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우산이 있어

이혼가정 자녀로서 받은 심리상담 2

by 박다결
모닝워크 - 존 싱어 사르겐트.jpg 모닝워크 - 존 싱어 사르겐트




매주 공강 시간이 되면 상담실을 찾는 나날이 이어졌다. 처음엔 표면적인 이야기로만 가득하던 대화는 상담 기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내밀한 이야기로 발전했다.


“희결씨는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이 가장 싫어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싫어하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였다. 책임감이 없는 사람, 남의 상처를 유희 거리로 삼는 사람, 말을 함부로 하거나 공격적으로 하는 사람, 행동이 가벼운 사람,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 등등 도무지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려서부터 인생의 롤모델이라고 칭할 만한 인물보다는 반면교사로 삼을만한 인물들만 만나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지금 머릿속에 가장 크게 떠오른 사람은 툭하면 징징대고 투정 부리는 사람이요.”


내 입을 통해 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평소에 계속 생각해왔던 것도 아니었고 순간적으로 떠올라서 말한 것이었다. 내가 왜 이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어리둥절했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싫어요?”
“세상일이 징징댄다고 다 해결되진 않잖아요. 미성숙한 어린아이도 아니고 힘든 일도 삼키고 감내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밖으로 다 드러내는 사람을 보면 속에서 화가 치밀어요. 철없어 보여서요.”


여기엔 문장을 좀 더 정돈해서 쓰긴 했지만 실제로 당시 내 말투는 상당히 격앙되어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대학교에 오니까 별별 학생들을 다 만나게 되면서 당황스러웠던 적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성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상대방에게 징징거리거나 투정을 부려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많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민다는 얼굴로 열변을 토할 동안에도 상담 선생님께선 묵묵히 들어주기만 하셨다.


“어쩌면 그 행동을 희결씨가 가장 하고 싶던 걸지도 몰라요. 어린아이처럼 투정도 부리고 싶고, 마음껏 기대고도 싶은데 받아주는 어른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난 그동안 철없이 굴고 싶은 마음도 누르고 살았는데, 넌 왜 다 표현하고 살아? 같은 생각이 드니까 미울 수밖에요.”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 이런 식으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였다.


“희결씨도 가끔은 투정 부리거나 감정에 솔직해져도 괜찮아요.”


지금껏 어른들로부터 성숙함이 가장 중요한 덕목인 것처럼 배우며 자랐다. 나는 열네 살이었지만 엄마 대신이어야 했기에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거나 철없이 행동할 수가 없었다. 투정을 부린다거나 솔직해지는 건 내 사전에 없던 말이었다. 감정에 솔직해질수록 의지 부족이라며 더욱 강한 질타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남들도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는 편협한 사고에 갇혔던 것이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구나. 징징거리고 투정 부리는 행동이 커다란 잘못은 아니구나. 잘못된 사고방식이 크게 깨지고 나니까 과거에 얼마나 억압으로 가득 찬 생각에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었는지 알게 됐다.





“제가 그렇게 행동해도 괜찮을까요? 미움받을까 봐 불안해요.”


따뜻한 격려를 들으면서도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 자신이 없었다. 아직도 마음속엔 불안이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다년간 학습된 무기력이 몇 번의 상담만으로 해결된다는 것도 말이 되질 않았다. 상담 선생님께서는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비 오는 날에 내 모습을 그려볼까요?”


나는 볼펜을 쥐고 천천히 그림을 그렸다. 종이 상단부에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을 먼저 그리고 하단부에 나를 그렸는데, 손에 우산을 쥐어 주었다. 머리는 물론이고 온몸을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큰 우산이었다. 빗방울은 단 한 방울도 우산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상담 선생님은 그림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미술 상담에서 ‘비’는 앞으로 나에게 닥칠 장애물을, ‘우산’은 나를 보호해주는 힘이라고 해석해요. 그런데 그림을 보니까 우산이 굉장히 크고 튼튼해 보여요. 그건 앞으로 어떤 장애물이 생겨도 희결씨 안에 그걸 이겨낼 힘이 충분히 있다는 뜻이에요.”


격려에 익숙하지 않아서 다들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냐고 반문했더니, 상담 선생님께선 고개를 저으셨다. 비 오는 날에 내 모습을 그려보라고 하면 자신을 엄청 작게 그리거나 아예 우산을 그리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하셨다.


“희결씨는 남들보다 더 어려운 유년기를 보내고 지금껏 잘 버틴 사람이잖아요. 정말 대단한 일 맞으니까 자신을 좀 더 소중히 여기면 좋겠어요. 삶의 주도권을 더 이상 남에게 뺏기지 말아요. 이제 내 인생을 살아야 해요.”








가정이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해야 하는 가장 안정적인 울타리이다.


특히 아직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여건을 갖추지 못한 어린 나이일수록 가정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아이가 조금씩 성장해서 외부 환경과 접촉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예상치 못한 경험을 할 수 있는 확률 또한 높아진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상황을 대처하는 능력이나 감정 조절 능력, 인간관계에 대한 가치관이 조금씩 생기게 된다.


이때 안정적인 가정에 속한 아이의 경우, 밖에서 어려움을 겪고 돌아와도 심리적으로 크게 무너지지 않는다. 부모님께서 자연스럽게 그 경험을 통해 앞으로 어떻게 성장해나가야 할지 조언을 해주기 때문이다. 밖에서 어려움을 겪고 돌아와도 가정에서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주기 때문에 수렁에 빠지더라도 오래 헤매지 않을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처음 만나는 울타리가 이렇게 단단한데 두려울 게 무엇이 있을까. 울타리 밖으로 사나운 괴물이 돌아다녀도 마음이 평온할 것이다. 저 괴물을 어떻게 사냥할 것인지, 또는 저 괴물을 통해 네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지 알려주는 어른이 울타리 안에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 아이에게 세상은 두려운 공간이 아니라 게임 속 공간이 된다. 어려운 일도 게임 속 퀘스트가 되고 고통을 경험치로 습득해서 레벨 업하는 기회로 만든다. 안정적인 울타리만으로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가장 좋은 자산을 얻게 된 것이다. 나를 전적으로 지지해주는 어른이 가정에 있다는 건 그래서 정말 중요한 일이다.





그에 반해 부모님의 이혼 또는 사별 등을 경험하고 불안정한 가정에 속한 아이에겐 정반대 상황이 펼쳐진다. 밖으로 나가서 경험을 쌓아야 할 순간에 모양이 바뀐 울타리만 계속 눈에 들어온다. 왠지 지난번보다 울타리 높이가 많이 낮아진 것 같기도 하고, 부실해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개구멍까지 생긴 것 같다. 이미 가족 구성원이 달라진 상황이고 그에 발맞춰서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지만 어린 나이에 그 사실을 빠르게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변화는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인지라 이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바로 어른들의 태도다. 가정 환경에 변화가 시작됐음을 아이에게 온전히 가르쳐주는 어른들이 거의 없다. 당연히 어른이 나서서 걱정하지 말라고. 울타리 모양만 달라졌을 뿐이라며 의연하게 말해주는 것이 합당하지만, 어이없게도 어른도 똑같이 달라진 울타리만 쳐다보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심지어 아이에게 이 울타리 수리에 동참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하는 어른들이 많다. 성장하길 포기한 채 울타리를 재건하는데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유년기의 나는 후자의 삶을 살았다. 울타리 밖에서 레벨 업을 거듭하는 다른 집 아이들을 보며 부러워했는데 이 상담을 통해 그 아이들이 부럽지 않게 됐다. 내겐 누구보다 커다란 우산이 있으니까.


비록 이 울타리를 예전 모습으로 되돌릴 순 없겠지만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갈 용기를 얻은 것만으로도 기뻤다. 설령 괴물이 나타나더라도 이 우산을 접어서 검처럼 쓰거나 펼쳐서 멀리 날아가면 되겠지.






*이혼가정 자녀에 대한 편견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길 바라는 마음에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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