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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 Aug 18. 2021

너를 맞이할 준비 중

01. 53 습격 사건

                                                                                                                                                                                                                  

이상하다. 나는 예전보다 건강식으로 적게 먹고, 만보씩 꽤 자주 걷는 편인데, 처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수치의 몸무게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이 것을 53 습격 사건이라고 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결혼 전에 헬스장에서 두세 시간 동안 헬스에 빠져 살았고, 세로 복근을 만드는 재미에 쏠쏠했었다. 야식과 치맥보단 헬스장을 좋아했었고, 결혼과 출산을 치르면서도(치른다는 표현은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이다. 예식이나 경건함을 포함하는 내가 잘 치른 큰 두 가지의 뜻으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내가 저장해 놓았던 근육으로 참 오래도 잘 버텨왔었다. 그러니까 근육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노력해서 얻는 값진 것임은 틀림이 없다.   


 오십이라는 선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생명의 선처럼 강박이었다. 키도 작은 편인 내가 살아남을 길은 살을 찌지 않는 것이다,라고 퍼진 아줌마는 딱 되기 싫다고 생각했었다. 나름 쓸데없는 자신감의 선이기도 했었고 선을 넘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간당 당 50이 되던 날은 먹는 것을 줄이고, 조금 힘들게 운동을 해 주고, 푹 자주면 곧 잘 내 몸무게로 돌아왔었다.

 운동을 해 봤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나는 언제든 꿈의 몸매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랬던 내가, 오십을 훌쩍 넘는 체중계의 숫자 앞으로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처음엔 새로 들인 체중계의 고장 같아서 남편한테 투덜대기도 했는데, 남편은 맞게 나온다며 그게 맞다고 한 번 더 쐐기를 박아 주었다. 솔솔 타고 들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은 아침에 날벼락같은 충격이었다. 부엌 의자에 앉는데 불룩한 배가 앉기에 답답해져 왔다. 어느새 일부가 되어버린 고무줄 바지 덕분이었나. 별 것들에 다 변명거리를 만들어야지 내 속이 다 편할 것 같았다. 진하게 내려놓은 달달 라테를 멀리 치워버렸다. 어쩌면 이 것이 주범일 수도 있었으니. 한 여름을 나는 이 달달 라테로 겨우 났으니. 고마워해야 할 라테를 나는 노려보는 중이었다. 캘빈클라인 26 바지를 입고 하얀 티를 무심히 걸치고도 봐줄 만했던 나는 아스라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다 점이 되어 허공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닿을 듯하더니 더욱 멀리로 얄밉게 팔랑대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 참, 내가 원! 곧 오십이라서 그런가 봐. 나를 위로해 보지만 처럼 씁쓸하고 마음이 아려온다. 그동안 나 자신을 너무 혼자 두었지. 이리 뒹굴든, 뭐라고 하든, 마음이 외치고 있는 말에 귀 기울여 준 적이 없는 것 같다. 너무 신경을 써 주지 못 한 내 몸뚱이한테도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사를 핑계로, 정리를 핑계로, 코로나와 끝도 없는 육아를 핑계로 너무 내 관리를 미뤄두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몸무게 때문인가, 아침부터 찌는 더위 탓인가, 빙글빙글 어지러웠다. 에어컨을 틀어보았다. 잠시 내 머리가 개운해지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머릿속은 이미 너무 많은 물음표로 터질 듯이 가득했다.

내가 뭘 그리 많이 먹었다고?

그래 어쩌다 몇 번, 곱창볶음이랑 해물찜, 물회랑 돼지갈비 그 정도 과식 좀 했다고 이런다니?

술이래봤쟈 남편이랑 어쩌다 오백 씨씨 가지고 알콩달콩 나눠 마신 게 전부이고, 운동을 안 한 것도 아니잖아?

걸으려도 지하철만 고집하면서 다녔는데?

살찔까 봐 일부터 운전도 안 하는데!


사소한 모든 것들에 다 화가 나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치워 놓은 싱크대가 반짝거리고 있었고, 음식물도 쌓아 두지 않아 청결한 개수대,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는 그릇들과 머그컵들은 내 몸과 정신 상태와 완전 딴 판이었다. 오늘따라 낯선 풍경들이었다.

생각이 너무 꼬리를 물어서였을까. 눈이 시렸다. 비비면서 생각을 하니, 눈영양제를 빼놓고 안 먹었다. 제약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보내준 약은 참 귀하고 좋은 것이었다. 작년 겨울 즈음부터 눈이 예전 같지 않아서 내 눈의 노화를 실감하고 있었고, 특단의 대책으로 밤에 보는 휴대폰을 많이 줄이고 있었다. 한 번 빠지면 끝까지 봐야 하는 정주행 스타일이라 밤이고 새벽을 가리지 않는 내 취미 덕분에 내 눈이 고생이었는데. 뭐 이런저런 내 눈의 모든 증상을 약이 한 방에 해결해 주었다. 너무 신기방기한 눈 영양제를 이리 보고 저리 보면서 이 작은 까만 알이 너무 소중해지고 있던 차. 하지만 기억력도 급격히 감퇴되다 보니 약 먹는 것 마저 잊게 된다.

홈쇼핑을 보는데, 때마침 속옷 세트를 팔고 있었다. 평소에는 일초만에 넘겼을 방송인데, 이상하게 몰입이 되기 시작했다. 색감도 고왔지만 화려한 레이스가 가득한 속옷은 내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이미 작은 것을 알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입고 있었던 내 오랜 속옷들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신 살찐 몸에 꼭 맞는 아름다운 속옷으로 기분 좋게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핑크색, 하얀색, 검은색, 누드색까지 모두 다 맘에 들어서 당장 바로 구매를 눌러버렸다. 정말 속옷을 오랜만에 사 본다는 생각을 하면서 철철이 입은 아이들 내의와 속옷을 또 사러 가야지 라고 동시에 생각했다.


옷장을 여니 오래된 속옷들부터 언젠가는 꼭 입으리라 아껴두던 고혹스런 자태의 옷들까지 가득했다. 웃음이 나기도 하하고 손바닥 한 줌도 안 되는 옷을 입겠다는 내 의지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과감하게 모두 상자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넉넉하고 편안한 옷들만 남겨 놓고서. 제법 가득해진 상자를 보며 리즈시절 내 몸매도 함께 보내기로 했다.


아이들도 남편도 잠든 밤, 씻고 거울을 쳐다보는데 유독 두피가 가려워오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방금 감은 머리 같지 않은 느낌에 나는 샅샅이 머리를 들춰보기 시작했다. 범인이 있었다. 다름 아닌 흰머리! 그저 딱 3센티밖에 안 되는 흰머리가 내 두피를 가렵게 만들고 있었다. 예전에 아빠가 흰머리를 뽑으면 하나하나 십원씩 주시던 그 마음이 이제야 공감이 되는 순간이었다. 뽑기 쉬워 보이는 위치인데, 코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도록 뽑힐 듯 뽑히지 않는 흰머리카락. 나에게 위풍당당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받아들여. 오십은 다르단다.

오늘 나를 찾아온 나잇살, 노안, 흰머리카락.

그런 것인 건가 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혼자 씁쓸하고, 혼자 외롭고, 혼자 감당해야 될 것인가 보다. 사랑스러운 남편도, 귀여운 내 아이들도 이런 시시콜콜한 내 마음을 알아줄 수 없는 것인가 보다. 무슨 일이든 속속들이 내 마음을 다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그러지 못하는 것도 있는 것인가 보다. 아무나 깨워서 내 흰머리 좀 보라고 떼쓰고 징징대고, 눈물 한 방울 툭 흘리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이내 마음을 접어버리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 이렇게 나는 50으로 가고 있다.

이런 질풍노도는 저리 가라 하는 뜨거운 밤을 보내면서 나직이 속삭여 본다.

건강하고, 그리고 대차게 50을 맞으리라. 하지만 준비할 시간이 내게는 필요해.라고.

누구보다 계획적으로 50을 맞으리라. 갑작스러운 증상과 나이 드는 내 모습을 받아들일 시간이 내게는 필요하다고. 그리고 넓은 마음가짐도. 아직은 나를 내 스스로 사랑하는 법을 아직 잘 모르고, 아직 하루를 온전히 쉬는 법도 잘 모른다고. 그동안 열심히 살아낸 나는 참 많이 고생했다고, 살찐 몸도 넉넉해지는 마음도 사랑할 줄 하는 그럴싸한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고. 하지만 이제 더 큰 사이즈의 속옷을 사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조금은 덜 먹고 운동해야겠다. 리즈시절도 돌아갈 수 있는 제일 젊은 날이 오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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