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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륭짱 Sep 17. 2023

순례 23일 차: 가장 행복한, 행복했던 아쎄보여

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22/11/11 금요일 Walking D+21 & Stayed 2(Logroño, Leon)

Astorga(아스토르가) -> El Acebo de San Miguel (엘 아쎄보 데 산미구엘) 약 37km


전날 밤, 밥은 든든히 먹었지만 마음은 참 헛헛했다. 구겨지고 구겨진 흰 종이를 다시금 꺼내보기 일쑤였으며, 생각할수록 내가 과연 철의 십자가를 넘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만 많아진 날이었었다.


출처) https://m.blog.naver.com/9541411/221873412007?view=img_23


고도표를 보면 작게 십자가 모양이 보이는데, 그곳이 우리가 지나쳐 가야 할 철의 십자가였으며 최종 목적지는 내리막길 중간에 있는 아쎄보였다. 걷는 거리도 길고, 오르막과 내리막의 환장의 콜라보라 난 배낭은 쿨하게 동키를 보내기로 했으며, 점심과 휴식시간을 계산하여 아침 일찍 숙소를 떠나기로 서로 약속을 했다.


(N언니는 사정상 이 길을 pass 함)

그렇게, N언니 없이 3명이서 떠나게 된 아쎄보!


깜깜하게 하늘을 감싼 새벽 6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각에 우리는 출발을 했다.


(왼) 아직은 깜깜한 / (오) 해가 뜨기 시작한


많이 어두워서 조금 무서웠지만 앞에 홀로 걷고 있는 순례자를 보니 괜스레 안심이 되었다. 묘한 동질감을 홀로 느낄 때쯤, 마을을 빠져나왔고 본격적인 순례길이 시작이 되었다. 이미 길은 시작되었고 발은 떠났으니, 나는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자신 있게 걷자!라고 생각했다. 쌀쌀했지만 춥지는 않던 날씨 때문에 그런지 발걸음은 가벼웠고 좋지 않던 K언니의 컨디션도 다행히 많이 호전되었다.


쭉 뻗은 길을 걸으면서 서로 걸음을 맞춰나갔고 속 깊은 얘기들을 끊임없이 나누었다. (걸으면서 할 수 있는 것 중에 최고는 바로 "수다"가 아닐까 한다.) 술을 마신 후 얘기를 나눴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는데, 그렇게 새벽부터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얘기를 하니 10km가 금방이었다.


숨도 돌리고 화장실도 갈 겸 우리는 한 바르에 들어갔고 각자 마실 것을 주문한 뒤 짧은 휴식을 취했다.


점점 줄어드는 키로수와 지나쳐가는 작은 마을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치는 동물들.

바로 이게 순례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풀밭에서 자유로운 소들을 보았고 사람이 살고는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작은 마을을 천천히 지나쳐갔다.


계속 걷고 오르고 하다 보니 생각보다 할만한데? 걷는 게 재미있네!라고 생각이 들었던 나였다.

걱정보다 오르막은 심하지 않았고 날씨도 걷기에 딱 좋아 기분이 상쾌하며 좋았다.


적당히 점심 먹을 장소를 찾은 우리들은 숙소에서 N언니가 싸준 토스트와 근처 작은 슈퍼에서 산 음료수로 배를 채웠고 마침 화장실도 있어 볼일도 해결했다. 그런데 이곳 화장실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문의 잠금장치도 없었으며, 물도 퍼서 직접 배설물을 내려 보내야 했었기 때문이었다. (aka 믿음의 화장실..) 하지만 이런 것도 순례길의 한 일부분, 이런 곳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 참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숲이 우거진 길을 오르고 오르자, FONCEBADON(폰세바돈)이란 마을이 나왔다. 이곳을 지나면 바로 철의 십자가를 만날 수 있었다. 꽤 많이 올라온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높고 푸른 하늘과 녹음이 짙은 땅의 대비가 너무 선명해서 마음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1. 점심 2. 믿음의 화장실 3. 폰세바돈에서 점프를


천천히 올라가면서 주변도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순례길이었어!"


라는 마음이 드는 아세보행이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철의 십자가에 도착을 했다. 수많은 돌이 가득 쌓인 한가운데 하늘을 찌를 듯이 놓게 솟아있는 십자가. 그게 철의 십자가였다.


멀리서 한번 가까이서 한번 보았다. 그리고 기념으로 사진도 찍었다.


(왼) 철의십자가에서 / (오) 아쎄보로 내려가는 길


단숨에 철의 십자가까지 올라간 우리는 그 근처에서 조금 쉰 후 내려갈 준비를 했다. (다들 알다시피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더 위험하다.) 이제 남아있는 구간이 급경사로 더욱 조심해야 했으며 시간도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해야 했기 때문에 많이 쉬지는 못했다. 





"이게 길이야?"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내리막 길이었다. 우리보다 먼저 간 사람들의 말로는 밤에 자신들은 이 길을 내려갔다고 했는데, 절대로 밤에 내려갈 수 없는 수준의 길이었다.


언니들의 스틱을 빌려서 천천히 조금씩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은 길만 보고 가야 하니까 고개를 들어 옆 풍경을 볼 수 없었는데, 그러다 잠시 쉴 틈이 날 때면 허리도 펴주면서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때 바라본 풍경은 너무나 멋졌다. 우리가 있는 왼쪽으로 차도가 산을 넘어 굽이져 있었는데 해가 살짝 지려고 할 때의 빛을 받아 그런지 살짝 노르스름한 색을 띠고 있었다. 우리끼리 "야~ 이건 광고에 나올 수준인데?" 하고 감탄을 했었던...



어느 정도 내려갔을까 저 아래에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 보였다. 그 말은 이 길도 거의 끝나간다는 것이었었다. 우리가 머물 숙소까지는 좀 더 내려가야 했지만, 우리는 바로 내려가지 않았다. 슬슬 해가 저물고 있었고 마침 그 풍경을 보라고 만들어 놓은 마을 위에 벤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다 같이 벤치에 앉아 남색 지붕의 마을 위로 해가 지는 따듯한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찍었지만, 넘 잘 찍었다. 언니들 사랑해요..




숙소로 들어가 체크인을 한 후 씻고 나와 밥을 먹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내가 보았던 새벽에 홀로 걷던 순례자를 만났고, 한국에 사부님이 계신다고 했던 외국인 순례자도 만났다.


따듯한 수프, 치킨과 감자튀김, 디저트로 푸딩까지. 그리고 오늘의 시원함을 더해 줄 맥주와 함께 즐겁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오랜 시간 걸었지만 정말 하나도 힘들지가 않았다.


이런 기분으로 산티아고까지 쭉 갔으면 하는 바람과 더불어 이제야 진정한 순례길의 의미를 알게 된 것 같은 하루였다.


아쎄보 숙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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