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적인 육욕의 쾌락
오늘은 이탈리아의 베니스로 가는 날이다. 인터라켄을 출발하여 브리그와 밀라노를 거쳐 베니스까지 기차 시간만 5시간이 넘는다. 브리그를 출발한 열차는 12시가 넘어서 밀라노에 도착한다. 다행히 밀라노에서 40분 정도 환승 시간이 있어 역 안에 있는 간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추천식당은 플랫폼 바로 앞에 있는 앨리스 피자집이다.
밀라노 전역에 프랜차이즈를 두고 있는 앨리스 피자 집은 전기 오븐에 구운 피자를 파는 식당으로 마르게리타 피자 등 클래식한 메뉴부터 트렌디한 스페셜 메뉴까지 다양한 피자를 판다. 저렴한 가격과 바삭하면서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 있는 이 집의 대표적인 인기 메뉴는 호박이나 가지 등 각종 야채가 토핑 된 야채 피자이다.살라미나 베이컨이 올려있는 피자는 대체로 짜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다.
점심을 먹은 후 기차에 탑승하면 다시 3시간이 지나야 오늘의 마지막 종착지인 베니스 메스트레 역에 도착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베니스는 다음 역이자 종착역인 산타루치아 역에서 하차하여야 한다. 하지만 한 정거장 전에 메스트레역에 내린 이유는 숙소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베니스 본 섬은 매우 좁고 복잡해 호텔시설이 안 좋은 데다가 가격이 비싸다. 그래서 많은 여행자들은 메스트레 역 근처에 숙소를 잡는다. 메스트레 역에서 산타루치아 역까지는 열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열차에서 내려 역 바로 앞에 있는 베스트 웨스턴 볼로냐 호텔로 이동한다. 호텔은 최근에 재단장하여 깨끗하고 넓으며 무엇보다 역과 슈퍼가 바로 앞에 있어 편리하다. 그래서 메스트레 역 근처에서 별점이 가장 많은 호텔이다.
호텔에서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역으로 와서 베니스의 종착역인 산타루치아 역으로 이동한다.
베니스의 매력은 베니스 중앙역인 산타루치아 역에 도착하면 바로 알 수 있다. 역을 나서는 순간 베니스의 이색적인 풍경이 영화 세트장으로 걸어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넘칠 듯 살랑거리는 파란 바다 위로 고풍스러운 파스텔 풍의 집들과 좁은 운하 위로 하얀 티를 입은 곤돌리에가 운행하는 곤돌라가 여행자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베니스는 <계속해서 오라>라는 의미의 도시로 1년에 천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찾아와 도시 전체가 계속 가라앉고 있다. 베니스 당국은 한때 여행자 수를 제한하였으나 인간의 욕망을 제도로 단념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할 수 없이 섬 주위에 기둥을 세워 부력으로 섬을 띄우는 <모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섬을 지키기에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118개의 섬들이 400여 개의 다리로 이어진 물의 도시 베니스에는 차가 없다. 모든 대중교통 수단이 배이며 시민들과 관광객들 대부분은 수상 버스인 바포레토와 수상택시를 이용한다.
역 앞에서 1번 바포레또를 타고 10분 정도 가면 베니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리알토 다리가 나온다. 리알토 다리 위에서 보는 베니스의 전경이 가장 아름답다. 베니스 특유의 파스텔 톤 집들이 S자 운하를 따라 늘어서 있는 가운데 꽃으로 장식한 식당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그 가운데로 수상 버스와 곤돌라가 천천히 자기 길을 간다.
리알토 다리에서 조금 걸어가면 산마르코 광장이 나온다.
나폴레옹이 세계에서 가장 장엄한 입구라고 말한 산마르코 광장은 산마르코 성당과 듀칼레 궁전 등 삼면이 화려한 건축으로 장식되어 있고 나머지 한 면이 바다로 열려 있어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최절정의 공간미를 자랑한다.
산마르코 광장에는 하얀 대리석의 열주가 늘어서 있고 그 열주 아래 1720년부터 내려오는 플로리안 카페가 있다.
<꽃과 같은>이라는 뜻을 지닌 이 카페는 광장의 한편에서 세계사의 고비마다 많은 사상가와 정치인 그리고 시인들이 새 시대를 예견하고 노래한 곳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괴테와 바이런 그리고 토마스 만 등이 있었으며 현대의 인물로는 프랑스의 시라크 대통령부터 영화배우 멜 깁슨까지 다녀갔다. 18세기 최고의 바람둥이로 불리던 카사노바도 플로리안 카페를 무대로 수많은 여성들과 사랑을 속삭였다.
산마르코 광장의 산마르코 성당은 예수 승천 후 최초로 예수의 복음서를 적은 마르코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지은 성당이다. 853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은 마가의 유해가 이슬람 신전 공사로 실종 위기에 처하자 베니스의 상인들은 유해를 몰래 베니스로 옮겨오기 위해 이집트 사람들이 싫어하는 돼지고기 바구니에 감추어 가져왔다. 그래서 성 마르코 성당 입구 천장에의 중앙에는 최후의 심판을 그 양쪽에는 성인의 유해를 가져온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성당안으로 들어가면 황금모자이크로 된 돔과 3천개의 보석과 80개의 에메랄드로 장식된 제단화 팔라도르 그리고 중앙제대 아래에 있는 마르코의 무덤을 만날 수 있다.
후세의 미술가들은 신약 성서의 4대 복음 저자들에게 상징물을 붙여주었는데 마태는 사람, 마가는 사자, 누가는 황소, 요한은 독수리로 하였다. 마가복음의 시작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착안해 마가를 광야의 맹수 사자로 정했다. 그래서 산마르코 성당은 물론 산마르코 광장 곳곳에 날개 달린 사자 상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세계 4대 영화제 중의 하나인 베니스 영화제의 최고의 상도 황금 사자상이다.
산마르코 성당 바로 옆에 있는 사랑스러운 핑크색의 두칼레 궁전은 베니스 공화국 총독의 청사로 9세기에 세워졌으며 그 이후로 시청과 법정 그리고 도제의 관청으로 사용되었으나 1577년 대화재로 처음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이후 재단장한 외관은 분홍색의 대리석과 흰색의 대리석을 교차해 밝고 화려한 베니스 공화국의 번영을 보여주고 있다.
궁전 안으로 입장하면 불타버린 르네상스 작품 대신 16세기 베니스의 거장인 틴토레토의 작품을 만나다.
2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궁전 안의 대 평의회실로 들어서면 천장과 사방 벽이 황금과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어 그 규모와 화려함에 모두 압도당한다. 이 곳에 틴토레토의 유명한 작품 <천국>이 회의실 정면 벽을 꽉 채우고 있다. <천국>은 세계 최대의 유화로 그리스도와 마리아를 중심으로 700여 명의 군상들이 제각기의 모습으로 하늘의 복을 누리고 있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그 스케일과 웅장함에 여행자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대 평의회실을 나와 계단을 내려오면 한 때 감옥으로 사용한 프리지오니 궁전을 연결하는 탄식의 다리가 나온다. 탄식의 다리는 당시 사형을 선고받은 죄수들이 이 다리를 건너면서 마지막으로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탄식을 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희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가 한 때 이 곳에 투옥됐다가 유일하게 탈출한 사람이다. 그는 감옥 천장의 벽을 뚫고 궁전의 연회장으로 이동하여 밤새 몸을 숨겼다가 아침이 되자 어제 연회에 참석해 술을 먹고 잠든 사람처럼 유유히 궁전을 빠져나갔다.
카사노바는 여성을 유혹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는 마음에 드는 상대를 발견하면 질문을 던진 뒤 그녀가 하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사랑의 4분의 3은 관심이다.
상대방에 대한 관심처럼 강력한 무기도 없다. 그는 호감 가는 여성을 만나면 현재 그녀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알아냈다. 그리고 그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스스로가 특별하다는 느낌이 들게 해 줬다. 카사노바가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굴을 먹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양에서는 굴을 <사랑의 묘약>이라고 불렀다.
궁전을 나와 산마르코 광장에 있는 곤돌라 탑승장으로 이동한다.
베니스에서 곤돌라를 빼놓으면 섭섭하다. 목청 좋고 잘 생긴 베니스 청년들이 노를 젓는 곤돌라를 타고 베니스 골목을 누비면 영화 속 주인공이 부럽지 않다.
오래전에 베니스는 외부의 침입을 받아 도시의 모든 처녀들을 빼앗겼다. 이에 신붓감을 잃은 베니스 청년들은 작은 배를 만들어 야밤에 소리 없이 기습해 처녀들을 되찾아왔다. 이때 사용한 곤돌라는 원래 장례용으로 사용하던 배였다. 도시의 면적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베니스에서 사람이 죽으면 성당에서 장례를 치른 후 묘지가 있는 이웃 섬으로 시신을 옮겼는데 그때 사용했던 배가 곤돌라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곤돌라는 베니스의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었으며 오늘날은 관광객을 위해 존재한다. 곤돌라가 검은 색인 이유는 1562년 베니스의 시령으로 사치를 금하였기 때문이다.
곤돌라에서 내려 저녁식사를 위해 산마르코 성당 옆에 있는 마르치아나 식당으로 이동한다.
이 집의 추천 요리는 이탈리아 하면 생각나는 스파게티 요리이다. 특히 바다 위에 있어 해산물이 풍부한 이곳의 추천 메뉴는 씨푸드 스파게티이다. 새우와 홍합 그리고 바지락이 들어간 씨푸드 스파게티는 올리브 오일과 함께 다양한 해산물이 빚어내는 감칠맛으로 이탈리아를 대표한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이 밖에 깔끔한 봉골레와 고소한 먹물 스파게티도 인기가 좋다. 또한 루꼴라가 올려져 있는 카프레제는 신선한 모차렐라 치즈와 토마토가 발사믹 소스와 어우러져 향긋하면서 신선한 맛을 선사한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산타루치아 역으로 돌아갈 때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미로 같은 골목길을 헤매며 걸어가야 한다. 베니스의 진짜 매력은 뒷골목에 있기 때문이다.
내일 당장이라도 침수될 것 같은 도시에 살았던 베니스 사람들은 생존의 배수진을 치고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모든 영광과 번영 그리고 쇠락을 경험했다.
13세기 적극적인 해상 진출로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모든 지중해 무역권을 장악한 베니스였지만 16세기 말부터 터키와의 전쟁에 패배해 지중해의 요충지를 하나씩 내어주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후 지구상에서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을 지었다.
미로 같은 뒷골목을 하염없이 걷다 보면 베니스의 화려한 문명은 어두운 뒷골목처럼 인간의 숙명적인 불안과 두려움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석호 위에 세운 이 미로 같은 이 도시를 토마스 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베니스는 숙명적인 육욕의 쾌락을
느낄 수밖에 없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