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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YB Mar 22. 2024

불교 다이어트

<불교는 왜 진실인가> 책 리뷰

자연선택의 최종 목적은 오직 하나, 생명 개체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지각과 생각과 느낌이 인간의 일상을 끌어가는 것일까? 기본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실재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제공하는 지각과 생각과 느낌이 아니다.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데 유리한 지각과 생각과 느낌이 인간의 일상을 끌어간다.


간단하면서도 근본적인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정크푸드(칼로리만 높고 건강에 해로운 인스턴트식품)를 먹으면 순간적으로 만족감을 느낀다. 하지만 몇 분만 지나면 공허감 때문에 또 먹고 싶어 진다.


이 사례는  첫째, 우리가 빠져 있는 미망이 얼마나 미묘한 성격인지 보여준다. 물론 설탕 도넛 여섯 개를 한 번에 먹어치울 때 빠진 미망은 나를 구세주라고 여기는 과대망상이나 스파이가 나를 살해한다는 피해망상만큼 거대하고 명백한 미망은 분명 아니다. 사실, 이 책에서 보이는 미망의 여러 원천은 미망(delusion)이라기보다 환영(illusion)에 가깝다. 겉모습에 끌려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여기는 환영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환영이 더해지면 실재에 관한 거대한 왜곡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대수롭지 않은 환영이라도 완전한 미망만큼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둘째, 정크푸드의 사례는 감각 쾌락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물론 붓다가 실제로 정크푸드의 예를 들지는 않았다. 2천5백 년 전에는 정크푸드가 없었다. 그보다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은 결국엔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감각 쾌락에 강하게 끌리는 인간 내면의 일반적 역동이다. 우리가 구하는 쾌락은 빠르게 사라지며 결국엔 더 큰 쾌락을 갈망하게 된다는 것이 붓다가 전하는 메시지다. 우리는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다음번의 욕망 대상을 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인다. 다음번의 설탕 도넛, 다음번의 섹스, 다음번의 승진, 다음번의 인터넷 쇼핑 등…… 그러나 순간의 쾌락은 언제나 사그라지게 마련이고 쾌락이 사그라지면 더 큰 쾌락을 갈망하게 된다.


붓다는 인생이 고통으로 가득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는 붓다의 메시지를 온전히 해석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고통이라는 단어는 둑카(dukkha)라는 팔리어의 번역어로서 불만족(unsatisfactoriness)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 로버트 라이트

최근 다이어트 컨설팅을 해주면서 + 불교는 왜 진실인가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바를 나눠보고자 한다.

식량 자원의 공급이 불안정한 원시 시대에는 지방을 축적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다.

두 원시인 A, B가 있다.

원시인 A는 길을 걷다가 사과나무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3~4개쯤 먹고 배가 불러 만족감이 찾아왔다.

A는 사과나무에 달린 여러 사과를 뒤로 남겨둔 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그 어떤 과일나무를 발견할 수 없었다.

잡아먹을 만한 동물도 보이지 않는다.

2~3일 더 걸어가면 그곳에 새로운 사과나무 하나가 더 있지만

그는 2~3일 더 걸을 기력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그는 높은 확률로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의 전달해주지 못할 것이다.

한편, 원시인 B는 식탐이 많다.

그는 우연히 마주친 사과나무의 사과 하나 놓치지 않는다.

B 또한 A가 남겨 놓은 사과나무를 발견했고,

배불렀지만 나무의 사과를 꾸역꾸역 전부 먹어치웠다.

그래서 B는 새로운 사과나무를 발견할 때까지 조금 더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었고,

먹을 것이 극단적으로 없는 상황에서도 연명하기 훨씬 유리했다.

우리의 선조들은 원시인 B와 같이 식탐이 많아 사과를 다 먹어치운 사람들이다.

배가 부르더라도 남은 음식을 보이는 대로 먹어치웠고,

그 결과 끝까지 살아남아 그 유전자를 우리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된 것이다.

때문에 진화적으로 우리의 뇌는 이렇게 설계되어 있다.

맛있는 걸 보면 당장 먹고 싶고,

먹으면서도 다음에 먹을 걸 생각하고,

곱창이든, 케이크든 한 번에 다 입에 때려 넣고 싶고,

주기적으로 단 게 당기도록.




You're Not The Man Your Father Was

What’s behind all the downward trends? The answer is complicated. The decline in testosterone levels is almost certainly linked to higher rates of obesity (which suppresses testosterone)

(출처: https://www.forbes.com/sites/neilhowe/2017/10/02/youre-not-the-man-your-father-was/?sh=8fe39d38b7fd)


그러나 비만율에 따라 떨어지는 테스토스토론 수치 통계가 말해주듯

오히려 이 습관은 현대에 와서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데 불리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살아온 나날이 너무 길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온 몇 십 년은 생각보다 긴 세월이다.

그 긴 세월 동안 설탕, 정제 탄수화물, 동물성 지방에 익숙해진 혀를 바로잡기가 쉽지 않다.

당이 가득한 음료수 한 모금이 우리 몸으로 들어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우리는 곧 뒤돌아서 콜라를 찾게 된다.

하물며 유전자에 새겨진 몇 백, 몇 천년은 어떨까.


우리 뇌가 설계된 건 애초에 실재 세상을 '정확하게' 받아들이는 게 목적이 아니다.

자연선택은 인간이 생각과 느낌이 실제를 정확하게 반영하는지 관심이 없다.

뇌의 관심사는 오로지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

그에 유리한 생각과 느낌을 유지하는 것뿐이다.

인간의 뇌는 인간을 미망에 빠뜨리도록 설계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삶이란 건 결국 이 미망을, 원시적으로 설계된 미망의 뇌를 얼마나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이어트의 성패는 평생 살이 안 찌는 뇌 만드는 것, 나아가 살 안 찌는 체질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원시 뇌를 역행하는 것이 핵심이다.

원시 뇌 때문에 사람들은 쓸모없는 탐욕에 빠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향해 과도한 증오심을 느끼기도 하고,

과도한 식욕을 느끼기도 한다.



1980년 대에 닌텐도에서 출시한 NES라는 콘솔 게임기에 슈퍼마리오라는 전설적인 게임이 출시되었다.

이 당시의 하드웨어 스펙을 살펴보면 말이 안 된다.

40KB 게임 팩 하나에 게임을 실행할 때 필요한 모든 데이터가 들어있었다.

이 중 소스 코드가 32KB였고 그래픽 에셋(게임에 필요한 모든 이미지)은 고작 8KB에 불과하다.

게임의 한 장면을 캡처한 이미지의 용량(180KB)이 게임 용량(40KB) 보다 높았다.

그야말로 광기 그 자체의 상남자들이 개발한 게임이다.

도당최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면 아래 영상을 참고하길 바란다.

40KB 안에 게임 하나 쑤셔 넣기
출처: 코딩애플 https://www.youtube.com/watch?v=5ZXOV1ma35g&t=304s


하지만 기술을 집약적으로 발전해 왔고, 이제는 게임을 개발할 때 1980년대만큼 하드웨어가 제약적인 환경이 아니다.

지금은 2GB나 되는 램을 크롬 웹 브라우저를 띄우는데 쓰고 있다.

이렇게 발전된 지금, 게임 회사에 다니는 개발자가 여전히

"무. 적. 권 40KB의 메모리를 유지해야 해!!!!!!!!"

라고하며 위와 같은 개발 방법을 고집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코드와 이미지팩을 줄이기 위해 많은 개발 시간을 소요하는 판단을 내린다면

우린 그 개발자를 상남자라고 부르지 않고 ㅂㅅ이라고 부를 것이다.


개리 마커스의 '클루지'와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클루지는 한마디로 말하면 진화의 관성이다.

인간의 진화는 지금 당장의 생존을 위해 원시 사회에서 통했던 해결책 위에 또 다른 해결책을 땜빵하듯 덧씌우는 속성을 지녔다.

이전의 낡은 기능, 즉 지금에 와서는 전혀 실용적이지 못한 기능을 버리지 못해

우리로 하여금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판단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자청이 책 <역행자>에서 말했던 '유전자 오작동' 또한 비슷한 개념이다.

유전자 오작동은 외부 신호를 자꾸 왜곡하여 해석함으로써 잘못된 판단과 생각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뇌가 발달된 원래의 의도와 기능대로 움직이기 힘들게 만든다.

우리가 진실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들도 이러한 유전자 오작동, 원시 뇌의 착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결국 만족감을 느끼게 하여 행동을 유발하고, 습관을 관장하는 것은 뇌에 달려 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의 뇌가 진짜로 만족스러운 것, 그러니까 현재에도 미래에도 진정으로 우리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을 원할까?

절대 아니다.


그랬으면 우리 모두 이미 몸매는 아이돌이고,

게으름 따위 없는 24시간 유노윤호들이고,

우리의 교양과 지성은 소크라테스의 싸대기를 5만 대 정도 올려붙였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원시뇌의 신호(지방 마이 쪄! 설탕 좋아!)도

한걸음 벗어나서 총체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그게 쾌감이 아닐 확률이 훨씬 높다.

사실 ‘단 맛=쾌감=좋은 것’이 진실이 아닌데 자꾸 좋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미망에서 벗어나서 객관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된 대로 판단하면

지속적으로 클린식을 하는 게 훨씬 생존에 유리하다.

따라서 그지 같은 도넛보다는 클린식에 훨씬 만족감을 크게 느껴야 한다.

그러나 아직 뇌는 원시적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래서 다이어트에 성공한다는 건

비록 음식 하나를 대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된 세상을 마주 보고, 그에 미친 영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이어트뿐 아니라 삶의 모든 요소에서의 성공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전자와 본성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정체와 요요가 찾아왔을 때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반복된 실패에서 벗어나기 힘들어한다.


마치 선사시대에 최적화되어 있는 버그 덩어리 레거시 프로그램과 같다.

수천 년 전에 벗어나지 못하고 꼭두각시처럼 조종되는 삶이다.

언제쯤 인공적인 단맛을 극복하고 자연의 단맛에 익숙해질까?

그건 결국 우리가 얼마나 원시 뇌를 극복하냐에 달려있다.


우리가 하는 것들은 단순한 다이어트가 아니다.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선택을 역행하는 것이자,

자기 계발 측면에서의 유전자 오작동을 극복하는 것이고,

불교적으로는 사로잡힌 미망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 서적  

     불교는 왜 진실인가   

     역행자   

     클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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