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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결 Oct 13. 2024

첫 달리기의 추억

블루 다이어리



   학창시절부터 유구하게 체육을 싫어했다. 얼마나 싫었으면 초등학생 때 체육 시간만 되면 배가 아프다는 거짓말을 자주 했을 정도였다. 체격도 작고, 체력도 약했던지라 거짓말이 티가 덜 나서 종종 운동장 계단에서 쉬곤 했다. 중고등학생 땐 이런 얄팍한 꼼수를 부리진 않았지만, 체육이 싫은 건 변함 없었다. 배구, 탁구, 축구, 피구 종목을 가릴 것 없이 전부 힘들었지만, 날 가장 힘들게 한 건 체력장이었다.

   체력장은 학생들의 기초체력향상을 위해 실시하는 체육 검정시험을 가리킨다. 학교마다 조금씩 시험 내용이 다른데, 내가 다니던 모교는 철봉 매달리기와 윗몸일으키기, 유연성 테스트, 달리기 등으로 시험을 치렀다. 다행히도 철봉에 매달리기와 윗몸일으키기에서는 만점을 받았지만, 달리기에서 평균을 다 깎아 먹었다. 그나마 단거리 달리기는 짧고 굵게 달려서 고통이 빨리 잊혔지만, 오래달리기는 달리는 시간만큼 고통도 비례해서 늘어났다. 당시 기초 체력도 부족한 데다 페이스 개념까지 없었기에 오래달리기 성적은 더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땡볕 아래서 오래달리기를 하던 내 모습은 마치 햇볕에 꼬들꼬들하게 말렸다가 다시 간장에 푹 담근 억울한 무장아찌 같았다. 사람이 운동 중에 이렇게까지 너덜너덜해질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걷지 말고 뛰어! 걸으면 다시 달리기 힘들어지잖아. 천천히 계속 뛰어!”


   걷고 싶다는 충동이 일 때마다 체육 선생님께선 귀신같이 알아채시고, 걷지 말고 뛰라고 소리치셨다. 그 말이 이해되질 않았다. 아니. 선생님. 걸어야 사람이 숨을 쉴 것 아닙니까. 제 심장과 폐는 오래 써야 하는데, 왜 일회용품처럼 오늘만 쓰라고 하세요. 욱해서 반박하고 싶은 생각도 오래가지 못했다. 달리는 순간이 너무 힘들어서 분노마저 잊힌 것이다. 그렇게 무념무상 무장아찌 상태로 운동장을 몇 바퀴씩 돌고 나서야 나무 아래 벤치에서 쉴 수 있었다. 오래달리기를 끝낼 때마다 친구에게 말했다.


   “달리는 건 미친 짓이야. 졸업만 하면 이 지긋지긋한 달리기도 안녕이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뒤, 나는 스스로 집 근처 산책로에 나왔다. 미친 짓이라던 달리기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오래전에 쏟아낸 말을 번복하려니 괜히 머쓱하기도 했다. 중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영원히 달릴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자발적으로 달리고자 마음먹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래서 사람 일은 모르는 거구나. 평소처럼 산책로를 왕복하며 걷다가 슬쩍 주변을 살폈다. 몇 날 며칠 걷기 운동만 할 땐 몰랐는데, 막상 달리려고 마음먹으니까 뒤늦게 다른 사람들의 눈치가 보였다.     


   잘 달리지도 못하면서 나댄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다들 걷고 있는데 나만 달려서 시선 집중되면 어떡하지.


이런 쓸데없는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걱정만 하다간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아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일단 해보기로 했다.


   내가 잘 달리면 진천 선수촌에 있겠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지. 설령 쳐다보더라도 잠깐일 테니까 크게 신경 쓸 것 없어.


마음을 고쳐먹고 달리기 어플을 열었다. 첫 미션은 1분씩 달리길 다섯 번 반복하는 저강도 인터벌 러닝이었다. 1분 달리기가 끝날 때마다 2분씩 걷기 시간이 배치돼있어서 왠지 이 정도는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가볍게 몸을 풀고 나서 호기롭게 달리기 시작을 눌렀다. 그러나 이 얄팍한 기대는 곧 후회로 되돌아왔다.




   달리기 시간은 고작 1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달리고 러닝 코치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이쯤 되면 첫 번째 달리기가 끝났다는 말이 들려야 하는데, 야속하게도 30초 남았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부터 시간이 왜곡되고, 땀이 줄줄 흐르고 숨이 찼다. 첫 번째 달리기가 끝나고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1분 달리기도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30분을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단 건지 의문이 들었다. 달리기 초보자들을 현혹하려는 고도의 계략이 아니고서야 이럴 순 없었다.

   이상한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달리는 시간뿐 아니라 걷는 시간마저도 왜곡되긴 마찬가지였다.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건만, 두 번째 달리기를 시작한다는 코치의 음성이 들렸다. 이때부터 러닝 코치의 음성이 흡사 저승사자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이미 시작한 운동을 멈출 순 없어서 시키는 대로 무작정 달렸다. 달리는 횟수가 추가될 때마다 힘들어서 온몸이 너덜거렸다. 졸업한 지 10년이 지난 뒤에도 나는 달리기 앞에서 여전히 억울한 무장아찌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1분간 달리길 다섯 번 반복하고 쿨다운으로 5분을 더 걷고 나서야 첫 인터벌 러닝이 끝났다. 달릴 땐 힘들어서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을까 후회했지만,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 전혀 다른 감정이 확 밀려들었다. 자발적으로 나와서 달리기로 했던 선택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으려 다잡았던 마음. 힘들어도 걷지 않고 달렸던 태도와 기어코 해낸 경험이 어우러져서 가슴이 뭉클하면서도 벅차올랐다. 그건 오랜만에 느껴보는 성취감과 해방감이었다.

   우울에 깊게 매몰돼서 다시는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힘들었던 기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실없이 웃음이 났다. 싫어하던 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는 거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으면서 문득 나를 위해 더 살아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단 한 번의 달리기로도 이렇게 웃었는데, 달리는 날이 많아지면 더 많이 웃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든 탓이다. 그래서 계속 달려보기로 했다. 천천히 나만의 보폭으로 나아가보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비록 땀에 푹 젖은 모양새긴 했지만, 표정만큼은 밝았다. 억울했던 무장아찌가 비로소 행복한 무장아찌로 거듭나던 첫 달리기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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