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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빛 Oct 13. 2021

그럴 나이가 된 거야

그래도 언제나 반짝이는,


어느 주말 아침, 남편이 커피를 내리며 무심히 말했다.


“나 옷 좀 사줘.”


내 남편. 본인 옷과 신발 사는 것도 귀찮아서 대부분 내가 사다 주는 사람. 물욕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는 사람. 옷이나 신발 코디도 나보고 “알아서” 해달라는 사람.

그런 남편이 스스로 옷을 사달라고 하니 좀 의아했지만, 나는 그러자 하고 같이 따라나섰다.


남편은 매장을 이리저리 다니며 구경을 했지만 쉽게 구매를 하지 못했다. 나는 열심히 골라줬고 남편은 예쁘다며 탈의실로 들어갔지만, 계속 사지 않겠단다.

안 어울린단다.

두 시간이 지나자 나는 짜증이 슬슬 올라왔다. 도대체 옷을 몇 개를 보는 건지. 그럼에도 사지 않는 건 또 뭔지. 쇼핑이 하고 싶은 건지 윈도쇼핑이 하고 싶은 건지.


나는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남편에게 잠시 커피를 마시며 쉬자고 제안했다. 당이 떨어지던 나는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커피를 마시면서 숨을 골랐다.

아득했던 정신이 돌아오자,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근데 왜 옷을 구경만 하고 사질 않는 거야?”


남편은 우물쭈물하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나 요즘 늙은 것 같아. 뭘 입어도 안 어울려…”




남편의 회사는 복장이 자유롭다. 그래서 평소에는 늘 바지에 티셔츠같이 편한 옷을 입고 다니는데, 출장을 가거나 회사에 손님이 온다거나, 교육이 있을 때는 옷을 갖춰 입고 간다.


어느 날, 회사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거울을 보았더니, 얼굴이 너무 창백하더란다. 그날은 파란색 티셔츠를 입고 갔었는데, 색깔 탓인가 생각했단다.

그다음 날 아침, 일부러 붉은 계통의 티셔츠를 입었던 남편은, 이번에는 얼굴이 시커멓게 보이는 기적(?)을 경험했단다. 거울을 아무리 쳐다봐도, 뭘 입어도 산뜻한 느낌이 더 이상 없더란다.

그 이후로 남편은 난생처음 옷에 대한 고민에 빠졌는데, 동료들과 대화를 해 본 결과 그 이유는 바로 “그냥 그럴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단다.


동료들이 말하길,

예전에는 아주 유치한, 어떤 캐릭터가 그려진 옷을 입어도 나름 귀여워 보이고(?) 잘 어울렸는데, 지금은 무슨 옷을 입어도 안 어울린다고.

그래서 고르고 골라서 입는 옷들이 조금 가격이 있는 브랜드들의 옷들이라고.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고급 브랜드의 디자인이 “겨우” 어울리는 나이가 된 것이다. 조금이라도 어울리게 입고 싶고 화사해 보이고 싶은 것.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런 것 같다. 지하상가를 돌아다니며 사는 예쁜 옷들의 즐거움이 어느새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이유는 같다. 그 예쁜 옷들이 이제는 하나 둘 안 어울리고, 덜 어울린다. 옷이 문제가 아니다. 세월이 묻은 내 얼굴이 문제일 것이다.


“젊음”이 가장 큰 옷태가 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무엇이든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엄마가 알록달록한 옷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화사해 보이고 생기 있어 보이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남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세월이 어느새 조금씩 내려앉았다. 흰머리도 조금씩 보인다. 그렇지만 그 세월은 나와 함께한 시간들이기에, 그 시간을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우리는 알기에, 나는 내 남편의 모습을 언제나 사랑한다. 여전히 기품 있고 반짝반짝 빛이 나는 내 남편.


“왜, 뭐. 잘생겼기만 한데.”


남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나는 그날 남편에게 큰맘 먹고 여러 벌의 옷을 사주었다. 뭘 입어도 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기에, 뭐든 자신 있게 입으라고.


덕분에 얇아진 주머니 사정 때문에 당분간은 홀쭉하게 살아야겠지만, 뭐 어떤가. 남편은 근사했고, 그래서 마음이 흐뭇하면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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