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있다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교육할 것인가?
https://www.youtube.com/watch?v=8F2xbQJgHs4
인생 최후의 등산을 다녀왔다.
제대로 등산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사실 앞으로도 별로 하고 싶지는 않다.
산도 자연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 마음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아니라 인간 문명의 이기의 끝을 봤을 때 벅차오른다.
높은 첨탑, 도심의 빌딩 숲, 뭐 그런 것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을 지었던 사람들 중 아마 전생의 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는 정상에 섰을 때조차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젤다 배경이랑 똑같다. 아니, 어쩌면 젤다가 더 예쁠지도?'
생각해 보면 젤다를 플레이할 때도 암벽을 등반할 때가 제일 싫었던 것 같다.
느리고, 힘들고...
집에서 닌텐도만 딸칵하면 현실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이곳저곳을 돌아볼 수 있는데 난 어째서 이곳에 와있을까?
난 왜 패러 세일이 없을까?
난 왜 영걸 리발의 가호를 받을 수 없을까?
사당이라도 들려서 스테미너 칸을 늘려올 수는 없을까?
내가 기대했던 것은 애초에 산의 풍경보다는 사람들과 같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풍경도 사람들도 볼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땅을 보며 걸었다.
누군가 걸어오는 말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제대로 얘기를 나눌 수도 없었고, 가느라 지쳐 사진을 많이 찍지도 못했다.
너무 힘들어 심장이 아프고 숨을 쉬는 것마저 버거웠다.
시시포스와 같이 돌을 꼭대기로 힘들게 올렸다가 떨어지는 돌을 다시 올리기를 반복하는, 무의미한 벌을 받는 느낌이었다.
산에서 먹는 간식이 꿀맛이라던데, 대부분 먹지 못했다. 토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등산 후에 먹는 식사도 전혀 맛을 느끼지 못했다. 입맛도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등산 내내 그저 이 고통을 빨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내가 지옥이라도 다녀온 것 같아 보이지만그렇지 않다.
나는 단언한다.
내가 간 곳은 천국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천국 안에 있었다.
아니, 나는 천국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제자들아, 내가 장담하마.
너희 중에는 죽기 전에 천국을 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 예수, 누가 9:27
유대인이 천국에 대해 묻자 예수는 답했다.
"천국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할 수 없다.
천국은 너희 마음 안에 있다."
- 예수, 누가 17:21
예수가 가장 강조한 가치는 '사랑'이다.
더 정확히, 더 자세히 말하면, '가장 낮은 사람도 보듬어 주는 사랑'이다.
그저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한다.
나만, 내 연인만, 내 자식만, 내 옆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극악무도한 대학살을 저질렀던 아이히만 조차 자신을 사랑했고, 부인과 자식을 사랑했고, 옆집 이웃을 사랑했다.
그러나 '가장 낮은 사람에게도 하는 사랑', '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하는 사랑'은 인간이 실천하기가 가장 힘든 난이도의 인생 퀘스트이다.
이런 사랑을 실천하라고 듣는 다면 짜증이 치솟기도 한다.
불우이웃을 도와달란 말에, '나야말로 불우이웃이 아닌가'하며 돌아서게 된다.
나 혼자 먹고살기도 바쁜데, 우리가 왜 약자를 보살펴야 하는가?
왜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멍청한 사람을 이해해야 하는가?
베풀어도 돌아오는 것이 하등 없는 '연민의 사랑'은 아무런 이득도 없다.
사람들에게 호구 취급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사람은 자신의 삶이 평탄할 때는 연민의 사랑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연민의 사랑은 실천하기가 가장 어렵다.
약자를 배려하며 착하게 살든, 자기 욕심만 챙기고 남을 배척하며 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심지어 어쩔 때는 욕심 많고 이기적인 사람이 훨씬 많은 이득을 챙기는 것 같다.
그러나 진짜 차이는 해가 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어둠이 졌을 때, 불행이 찾아올 때, 삶이 지옥으로 변할 때 비로소 그 차이가 보인다.
고난과 재앙은 인생을 사는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자주, 여러 번 일어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많이 일어나게 되어있다.
지금 잘 살든, 못 살든, 여유가 있든, 없든, 삶은 때때로 부조리하기 그지없어서 우리가 필연적으로 반드시 재앙과 고난을 겪도록 만든다.
재앙이 닥치는 그때, 무너지는 자는 누구일까?
"내 말을 듣고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몰아치면
그 집은 크게 무너질 것이다."
-마태 7:24
모든 사람을 고귀하다고 믿는 사람은 스스로가 가장 낮은 자로 추락할 때에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때문에 인간은 재앙이 닥쳤을 때,
모든 사람이 고귀하다 믿는 만큼 버틸 수 있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약자를
한심하고, 무능하고, 가치 없는 벌레로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가 벌레가 되는 상황을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벌레가 된 인간의 처참한 지옥을 그려낸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리의 삶이 지옥으로 변한 것은 단순히 그가 바퀴벌레로 변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사랑하는 대상인 가족들에게 '쓸모가 없다'라고, '망가졌다'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타인에게 가치를 나눠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유한 제품이 망가지거나 제기능을 못하면 쓰레기 취급을 받는 것처럼
잘 작동하지 못하는 인간은 벌레 취급을 받는다.
때문에 우리는 보통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애정한다.
우리의 사랑은 행복할 때만 사랑이라는 인정을 받는다.
힘들 때는 짐이 된다.
소중한 사람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순간, 암에 걸리거나, 직장에서 잘리거나, 사고를 당하는 순간, 우리는 그가 망가졌다고 판단한다.
의무감에 그를 돌보긴 하지만 언제든지 그를 버리고 편안하게 가고 싶어 안달이 난다.
그때부터 이미 이별은 시작된 것이다.
소중한 사람이 벌레처럼 무능해지는 순간, 우리가 그레고르의 가족과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을까?
아마 혐오라는 무의식 위에 사랑이라 부르는 너덜거리는 의무감으로 마지못해 보살피고 챙겨줄 것이다.
그런 순간이 길어지면 우리는 소중했던 대상을 어떻게 버려야 할지 핑곗거리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이런 엔딩은 반드시, 스스로에게 돌아오게 된다.
우리는 언제 벌레가 될지 모른다.
그게 당장 내일이 될지, 수십 년 뒤가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반드시 벌레로서 죽게 된다.
실존적 위기를 맞이하고 의욕이 없어지는 것을 넘어
늙고 병들어 더 이상 가치를 창출해 내지 못할 때가 반드시 온다.
벌레나 짐짝취급을 당하며 살아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오게 된다.
나에게는 스스로가 그런 짐짝으로 느꼈던 것이 이번 등산이었다.
단언컨대, 나는 함께 등산을 한 20여 명의 동료 그 누구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세속적인 세상의 기준에서만 본다면, 벌레와 다름없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약한 자를 외면하지 않고 서로 도우려 들며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람들이 있어
나는 이곳이 천국임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수의 말대로 천국과 지옥은 현실에서도 볼 수 있다.
천국은 곧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천국은 바로 이것이다.
천국은 나와 함께 노래를 불러주었다.
천국은 지쳐하는 나의 모습을 봐왔던 중 가장 인간적이라며 좋아해 주었다.
천국은 아낌없이 마실 것을 건네주었다.
또 어떤 천국은 자신의 것인 등산 스틱을 7시간 내내 나에게 빌려주었다.
이렇게 걸어야 한다. 저렇게 걸어야 좋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중간중간 조언해 주고 격려하며 힘을 북돋아 주었다.
내가 스스로를 돌보느라 여념이 없이 무너져있을 때
천국은 내게 와서는 자신의 작은 짐과 나의 짐을 바꿔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나의 짐을 전부 가져가 대신 들어주었다.
군말 없이 내가 필요로 할 때 필요한 것을 주고 내게 필요 없을 때 그것을 거둬가 주었다.
또 다른 천국들은 마지막까지 힘내며 함께 걸었다.
힘들어하면서도 느린 발걸음을 같이 옮기는 그들을 보며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위안이 되었다.
맨 뒤에서 지켜보며 힘들어하는 우리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데리고 와준 천국도 있었다.
또, 어떤 나의 천국은 넘어지는 나를 일으켜 세워 주웠다.
부축하며 함께 마지막을 내려왔다.
나는 사실 그들이 나를 버려주길 바랐다. 어떻게든 버림을 받고 도중에 혼자 하산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제발 나를 버려달라고 애원하더라도 그들은 나를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가는 내내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봐주고 내가 할 수 있음을 격려해 주었다.
내 떨어진 당을 챙겨주었고, 내 체온을 신경 써 주었다.
그렇게 나를 둘러싼 천국은 끝까지 나를 버리지 않는다.
"왜 무릎 보호대를 챙기지 않았을까? 우리에겐 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텐데."
시큰거리고 후들거리는 무릎이 말을 듣지 않자, 어떤 전략을 취했어야 옳았던 것인지 복기하며 계속 후회하고 한탄했다.
나를 부축해 주던 한 천국은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러게. 지금도 충분히 잘하지만, 무릎 보호대가 있었다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었을 거야."
위로는 인간이 서로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정다운 행위다.
위로는 사랑의 핵심에 가까우며, 죽고 싶다는 욕망과 그럼에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차이를 만든다.
-<유년기를 극복하는 법> 중에서.
천국에게 둘러싸여 인간이 인간에게 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인 위로를 건네 받았다.
"네가 남을 판단한 그대로,
하나님은 너를 판단한다."
- 예수, 누가 6:38
몸이 나약해지거나, 정신이 나약해지거나, 직장을 잃고, 청춘과 건강을 잃고 벌레취급을 받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이러한 취급을 받는 일은 결국 나에게도 반드시 생길 일이다.
스스로가 나약해지는 것을 견디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힘든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매일을 극단적 선택을 생각하고 죽지 못해 살아갈 때,
누군가는 재앙을 이겨내며 삶을 축복이라 여긴다.
시련 하나하나에 무너지지 않고 그 시련을 딛고 살아가는 것은
먼저 차별 없이 모두를 고귀하다 여기고 배려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재앙을 견디는 법은 그저 인간과 사랑에 대한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달려있다.
"너희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들도 대접하라."
- 예수, 마태 7:12
시련이 몰아닥칠 때, 세상과 신은 부조리하기 그지없다.
세상과 신이 날 버린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세상을 조금 더 넓게 보면, 우주의 당위성도 깨달을 수 있다.
왜 하필 이런 시련이 우리에게 닥치게 되었을까?
왜 우리는 필연적으로 고난과 역경을 마주할 수밖에 없을까?
왜 착하게 살아도 나쁜 일이 일어나는 걸까?
알랭드 보통 피셜, 무신론자에게 가장 위안이 되는 구약성서인 욥기에서는 '어떤 사건이 왜 하필이면 그렇게 발생했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고, 우리는 그저 수수께끼로 가득한 우주에서 살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우주적 관점에서는 우리의 운명에서 생기는 의외의 반전 따위는 큰 사건도 아니고, 우리가 문제를 충분히 뒤로 물러나서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중요한 사건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무지로는 '부당하다'거나 '불합리하다'라는 단어를 함부로 쓸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주에는 인간이 적절하게 해석할 수 없는 비밀이 많으며, 따라서 자신의 결점투성이 논리를 우주에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주를 존재하게 만들지도 않았으며 우주를 지배하거나 소유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가끔 예상할 수 없는 재앙이 들이닥치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위기에서 그 사람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당신이 뿌린 것이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면 우리는 보답하고자 한다.
인생을 짧게 본다면 가끔 남을 괴롭히거나, 이기적으로 굴어도 괜찮을 것 같다.
한 두 번 정도는 운에 달려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대했던 모든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그 사회에서, 공동체에서, 세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결국 우리는 '인간'으로 인해 불행과 행복을 느끼며,
'인간'으로 인해 의미와 꿈을 가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은 최종적으로 뿌린 대로 거두기 마련이다.
칼 세이건이 말한대로, 우주라는 아주 거대한 극장의 지극히 작은 점도 되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증오하며 살아갔었는가?
작은 점을 소중하게 지키기 위해 우리는 서로에게 더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살면서 별로 뒤처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는 게 얼마만 이지?
누군가의 뒤를 따라가는 게 얼마만이었을까?
"모두에게 같은 시간, 같은 여유, 같은 상황, 같은 재능이 주어지지 않는다."
우습게도 이 간단한 사실을 오래 있고 살았다.
당연하다 생각하고 언급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항상 감사해야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돌아서면 또 까먹는다.
배려와 다정함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거론하지 않는 것들은 우리가 모두 축복처럼 받아서 누리고 있는 것들이다.
나는 더 다정할 수 있었던 순간에 왜 더 다정하지 못했을까?
등산지를 오고 가는 버스 내내 옆자리에 앉은 짝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나의 짝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사랑하기 쉬운 대상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감탄하는 그런 사랑 말이다.
우리가 길을 되찾기 위해서는 사랑해야만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서로 사랑하라 하셨느니라."
아이가 있다면 가장 중요하게 교육하고 싶은 것은
어떤 시련과 절망이 와도 극복할 수 있는 법을 알려주는 진정한 사랑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그를 통해 세상을 전부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진정한 사랑.
참고)
https://youtu.be/X9 aSi-8 TGe8? si=HDWAm51 HCNy8 z6 LX
https://youtu.be/eyShrIc4-_I?si=Yk5yekAAhZyL_tV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