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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결 Oct 13. 2024

자존감을 살려준 첫 30분 달리기

블루 다이어리



   모두 달리는 목적이 다르다. 건강을 위해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삶의 방향을 바꾸고 싶어서 등 제각기 다른 목적을 안고서 내달린다. 달리기로 이루고 싶은 나의 최종 목적은 우울감을 해소하는 것이었고,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단, 최종 목표 이전에 이루고 싶었던 작은 목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오롯이 내 힘만으로 30분간 달려보는 것이었다.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30분은 달릴 수 있다고들 한다. 보통 한두 달만 주어져도 30분은 그냥 달린다지만, 기초체력이 부족하고 장기간 우울감에 허덕이던 나에게 30분 달리기란 에베레스트산을 등반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다. 30초씩, 1분씩 달리는 거리가 늘어날 때마다 압박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몸에 긴장도가 높아지니까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금세 숨이 찼고, 페이스를 낮춰도 호흡이 잘 가라앉지 않았다. 이 상태론 30분은커녕 10분 달리기도 어렵겠단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 고비는 매주 찾아왔다. 4분 달리기에서 첫 고비가 왔고, 다음엔 5분 달리기에서 고비가 왔다. 거기까진 무사히 잘 넘겼으나 7분 달리기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약 1km를 쉬지 않고 달린다는 게 부담스럽다 못해 무서웠다. 이때 처음으로 중도 포기를 했다.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달리기를 중도 포기하고 쉬는 동안 나를 힘들게 한 건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한다면 앞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냐는 질문이 매일같이 나를 따라다녔다. 7분 달리기도 못 하는 몸으로 어떻게 나를 지킬 거냐고, 평생 우울감에 발목 잡혀서 살고 싶냐고 내면의 내가 다그치는 목소리를 들었다. 결국에 다시 밖으로 달리러 나갈 수밖에 없었다.




   몇 달을 쉬다가 겨우 달리기에 복귀했지만, 나는 여전히 7분 달리기에 압박감을 느끼는 상태였다. 압박감부터 없애려고 가볍게 2분 달리기부터 다시 시작했다. 7분 달리기에 가로막혔던 기억은 2분 달리기에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때 이전에 달리기를 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았다. 페이스가 제각각이었고, 남은 달리기 시간만 떠올렸으며, 숨을 제대로 쉬지 않아서 호흡이 흐트러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달리는 동안 딱 세 가지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최대한 천천히 달리기. 달리는 시간은 생각하지 말기. 안정적인 호흡하기. 그 결과 나에게 압박감을 안겨준 7분 고비도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7분의 벽을 깬 뒤에도 나의 고군분투는 계속됐다. 7분 달리기에서 찾아왔던 고비는 10분 달리기에서 또 찾아왔다. 이쯤 되면 30분 달리기에 성공했다던 사람들끼리 합을 맞춰서 나를 속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마저 들 지경이었지만 그냥 계속 달렸다. 최대한 천천히 달렸고, 달리는 시간은 무시했으며, 호흡에만 집중했다. 단순히 이 세 가지만 기억했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달릴 수 있는 거리가 점차 늘어났다. 10분이 15분이 되고, 15분이 20분이 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25분을 달리고 있었다. 작은 목표로 삼았던 30분 달리기가 코앞까지 온 것이다.






   처음으로 30분 달리기에 도전했던 날, 나도 모르게 자꾸만 긴장됐다. 이때까지 잘 달려왔다고, 무려 25분도 달려냈으니 거기서 5분만 더 달리면 되는 거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필 이날 러닝크루 열댓 명이 모여서 달리는 걸 보고 괜히 더 기가 죽었다. 일사불란하게 달려나가는 러너들을 뒤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며 걷기로 가볍게 웜업을 했다. 다행히 러닝크루가 꽤 멀어지고 나서야 30분 달리기 시작 신호가 들렸고, 나도 앞으로 발을 굴렀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천천히 달리면서 호흡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15분 정도 묵묵히 달린 끝에 드디어 반환점을 돌았다. 25분 달리기까지는 그래도 꽤 부담 없이 달렸던 것 같은데, 역시 30분 달리기는 만만치 않았다. 계속 아무 생각 없이 달렸어야 했건만, 나도 사람인지라 종종 지금 몇 분이나 달렸지? 하면서 시간 계산을 했다. 시간 계산을 할 때마다 몸이 경직되고 호흡이 흐트러져서 몇 번이고 페이스를 더 낮추면서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머리에서부터 흘러내린 땀이 눈썹을 타고 눈꼬리로 떨어졌다. 손으로 대충 땀을 훔쳐내는 동안 팔과 다리도 슬슬 지쳐갔다. 허리가 자꾸 구부정하게 굽고 엉덩이가 뒤로 빠지려 해서 의식적으로 계속 허리를 편 상태로 달렸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걷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스스로 독려하면서 계속 발을 굴렀다.

   무념무상으로 달리는 동안 때때로, 이제 10분 남았다. 5분 남았다는 러닝 코치의 음성이 들렸다. 견뎌낸 시간만큼 달려야 할 시간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어느덧 1분이 남았다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광대가 씰룩거리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좋아서 웃은 건지, 실성해서 웃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이제 30분 달리기가 곧 끝난다는 사실이었다. 마지막 힘을 다 소진할 각오로 끝까지 달렸다. 호흡은 이미 엉망이 됐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저 여기까지 달려온 사실이 뿌듯하고 스스로가 대견하기만 했다.



   30분 달리기가 종료된다는 러닝 코치의 음성을 끝으로 속도를 늦추고 자리에 멈췄다. 이어폰에서는 러닝 코치의 쉴 새 없는 칭찬 융단폭격이 이어졌다. 목표를 완수했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당장 숨이 너무 차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충분히 가다듬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거칠던 숨이 서서히 안정을 찾으면서 170을 넘게 찍어대던 심박수도 140대로 가라앉았다. 그제야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고, 힘들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우울해서 방안에만 틀어박혔던 기억, 공원에서 러너들을 보고 가슴이 뛰었던 기억, 1분 달리기도 버거워하던 기억, 달리기를 중도 포기했던 기억, 다시 밖에 나와서 달렸던 기억 등 많은 순간이 빠르게 머릿속을 휘저었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하던 때만 했어도 감히 여기까지 올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울감에 젖어서 툭하면 나약하다, 쓸모없다, 형편없다는 말로 자존감을 깎아내렸던 터라 위축됐던 마음이 펴지질 못했다. 심지어 중도 포기까지 했을 땐 내가 정말 미웠다.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는 패배감이 다시 우울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갔고, 나와의 약속과 도전을 이어가길 택했다. 남들보다 페이스가 느리고, 생각도 많고, 긴장을 해소하느라 더 많은 시간을 소요했지만, 끝내 목표를 완수했다. 이보다 멋진 승리가 또 어디 있을까.

   1분만 달려도 땀이 비 오듯이 나고 숨이 가쁘던 내가 무려 30분간 쉬지 않고 달린 경험은 무너진 자존감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힘들게 30분이나 달린 나에게 더는 나약하다, 쓸모없다, 형편없다라는 비난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하다, 대견하다, 자랑스럽다처럼 따뜻한 응원만 쏟아져 나왔다. 이 응원은 남이 아니라 오로지 내가 나에게 건넬 수 있는 응원이란 점에서 더욱 큰 힘을 발휘했다. 나를 미워하지 않는 마음이 오랜만이라서 조금은 어색하기도 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이제는 단순히 미워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나를 좋아하고 싶다는 열망도 생겼다. 달려나간 거리만큼 우울에서 멀어지면 그 열망도 꿈은 아닐 것이다.


   “잠시 후, 위대한 러너의 30분 달리기 트레이닝 코스가 완료됩니다.”


   마지막으로 마무리 걷기까지 모두 종료되던 때에 러닝 코치가 했던 말이다. 그 말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내가 더는 우울한 사람이 아니라 러너라는 게 조금 부끄럽지만 기뻤다. 앞으로 나는 또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때론 버겁고, 지치고, 힘들겠지만 이젠 걱정하지 않는다. 30분 달리기를 해낸 나라면 반드시 그 일도 잘 해낼 테니까. 지금의 나를 믿듯 그때의 나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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