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다룰 줄 몰라서

이혼가정(한부모 가정) 자녀로서 받은 영향 2

by 박다결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 - 존 싱어 사르겐트



부모님의 이혼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은 모두 다르다.


자녀가 타고난 성향, 성별, 나이에 따라서 다른 영향을 미치고 이혼 사유 또는 이혼 과정, 양육권, 주변 지인들과 친인척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영향을 미친다.


내가 이혼가정 자녀 입장에서 이 글을 쓰는 건 모든 이혼가정 자녀들이 나와 똑같은 경험을 한다고 단정 짓기 위함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부모님의 이혼은 자녀들에게 전부 다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 자녀들이 부모님의 이혼을 적극적으로 찬성한 상황이라면 생각보다 심리적인 타격을 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의 이혼이 끼친 악영향이 겹치고 또 겹쳤던 상황이었고 이때의 트라우마가 너무 강해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그 기억에서 살았다.


아픈 기억에 오래 머물게 되면 아주 당연하게 따라오는 문제점이 한 가지가 있다. 바로, 감정을 다루기에 서툰 사람이 된다는 점이다.






감정이란,
어떤 현상이나 일에 대하여 일어나는
마음이나 느끼는 기분을 일컫는다.


우리는 보통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감정 위주로 경험하기 쉽고, 그것이 감정의 전부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실 감정은 명징하게 한 가지 형태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기쁨도 그렇다. 기쁨 역시 순도 100%의 행복만을 담진 않는다. 그 안을 잘 들여다보면 기쁨을 만들어내기까지 지나온 인고의 시간이 농축되어 있어서 미량의 슬픔과 고통 역시 그 안에 담기기 마련이다. 이렇듯 모든 감정은 표면적인 감정 안에도 굉장히 다채로운 빛깔을 지니고 있다.


내가 경험한 극도의 우울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냥 바닥으로 가라앉는 우울만이 아니라 아주 미량이지만 그래도 잘 살고 싶다는 작은 불씨 같은 희망과 불순물이 함유된 애증이 뒤엉켜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지금은 그때 느낀 감정을 한 가지 형태로 정의 내리기 어려웠음을 잘 알지만, 당시엔 이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한없이 우울하고, 기력만 없었을 뿐.


우울함이 정말 괴로운 감정인 이유는 이 감정을 쉽게 털어놓을 대상이 거의 없다는 점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모른 척하며 매 순간 침묵으로 일관한 건 아니었다. 소극적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우울하다는 말을 꺼냈던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번번이 돌아온 말은 이런 식이었다.



“의지가 부족해서 그런 거야. 의지를 키워서 이겨내.”
“우울증? 그거 요새 젊은 애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며. 그런 질 나쁜 유행에 휩쓸리지 마.”



우울이 단순 의지 부족과 유행병의 소산이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감정을 무시당한 경험이 수년간 반복되면서 결국에 감정을 드러내길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우울하다고 말해봐야 의지 부족, 유행병 소리나 들을 텐데 더 이상 에너지 낭비하긴 싫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감정을 꾹꾹 누르게 되면서 기분이 상하는 모든 상황에 입을 꾹 닫는 나쁜 습관이 생긴 것이다. 학창시절에 친구에게 서운한 점이 생기거나 다투게 됐을 때도 그랬다. 정말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감정을 친구들에게 올바르게 표현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네가 한 말과 행동이 날 서운하게 한다고, 이런 건 조심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되는데 그 쉬운 말이 쉬이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또 다시 네가 이해심이 부족한 거고 예민해서 그런 거라고 감정을 묵살 당할까 봐 입술만 꾹 닫았다. 마치 그것이 이 갈등을 해결할 유일한 해결 방식인 것처럼.


친구들은 그런 날 보며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표정으로는 분명히 심기가 불편한 것이 뻔히 보이는데 입술만 꾹 닫고 있으니, 당연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을 거다. 몇몇 친구들은 기분이 상하는 일이 생기면 말 좀 해달라고 부탁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나쁜 습관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까지도 고치지 못했다.






그랬던 제가 성인이 된 이후로는 감정 표현을 잘하게 됐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바로 이렇게 아름다운 결론으로 바로 귀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은 꿈과 희망으로만 가득 찬 동화가 아니어서 다년간 억눌려있던 부정적인 감정은 성인이 된 이후 차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유년기에 받은 상처를 조금씩 직면하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결국에 한계선을 넘어버린 감정은 그동안의 한이라도 풀 듯이 강하게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조금이라도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들으면 참지 않고 응수했고, 표정 역시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또 한 번 부끄러운 고백을 더 하자면, 감정이 제어되지 않으면 주저앉아서 울어버리는 날까지 생겼다. 그것도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까지 내면서 말이다.



“어릴 땐 어른스럽게 굴더니, 다 커서 왜 그러니?”
“너 정말 잘못 컸다. 왜 그렇게 화가 많아진 건지 모르겠다.”



어릴 때나 성인이 된 이후에나 감정을 무시당하긴 똑같았고, 나는 나이만 먹었을 뿐. 여전히 그 아픈 시간 속에 머물러 있었다.








가끔 유튜브나 TV를 통해서
가족 구성원에 변화가 생긴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이혼가정 부모님이 나와서 아이와 소통하려고 노력하면 아이의 반응은 둘 중 하나다. 극도로 성숙한 모습을 보이거나 반대로 감정 제어가 잘되지 않아서 폭력성, 또는 눈물을 보이거나.


패널들은 전자의 아이를 보며, 참 어른스럽다. 착하다. 성숙하다. 라는 표현으로 칭찬해주려 하지만 나는 그런 장면들을 볼 때마다 매우 불편했다. 아이는 안정적인 환경에서 미성숙함에서 성숙으로 가는 발달과정을 자연스레 겪어야 한다. 그러나 불안정한 환경 속에선 이런 자연스러운 발달과정이 불가능해진다. 어린아이다운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부모님께 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아이가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아이답지 못하게 부모님을 생각해서 자기 감정을 누르고 있는데 그걸 어른스럽고 착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억압으로 느껴졌다. 도대체 아이가 왜 어른스러워야 할까? 착하다는 표현도 결국에 어른 입장에서 지내기 편하니까 던지는 말 아닌가?


이럴 땐 꼭 전문가가 투입되고 나서야 아이들은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낸다. 사실은 너무 슬프고, 멀어진 부모님이 보고 싶고, 갑자기 달라진 가정환경에 몹시도 두렵다고. 지극히 당연한 반응에 놀라며 그제야 안쓰러워하는 패널들을 보면 우리 세상은 아직도 이혼가정 자녀들에 대해서 무지하단 생각이 든다.


이건 어른스러운 것도, 착한 것도, 성숙한 것도 아니다. 어른들이 제대로 된 안전망이 되어주질 못하니 스스로가 차라리 미성숙한 어른이라도 되길 선택했을 뿐이다. 나라도 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일찍이부터 할 수밖에 없다는 게 얼마나 슬픈 감정인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다.


부모님의 선택에 가려져 감정을 내색하는 일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이혼가정 자녀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꼭 그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남 일 같지가 않고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슬픔과 분노를 꾹꾹 눌러 참으며 이혼한 부모님을 더 보듬으려는 아이라도 보는 날엔 말 그대로 억장이 무너진다. 그런 식으로 감정을 감추며 너무 이른 나이에 어른인 척 해버리면 성인이 된 이후에 더 고통스러워질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를 볼 때마다 늘 마음속으로 간절히 소망한다. 부디 저 아이의 주변 친인척들은 감정을 무시하는 이들이 아무도 없길. 그리고 너는 나처럼 살지 말고 네 감정 잘 표현하면서 자라길 바란다고. 그게 네가 조금이라도 덜 아플 수 있다고.






지금도 밤이 깊어지면 과거에 친구들을 힘들게 만들었던 순간과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서 폭발하듯 울어버리던 순간이 종종 떠오를 때가 있다. 강제로 애 어른이 되어서 내 감정보단 어른들을 더 이해하려 애쓰던 나날과 괜찮다는 거짓말로 웃어넘기곤 남몰래 울면서 잠들던 밤도 어제처럼 선연하다. 아프기만 했던 기억을 내면에서 깨끗하게 지워낼 순 없겠지만 이젠 적어도 새로운 다짐 정도는 할 수 있게 됐다.


대량의 우울엔 반드시 미량의 희망이 함유되어 있으니, 반드시 찾아낼 것.
내 감정은 반드시 가장 먼저 읽고 보듬어줄 것.


감정을 읽어주지 않는 어른들 속에서 자랐다고 해서 나까지 그런 무책임한 어른으로 자랄 의무는 없다. 감정을 배반하지 않는 어른으로 자라야 무너진 내면을 지키고 재건할 수 있다. 그 기회는 오직 자신만이 줄 수 있다.






*이혼가정 자녀에 대한 편견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길 바라는 마음에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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