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다가와 주는 사람들이 반갑긴커녕 오히려 불편해서 먼저 벽을 치거나 멀찍이 거리를 두곤 했다. 한때는 가족이었던 엄마까지 이렇게 생판 남인 것처럼 멀어지는데 다른 사람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을 거란 지레짐작 때문이었다.
도대체 잘해주는 이유가 뭐지? 의도가 의심스러워.
잘해준 만큼 보답을 원할 텐데, 그건 부담스러워서 싫어.
사람들과 부대껴야 하는 순간마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아무리 잘해줘도 의심부터 들어서 경계하는 게 일상이 됐고, 어떤 보답을 요구할지 몰라서 신경이 곤두섰다. 그래서 남에게 도와달라는 표현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고, 혼자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는 데 익숙해지고 말았다.
부디 이 공간에 아무도 침범하지 않기를.
이것만을 간절히 바라던 시간이 참 길었다. 존중받지 못했던 시간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가로막았고, 나는 오롯이 홀로 남겨졌다. 가족에게 상처받은 이가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은 더 이상 없다고 판단했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나조차 불신하며 살아온 것이다.
누군가와 친해지는 것만큼 두렵고 무서운 일이 없었다. 친밀함을 느낄 때마다 머릿속에 레드 라이트가 켜지는 것만 같았다. 여기서 더 가까워지면 위험해. 더 가까워지면 상처받는 일들이 또 다시 반복될 거야. 부정적인 사고회로가 여기까지 미치게 되면 심장이 빠르게 뛰며 공포감을 느꼈다.
이렇게 친밀한 관계로 인해 불안도가 높아지면 또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거리를 두면 외로워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끼는 일이 반복됐다.
처음엔 단순히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라고만 여겼지만, 다년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걸 보고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사람에게서 상처받길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란 걸, 말이다.
다른 사람은 인간관계에 새로운 진척이 있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궁금했다. 나처럼 불안한 환경에서 자라보지 않은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새로운 인간관계에 두려움을 덜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과 무게 추를 맞춰가는 과정을 흥미로워하거나 놀라워했으며, 기쁨과 설렘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과 정반대였다. 사람들과 가까워지면 두려움, 공포감, 심지어 언젠가는 헤어질 거란 확신과 함께 강한 예기 불안을 느꼈다. 부모님의 이혼 과정을 전혀 알지 못하고 무작정 통보를 받았던 기억이 선명해서일까. 이제 막 알게 된 사이인데도 이별부터 준비하는 습관이 생겼다. 준비하지 않은 이별이 닥치게 되면 심리적으로 무너지게 될까 봐 미리 방어막을 구축하는 데 시간을 쏟은 것이다.
다가오는 모든 인연이 처음부터 불안으로 정의되는 삶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이 불안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내면을 좀먹는지. 고립을 홀로서기로 착각하게 만드는지 말이다.
그때부터 어차피 모두가 언젠가는 곁을 떠날 텐데 마음을 닫은 채로 살자고 다짐했다.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혼자가 되길 자청하는 방법만이 상처를 받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신기하게도 이런 고립을 깨뜨리려는 사람도 있었다.
학창시절에 다니던 중고등 학교는 천주교 재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신부님 또는 수녀님께서도 담임 선생님을 맡아주시거나 수업을 해주셨다. 당시 우리 부모님께서 이혼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학교에 새 신부님께서 부임하셨다. 30대 초중반쯤 되는 나이로 서품받은 지 오래되지 않은 앳된 신부님이셨다.
학생들은 말도 잘 안 듣지. 철딱서니 없이 굴지. 매 순간 고단한 학교생활일 텐데도 신부님은 뭐가 그리도 재미있고 신나는지 항상 웃는 얼굴이셨다. 게다가 그리 많지도 않은 월급을 아이들 간식이나 필기구 선물에 쓰실 정도로 꽤 열성적이셨다.
아마도 그건 성직자로서 당연한 태도였겠으나 생판 남인 아이들에게 애정을 주는 일이 내겐 경이롭고 아름답기보단 불편함으로만 다가왔다. 어차피 2년 뒤에 다른 곳으로 발령받으면 또 떠나실 텐데, 뭐하러 저렇게까지 열심히 애정을 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던 것이다.
신부님께선 그 많은 학생 속에서도 나를 놓치지 않으셨다. 이혼 가정에서 자라 마음에 큰 상처가 있다는 걸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거창하게 상담을 해주신 건 아니었다. 단지 조금이라도 좋아할만한 일과 웃을 수 있는 일을 해내셨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는 걸 아시고 종종 책을 선물해주셨고, 먼저 유치한 장난을 걸며 어떻게든 웃게 하려고 노력하셨다. 한동안은 사람을 머쓱하게 만들 정도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웃게 됐다.
신부님은 마치 마음 문틈 사이에 괴어놓은 주먹만 한 돌멩이 같았다.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마음을 닫아버리기 전에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도록 버텨주는 존재 말이다. 신부님 덕분에 마음이 완전히 닫히지 못했고 고장 난 것처럼 열렸다가 닫히길 반복했고차마 그 돌멩이를 매정하게 치우지 못했다.
신부님께선 당시 학교 선생님과 본당 보좌 신부님을 겸임하고 계셨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면 자연스럽게 본당 일이 많아져서 학생들에게 신경을 덜 쓰게 되지만, 신부님은 그때도 날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크리스마스 당일에 잠깐 집 앞으로 나와 보겠냐는 연락이 와서 내려갔더니, 자그마한 초코케이크를 하나 안겨주셨다.
“혼자 울적해 할 것 같아서 왔어. 그래도 크리스마스잖아. 메리 크리스마스.”
집으로 돌아와서 한참 그 초코케이크만 멍하니 쳐다봤다. 워낙 어린 시절 이야기인지라 그날 케이크를 먹으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나는 거라곤 집에서 혼자 울면서 케이크를 먹었던 기억과 신부님께서 끝까지 챙겨주셨다는 사실뿐.
케이크 위에 꽂혀 있던 산타클로스 장식은 책장 앞에 올려두고 한동안 내 삶에 함께했다. 물론 나중엔 그 장식이 녹고 먼지도 앉아서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아주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으로 남았다.
내가 인간관계에 수동적인 태도를 고수하게 된 건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사랑을 주고받는 과정을 배워야 하는 시기에 버림받고, 무시당하고, 상처받은 기억만 가득했으니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쉽게 열 수 있었을까.
차마 더 넓은 세상으로 뻗어가지 못한 마음은 역으로 아주 오랫동안 내면만을 파고들었다. 사람을 향한 불신은 내면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렸고 시시때때로 내면을 단속했다.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생길 때마다, 혼자 있기 싫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더 깊은 곳으로 뿌리를 뻗고 나를 꼼짝할 수 없도록 옭아맸다. 또 상처받아서 완전히 회생 불가 상태가 되느니, 혼자 지내는 일에 익숙해지라는 듯이 말이다.
아직도 종종 사람을 만나는 일에 거부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예전처럼 완전히 사람들로부터 벽을 치거나 미리 이별을 준비하진 않는다. 적어도 나를 불신하거나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일 따윈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렇게 변화하기까지 여러 가지 경험과 고찰이 많았지만, 그 시발점엔 크리스마스에 받은 초코케이크가 있다는 걸 이젠 안다. 존재에 대한 불신을 약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고작 초코케이크였다니. 이보다 달콤한 해결 방법이 또 있을까. 세상을 향한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게 도와준 그 시절의 신부님께, 그날의 기억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