1990년대 이후로 본격화 되었다. 광주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 인포아트95》 ,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백남준: 비디오 때 비디오 땅》에서는 전시기획도 참여하였다. 국제적으로 쌓아올린 백남준의 명성은 자신만의 세계를 묵묵히 펼쳐온 시간 속에서 이뤄졌다. 아니, 지금까지도 백남준의 작품은 어떤 무엇보다도 동시대적이고 감각적이다.  미디어를 수동적으로 수용하지 않은 백남준백남준은 보여줬다도전과 시행착오를 겪고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끊임없이 움직인 행동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백남준의 미디어의 실험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미디어의 실험은 근래에 들어와 더욱 세밀하고 체계적으로 조직화되고 있다. 그리고 백남준과 함께 많은 것이 변했다. 텔레비전, 폐쇄회로 시스템, 영상녹화, 편집, 전자기술, 비디오 신디사이저 제작으로  조작을 하거나 혹은 화면의 채색, 레이저 테크놀로지의 범주가 반 고흐의 작품을 미디어로 접하는 시기까지 오게 만들었으니. 이제는 장르의 경계를 나누는 의미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변화하는 시대를 누구보다 앞장서서 마주하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간 백남준.      


백남준, <이태백>, 1987 / 비디오신디사이저, 1969, 1972


‘문화테러리스트’으로 백남준을 소개한 1960년대 말.  그리고 지금 현재. 백남준이 보여준 건 혁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백남준은 디지털과 첨단기술로 만들어낸 가상세계를 예견했고, 가상의 현실을 만들었다. 1990년대 이후로는 미디어의 발전과 함께 뉴미디어, 융복합시대의 도래를 빠르게 인식했던 백남준. 미디어의 발전을 단지, 수동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이를 역으로 이용한다. 이것이 백남준만의 디지털미디어시대를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을 읽고, 본다. 


모든 것이 예술이다


백남준은 변화를 수용하고그는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백남준은 시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타인의 시선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를 스스로를 가둔다. 우리 스스로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시도해라.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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