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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빛 Nov 12. 2020

날짜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오늘 어떤 상자를 열어보았습니까?


날짜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떤 서점에 가면, 기념일북을 판매한다. 보통은 책을 직접 보고 사지만 기념일 북은 특이하게 안을 볼 수도, 책을 고를 수도 없다. 책은 짙은 초콜릿 색의 상자에 포장이 되어 있는데, 겉의 황금색 글씨 덕분인지 선물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조명 아래 빛나고 있다. 조명은 노란색이고 상자는 갈색이다보니, 대낮에 가면 마치 찬란한 가을 단풍 같이 보이기도 하고 알리바바와 사십인의 도적에 나오는 빛나는 보물들을 품은 동굴의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겉에는 약간의 책에 대한 힌트가 적혀있고, 구매 전까진 안을 열어볼 수가 없으며, 상자 앞에는 각각의 날짜만 적혀있다.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나는 그 서점에 가는 걸 정말 좋아한다.
나만의 특별한 날을 책으로 기념하는것도 좋고, 책으로 그 날을 기억하는 것도 좋고.
처음에는 생일이나 특별한 기념일의 책을 샀는데 지금은 갈때마다 그냥 그 날짜의 책을 산다.
살아보니 기쁜 날이든 슬픈 날이든 내겐 모든 날은 무게가 같았다.
그래서 기념일북을 사는 모든 날이 특별하다.
특히 다른 책들과 다르게 기념일북은 그 책 자체에 그 날의 모든 기억이 담겨있다.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래서 그것들을 엄청 아낀다.

상자를 열어보면 예쁜 책갈피와 책, 그리고 그 책에 대한 설명이 짤막하게 적혀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책은 그 날짜에 태어난 작가의 작품이다. 작가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다. 한국부터 저 멀리 지구 반대 편의 작가까지, 아주 다양하다.
책의 종류도 편견 없이 담겨 있다. 어른을 위한 동화에서부터 시집까지 있다.
모든 책이 다 마음에 들었다. 일반 서점에서 잘 볼 수 없는 희귀한 책들도 많은데 약간의 책 편식이 있는 내게 골고루 먹으라는 엄마의 밥 한 숟가락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난 모든 책을 다 재미있게 읽었다.

아마 모두 그랬겠지만, 난 올 한 해 코로나블루가 엄청 심했다.
단순한 우울감이 아니었다. 피로감도 심하게 다가왔다. 돌아서면 집안일이, 또 돌아서면 아이의 일이, 또 돌아서면 남편의 일이, 또 돌아서면 조절능력을 이미 잃어버린, 발가벗겨진 감정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정 전에 잠드는 건 사치였다. 그나마 불을 끄고 누워도 불면증이 나를 괴롭혔다.
이 나날들이 반복되고 나니, 그 이후엔 어떤 뚜렷한 이유도 찾아지지 않았다. 우울은 그림자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내 안에 들어와 나를 갉아먹었다.

나는 나를 극복하고 싶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모든 일을 해 보았다. 햇볕도 쬐고 운동도 더 심하게 하고 책도 쌓아놓고 보고, 일부러 웃긴 영화를 틀어놓기도 하고.

물론 소용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순간 그 코로나블루마저 적응이 되었다. 그 우울이 극복이 된 게 아니라 "적응"이 된 거다. 언젠가는 녹아 없어져버릴 눈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하루하루가 그냥 싫었다. 오늘이 어제인지 내일인지도 모를 날들이었다. 오늘이 며칠인지도 모르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우리집은 4층인데, 그 날 밤 나는 뭐에 홀린듯이 베란다 앞에 서 있었다.
남편이 물었다.
뭐해?
나는 대답했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을까? 너무 낮아서 안 죽겠지?
.........
남편은 그런 나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날이 밝자마자 나는 도망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그렇게 집을 나섰다.
그 곳이 가고 싶었다. 그냥 그 모습이 보고싶었다.
한강대교를 건너며 맞은 칼바람이 그날따라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그 서가에 서서 아무말도 없이, 아무 생각도 없이 한 시간을 보냈다.
그 서가를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겉에 적혀있는 365일이라는 그 날짜들이 조명 탓에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마치 날짜들이 각각의 이야기와 기대를 품은 채 잠들어 있는 것 같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입을 맞춘 왕자님처럼 깨워달라며 우리를 기다리는 것 같다.
그 날짜들, 그 하루하루가 참 의미있고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서점을 찾아갔다.
날짜들에게 기대고 싶어서. 말 없는 그 위로가 받고 싶어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또 다시 당연한 다짐이 들었다.
시간을 소중하게 써야겠다는, 진부하지만 쉽게 망각하는 그 다짐.

난 내 시간을 잘 쓰고 있는거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거다. 그러니 우울해하며 시간을 아깝게 보내는 것 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하루하루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비슷한 하루일지라도 똑같은 날은 없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모여 결국 내 인생이 되는 거겠지.

기념일 북은 어떤 책이 들어있을지, 어떤 내용일지 모르기 때문에 그 속이 더 궁금한 걸 거다.  
삶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내 하루는 잘 포장된 선물 상자 같은 게 아닐까.

어떤 일이 펼쳐질 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삶을 더 진지하게 바라보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날짜들이 내게 말했다.


아직 오늘의 상자를 열어보지 않았잖아.
상자 속 책의 내용은 결국 네가 만드는거야.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오늘 어떤 상자를 풀어봤을 지 궁금하다.
부디 당신이 좋아하는 책이 들어있었기를.

어떤 하루였든, 빛나고 의미있었던 날이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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