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시리즈 편리하다는 공간
여럿이 혹은 혼자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장소와 공간의 빗장을 풀어 같이 즐기자고 한다. 숨길 마음도 숨을 곳도 없는 세상이 아니던가. 이분법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세상을 장소와 공간으로 구분 짓자면 어느 쪽으로 마음이 기울까.
김호기의 ‘예술로 만난 사회’에서 ‘장소와 공간’을 설명한 글이 있다. “우리가 거주하는 장소와 공간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전자가 일상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후자는 추상적인 생활이 진행되는 곳이다. 낯익고 따뜻한 곳이 장소인 반면 낯설고 메마른 곳이 공간이다. 장소가 아닌 공간에서의 삶이 다름 아닌 현대 도시 생활의 특징을 이룬다.”
숨김없이 보여 주는 구분 짓는 곳에 분명히 차이가 있다. 누군가는 호텔로 맨송맨송한 정신으로는 사 먹기 힘든 가격의 빙수를 제집 드나들 듯 먹고, 누군가는 집에서 만들어 먹고 혹은 맛있다는 빙수를 사 먹으러 맛집으로 간다. 값의 차이도 부정하고 싶지도 않지만 세상에는 저울질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도 있다. 우리는 사방을 구별하며 이곳저곳을 다닌다.
장소와 공간을 느낄 수 있다. 장소와 공간을 선택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어느 쪽이 더 좋다거나 편하다고 단정하고 싶지 않다. 삶의 희로애락은 장소와 공간이 구분 없이 일어나니까. 장소에서는 사람 사는 북적거리는 냄새가 나고 업무적 느낌의 공간에서는 단정하고 매끄럽게 발린 회색의 시멘트가 생각난다.
편리한 현대 도시 생활을 위해서 장소가 사라지고 공간이 늘어간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종종 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준비한 반찬을 접시에 담고 따뜻한 밥을 퍼주는 것이 좋다. 나에게 장소라 부를 수 있는 집으로의 초대는 언제인가부터 없어지고 공간에서 밥 먹고 차 마시고 헤어진다. 바쁜 현대 생활이라 어쩔 수 없지만 장소가 그리운 것은 나만의 마음일까.
덕유산 자락에 아담한 옛집에 다녀왔다. 시골집을 마련한 친구는 남편과 함께 많은 부분을 직접 고쳤다. 옛집 그대로 나무로 수리된 낮은 천장은 답답함 보다 아늑함이 있었다. 자그마한 텃밭에서 고추를 따고 손수 담근 김치와 야무지게 짜서 무친 아작한 오이지를 식탁에 올리고 마당 한편에 손수 만든 화덕에 닭백숙을 끓여 내는 집은 장소의 따뜻함도 전해진다.
장소는 화려하거나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 장소를 만드는 것은 마음인 것이다. 누구든 장소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찹쌀을 넣어 공들여 끓여낸 닭백숙이 어느 공간의 멋진 호텔 음식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시골 마당에서 푹 끓인 음식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친구는 낯선 공간이 아닌 장소로 불렀다.
장소를 만드는 일이 어려운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편리함에 젖어 친근한 장소를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기에는 마음의 장소마저 슬금슬금 사라지는 듯하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장소에 마음이 더 쏠리는 것은 여전히 서로에게 건네는 따뜻함이 살아가는 힘이 돼서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