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1] DAEWOO DEV-5 (1997)
도대체 '기술은 사 오면 된다'라는 무책임한 말의 근원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이 짧고 굵었던 90년대의 대우자동차를 대변하진 못한다. 로얄 시리즈의 흥행과 르망의 쏠쏠한 판매량으로 풍요로웠던 80년대를 마감하고 비로소 '기술 자립'을 목표로 홀로서기에 나선 90년대의 대우자동차는 그 어떤 브랜드보다 기술 마련에 목숨을 걸었다.
당시 대우자동차가 관심을 가지던 분야는 다름 아닌 '전기 자동차'였다. 1991년 5월 23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2000년대 초까지 과학 기술을 G7(선진 7개국) 수준까지 끌어올린다.'라는 목표로 발표한 'G7 프로젝트'에 전기자동차가 사업 내용에 포함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현대, 기아를 비롯한 타 국내 제조사들도 반강제로 참여하게 되었지만, 대우는 1993년 2월 부평연구소에 13명의 EV 개발팀을 구성한 이후로 르망, 에스페로, 씨에로 기반의 'DEV' 시리즈를 꾸준히 연구해 내놓으며 전기차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른 DEV들은 차후에 다시 다룰 계획이 있으니 참고.)
그리고 1997년 4월 23일, 제2회 서울 모터쇼가 개최됨과 동시에 대우자동차는 밀레니엄관에서 'DEV-5 (ASF 전기자동차)'를 공개한다. 'G7 2단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1996년 4월부터 개발된 이 차량은 대우가 그간 연구하던 전기차 전용 플랫폼인 '알루미늄 스페이스 프레임(ASF, Aluminum Space Frame)'을 적용한 전기차였다. 이 플랫폼은 충돌 안전성에도 유리할 뿐만 아니라 같은 플랫폼으로 픽업, 밴 등의 변형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또한 외부 패널은 유리섬유 강화 플라스틱(FRP)을 소재로 사용해 기존 차체 대비 30% 이상의 경량화를 실현했다.
DEV-5의 디자인과 설계는 프로토 모터스 (현 어울림 모터스)의 '김한철' 사장이 직접 담당해 5개월간 완성했다. 이후 3호차 까지 프로토 모터스에서 제작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자동차 기술은 당시 대우그룹의 막대한 지원을 받던 고등기술 연구원이 참여했다.
배터리는 종전의 전기차들에 쓰이던 납축전지 대신 델코와 대우자동차, 한국과학기술연구원 (KIST)가 합작해 개발한 고성능 Ni/MH(니켈-메탈 수소)를 언더바디 (차량 밑 바닥)에 장착했다. 이를 통해 배터리 교체를 간편화시켜 정비성을 높였으며, 넓은 실내 공간을 확보하면서도 탑승자의 안전성을 높일 수 있었다. 최고 속도는 당시 수준으론 꽤 우수한 124km/h를 발휘하며 1회 충전으로 201km를 주행할 수 있었다.
DEV-5에는 '대우 오토 PC'라는 컴퓨터 시스템이 적용되어 있는데, 이 시스템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CE가 설치되어 있어 내비게이션 시스템과 통신, 오락과 자체 진단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휴대폰과 연결하면 인터넷 전자 우편을 주고받을 수 있고, CD뿐만 아니라 DVD 롬 드라이브도 이용할 수 있었다.
1997년 첫 공개 이후 1999년 5월 11일 개최된 제3회 서울 모터쇼에서 3호차 (정식 명칭: DEV5-III)가 공개된 것을 마지막으로 대우그룹이 워크아웃 상태에 돌입해 프로젝트가 보류되었지만, 2009년 5월 결성된 전기자동차 산업 협회에서 소소한 개량을 걸쳐 'KEV-1'로 발표해 2010년 말 출시를 목표로 재개발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출시는 무산되었다. 현재는 모두 행방이 불분명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