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타벅스 Nov 08. 2021

린다의 구별에 대하여

린다 시리즈 일침을 당하고도

 작가 김연수의 산문집에 한 구절이 벌에 쏘인 듯 따끔하다. “시간만 지나면 늘어나는 나이가 아니라 한 행동으로 그 사람을 구별 짓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남들보다 몇 년 더 살았다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구별’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작가의 말에 동의한다. 말과 행동으로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말고 살아가라는 일침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멀리 하고 싶은 사람과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으로 우리의 마음도 이미 구별 짓고 있지 않나. 남들보다 몇 년 더 살아 경험이 많다며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누군가를 조종하려 든다면 어느 쪽으로 구별하고 싶은 사람이다. 마치 며칠 여행한 곳을 다 아는 것처럼 떠드는 사람과 뭐가 다를까.      

 

 살고 싶은 곳과 살기 싫은 곳, 먹고 싶은 것과 먹고 싶지 않은 것, 친하고 싶은 사람과 친해지기 싫은 사람, 눈치 있는 사람과 눈치 없는 사람, 생각 있는 사람과 생각 없는 사람, 이미 우리는 많은 것을 구별을 하거나 당하고 살고 있다. 내가 구별 짓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당당히 말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내가 원하지 않는 쪽으로 구별당하고 있다면. 어느 쪽으로 구별을 당한다 해도 말과 행동은 어김없이 생각에서 나오니 억울한 일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 시간만 지나면 더해가는 나이에서 나오는 말 보다 행동의 무게에서 나오는 무언의 말이 더 힘이 있지 않겠는가.       

 

 나이의 무게가 삶의 무게와 비례하지 않을 것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경험이 적다고 삶이 가볍지 않지 않다는 말이다. 음식을 많이 먹다 체한 것처럼 누군가의 배부른 나이 앞에서 체증을 느낀다면 구별을 생각하지 않을까.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말을 걸고 말을 하게 한다. 보이는 행동 뒤에 보이지 않는 생각을 보려 한다.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행동할까’라는 말을 하면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에 때로는 분노하며 소리를 내게 된다.           

 

 작가는 소리 내어 일침을 가하는 데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극약 처방을 내리듯 ‘구별’하여 살고 싶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전 01화 린다의 소싸움과 로데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