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이제는 익숙해진 쌀쌀함을 맞이하며 정들었던 레온 숙소를 떠나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푹 쉬었으니 이제 다시 걸을 일만 남은 것이었다. 높고 큰 건물을 비롯하여 많은 자동차와 사람들을 뒤로한 채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로 향했다.
오늘은 부득이하게 B언니와 나. 둘이서만 걷게 되었는데, 그렇게 오랜만에 팜플로나 조합이 다시 돌아왔다..!
다행히도 날씨는 청명했고 길도 포장도로여서 걷기에는 너무 좋았다. 붉은색의 그다지 높지 않은 집들을 지나쳐가며 앞으로 쑥쑥 걸어 나갔다. 언덕이 살짝 있을 때는 조금 힘이 들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나는 B언니와 같이 걸을 때면 (그때(팜플로나)도 그랬지만) 속도감이 엄청 붙는데 오늘도 여지없이 그랬었다.
(각자의 걷는 속도가 다른데, 비교해 가며 걸으니 좀 재밌는 것 같기도..?ㅎㅎ)
덕분에 다음 마을로 빠르게 진입을 할 수 있었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내부는 넓었으며 인테리어가 조금은 고급스러웠다. 우리가 들어서고 얼마 안 있어 속속들이 사람들로 채워진 이곳에서 나는 따뜻한 카페 콘 레체를 마셨다.
걸어서 땀은 나지만 이내 식어 서늘해진 몸에는 따듯한 라떼만한 건 없다는 생각이 들던 때였다.
이제는 포장도로가 아닌 흙길에 다다랐다. 떨어진 낙엽과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자 이게 진짜 순례길이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옆에 바로 포장도로가 있어 그곳으로 걸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느 정도 걸어가니 300.8km라고 쓰인 비석을 보았고, 또 아들과 같이 순례길을 걷는 부부도 보았다.
파란 하늘의 날씨는 너무 좋았지만, 숙소까지 남은 길에는 큰 마을들이 없어서 쉬는 것이 마냥 평탄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제법 꽤 많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아침에 먹다 남은 토스트를 챙겨 온 우리는 곧바로 먹을 장소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주위를 돌아보니 조그만 언덕 위 나무로 된 의자와 테이블이 보였다.
"옳다구나! 자판기도 있어!"
끝없는 도로와 길 위에 식당처럼 보이는 건물과 자판기, 편안해 보이는 나무 테이블까지 있어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언덕을 올라갔다.(언덕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리 높지 않은 수준)
...
열심히 올라갔지만, 식당처럼 보이는 건물은 운영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자판기는 잠겨있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곳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허탈하기 그지없었지만 빨리 다른 식당을 찾아보려 노력했고 끝내 식당은 아니지만 작은 슈퍼마켓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골목길을 지나 작은 슈퍼마켓에 들어간 B언니와 나는 마실 것으로 오렌지 주스를 샀다. 그리곤 슈퍼 앞에 있는 플라스틱 테이블에 앉아 아침에 싸 온 토스트를 먹기 시작했다. 한숨 돌리며 먹는 토스트와 오렌지 주스의 맛은 참 달콤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툭툭 털고 일어났다.
파란 하늘아래를 걷고 또 걸었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체감상 정말 많이 걸은 것 같은데 주위 배경이 도무지 바뀌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걸으면 건물도 나오고 마을 표지판도 나오고 해야 하는데, 그저 끝없는 길뿐이었다.
이때 나태지옥에 빠진 것만 같았다.
정녕 지루하리만큼 긴 길의 끝이 나오는 걸까 의심하며 고뇌하며 그렇게 계속 걸었다. 언젠가 길의 끝은 오는 법이니 우리가 도착할 마을을 상상하며 아무 말 없이 내리쬐는 햇빛사이를 걸을 때쯤 마을 표지판을 발견했다. 생각보다 마을이 커서 숙소까지는 꽤 걸어가야 했지만, 마을에 도착했다는 마음만으로도 너무나 기뻤고 안심이 되었다.
잘 다듬어진 길을 따라 들어가니 마을이 이렇게 아름다우려고 오는 길이 그렇게 힘들었나 보다 했다.
우리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N언니가 마중을 나왔고 우리는 함께 마을과 이어지는 다리를 건넜다. 무사히 나태지옥에서 빠져나와 숙소에 도착을 했고 다 같이 맛있는 저녁을 함께하며 유난히 길었던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