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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빛 Oct 06. 2021

매직 아워


매직 아워(Magic hour):

매직 아워는 해오름과 노을이 지는 마법 같은 짧은 시간을 말한다. 카메라 촬영을 위한 일광이 충분하면서도 인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여명이나 황혼 시간대를 일컫는 것이다. 매우 따뜻하며 낭만적인 느낌을 만들 수 있으나 그 시간은 아주 짧다. 하루에 단 15분.





" 녹내장인 것 같습니다만.........."


청천벽력 같은 의사의 소견이었다.


나는 평소 안구건조증이 있다. 흔하다면 흔한 이 질환은, 특히 환절기에 증상이 심해진다. 두 눈에 모래알이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눈알이 부은 느낌도 든다.

여름이 뒷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무렵부터 나는 다시 안구건조증이 악화되었다. 하루하루 인공눈물로 버티던 나는 결국 안과로 향했다.

그런데 의사는 내 두 눈을 아주 심각하게 보더니 이것저것 추가 검사를 시켰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이곳저곳 검사실을 다녀야 했다.

검사 결과를 한참 바라보던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녹내장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내가 나이가 젊으므로, 2개월 후 재검사를 해보자며 일단 돌아가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고 하셨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녹내장.

시신경에 장애가 생겨 시력이 약해지는 병이다.

결국은 시야가 점점 어둡게 보이게 되며 심할 경우 실명이 되기도 하는 병.

진행을 늦추는 치료만이 최선이며 아직은 완치할 수 없는 병.


그날부터 내 마음속에는 절망이 걸어 들어왔다.


시신경이 죽고, 시야가 점점 어둡게 보인다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이는 아직 어려서 내 손이 많이 가는데, 시력을 잃게 되면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이가 대학을 들어갈 때까지는 건강했으면 좋겠는데. 만약에 아주 심할 경우엔 내 아이의 결혼식도 잘 못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내 남편은? 남편 얼굴도 흐릿하게 보이게 되면 너무 슬플 것 같은데. 그리고 난 아직 운전면허를 딴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곧 운전도 못하게 되겠지?

아니 그것보다 시력을 점점 잃게 되면 나는 나를 견딜 수 있을까?


스마트폰의 사용이 늘어 요즘은 젊은 층에서도 자주 발병한다지만, 막상 나에게 이 일이 닥치면 너무 암담해진다. 수술도, 특별한 치료약도 없는 병. 그저 안약으로 진행을 늦추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병.

어렴풋이 노년층의 질환으로만 생각했던 것이 나에게 갑자기 닥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터덜터덜 집에 가는 길. 오늘따라 왜 이렇게 하늘은 푸르고 꽃들은 예쁜지. 지나가는 사람들은 어쩜 이리도 다들 행복해 보이는 건지. 나 빼고 다 그래 보인다. 부럽고 질투 나고 짜증 난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들이 선명하고 쨍하게 보이는 건지. 눈앞에 보이는 아주 평범한 모습들이 사실은 무척 아름다웠음을, 그 아름다운 일상들을 충분히 누리고 있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특별할 것 없는, 눈부신 이 풍경들을 이렇게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날들이 앞으로 얼마나 될까.





달력에 2개월 후, 동그라미를 크게 치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2개월 후만 기다리는 내 모습이 바보 같았다. 가만히 있다가도 그 날짜만 생각하면 가슴이 쿵쿵 뛰었다. 모든 일이 짜증이 났고, 의욕이 없었다. 남편은 그런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면서 맛있는 것들을 사주며 위로했지만 내 입에선 그저 모래 씹는 느낌이었다.


살면서 늘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어떨 땐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가끔은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이 버거웠다. 그래도 나는 제법 씩씩하고 바르게 잘 살고 있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왜 나만 힘들까, 왜 나는 즐거운 일이 없을까.

왜 나는 걱정만 가득한 걸까.

왜 나에겐 매직 아워가 없을까.






슬픔에는 5가지 단계가 있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및 수용이 그것이다. 나는 재검사하는 날을 기다리며 부정과 분노의 단계를 넘어 결국 수용의 단계까지 다다랐다.

재검사를 해도 결과가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인정을 하자. 그리고 적극적으로 치료를 하자. 진행 과정을 늦추는 것에 주안점을 두자.


나는 2개월 후 재검사보다는 처음부터 치료에 목적을 두고 대학병원으로 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어차피 평생 관리해야 하는 질환이라면 그 방법이 나아 보였다.

30분이 넘는 여러 번의 검사를 하는 동안, 나는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 녹내장 아니십니다. 정상입니다.”


뭐라고, 이번에는 녹내장이 아니라고?


“ 고도근시를 가진 분들은 시신경이 일반인들에 비해 옆으로 치우쳐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녹내장이나 백내장 전문의가 아니면 가끔 그것을 잘 못 판단해서 오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이 그런 케이스입니다. 안구건조증 때문에 눈이 침침하고 불편할 수 있지만, 녹내장은 아닙니다. 오히려 녹내장은 아무런 증상이 없죠.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나를 보며 담당의가 씩 웃었다.

그것은 내가 본 가장 선명하고 환한 웃음이었다.






병원 바깥으로 나왔다. 다시 풍경을 보니 아까보다 더 선명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이 평범하고 소박한 풍경들과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는 남편과 통화하면서 오래간만에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행복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참 어리석었다. 늘 위만 쳐다보느라 목이 아팠고, 늘 뭔가에 억울했다. 왜 나만 힘들까 고민했고, 감사하기보다는 불만과 불평만 가득했다. 하늘 한번 쳐다보는 여유를 갖지 못하고 늘 시간과 급한 성미에 쫓겨 숨이 찼다. 왜 내겐 “특별한 무언가”가 없을까 고민했다.


예쁜 내 아이, 자상한 남편, 늘 내 편이 되어주는 가족과 늘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이웃들, 특별하진 않지만 평범하게 보내던 하루하루들, 봄에는 꽃에 감탄하고 여름에는 바다를 만끽하고 가을에는 단풍을 감상하고 겨울에는 눈 내리는 포근한 풍경을 바라보며 마시는 핫초코 한 잔의 여유를 누리던 나, 사실은 매 순간이 내게는 매직 아워였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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