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801 Rome Zürich
오늘은 로마 일정을 마치고 스위스로 넘어가는 날이다.
어젯밤 야경 투어 때문에 늦게 잔 통인지, 9시가 다 되어 잠에서 깼다. 애초 계획은 아침 일찍 준비해서 나가려고 했지만, 시간이 늦어버렸다. 일단 부랴부랴 아침을 차려 먹었다. 아침 메뉴는 너구리 라면, 어제 먹고 남은 된장국, 소고기 구이. 아침 식사치곤 진수성찬이었다. 부지런히 식사를 마치고, 체크아웃을 위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숙소를 나서니 11시 30분 정도였다.
로마에서의 둘째 날이자 마지막 날. 무엇을 하면 좋을지 많이 고민했다. 주어진 시간은 불과 4시간 정도. 선택의 폭은 넓지 않았다. 고민 끝에 다시 트레비 분수에 가기로 했다. 세현이 녀석이 어제 분수가 좋았는지 계속 트레비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 한낮의 트레비도 아이들에겐 좋은 경험일 수 있겠지.
우리가 지내기에 정말 완벽한 숙소였지만, 호텔이 아니었기에 짐을 보관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짐을 다 챙겨 집을 나섰다. 피라미데역까지 힘겹게 걸어가서, 지하철을 타고 테르미니역 도착했다. 한 것도 없이 벌써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잠시 화장실도 들를 겸 2층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가격은 조금 비쌌지만, 휴식을 위해 커피와 머핀, 아이들 정체불명의 녹색 주스를 주문했다. 커피와 머핀은 나쁘지 않았지만, 아이들 주스는 말 그대로 정체불명의 맛이었다. 거의 다 남겼다.
이러다 오늘 아무것도 못 하고 공항으로 가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고 짐을 다 들고 트레비에 갈 수는 없는 노릇. 돈이 조금 아깝긴 했지만, 역 1층 짐 보관소에 짐 맡긴 후 트레비 분수로 이동했다. 숙소를 출발해 여기까지의 과정을 단 몇 줄로 표현했지만, 이 모든 과정이 2시간 넘게 걸렸다. 아이들과 함께하면 시간이 너무 빠르다.
오후 2시 30분. 어느덧 아이들 낮잠 시간이 되어버렸다.
아침부터 준비가 늦어진 탓에 점심 식사도, 트레비 분수 구경도 애매해져 버렸다. 우리는 일단 지하철을 이용해 트레비 분수 방면으로 향했다. 세온이는 가는 길에 잠들었고, 세현이는 트레비 분수에 다시 가겠다고 피곤함을 참는 눈치다.
드디어 트레비 분수에 도착했다. 어젯밤보단 분수 주변은 덜 붐볐다. 온이는 자고 있었기에 유모차는 들고 내려가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위에서 유모차를 지키고, 세현이는 엄마와 함께 분수 주변으로 향했다. 덜 붐벼서인지, 태양이 비친 물의 색이 아름다워서인지. 야경보단 에메랄드빛 트레비가 더 보기 좋았다. 세현이가 동전을 던지는 사이 나는 망원렌즈를 이용하여 사진을 몇 컷 남기기 시작했다. 조금 멀리서,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녀석을 보니 정말 많이 컸다. 시간이 참 빠르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인근 식당으로 이동했다. 시간이 된다면 콜로세움 인근의 식당에 다시 가고 싶었지만, 지하철을 타고 다시 이동하기엔 날도 덥고 힘들었다. 구글에서 검색한 인근 식당에 들어갔다. 다행히 내부는 시원했다. 우리는 마르게리타 피자와 봉골레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다른 메뉴를 모험하기엔 배가 고팠다. 트레비 근처여서 그런지 가격도 만만치 않았기에, 실패 확률이 낮은 쪽을 택한 것이다. 음식 나올 즈음 세온이가 기상했다. 생각보단 일찍 깨버렸지만,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점심도 먹어야 하고, 밤에 비행기에서 잘 수 있으면 좋으니까. 음식 맛은 다행히 좋았다. 두 아들은 피곤해서인지 잘 먹진 않았다. 결국 또 아빠 엄마만 배가 부르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갈 길이 멀다. 테르미니역을 출발해 피우치미노 공항까지.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스위스 취리히까지. 긴 여정이 조금 막막하지만, 스위스는 여기보다 시원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힘을 냈다.
테르미니역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구글 지도를 검색하니 마침 3분 정도 후면 버스가 온다고 해서 기분 좋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20분이 다 되도록 버스는 오지 않았다. 나폴리의 악몽이 재현되는 것일까. 구글 지도 정보가 어떨 때는 기가 막히게 잘 들어맞지만, 또 어느 때는 오차가 심하다. 구글의 정보만 믿고 여행 계획을 세우다가는 이렇게 고생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구글 지도는 편리하게 여행을 다닐 수 있도록 해주는 소중한 친구이면서, 오히려 더 힘들게도 하는 애증의 존재이다. 그런데도 구글 지도가 꼭 필요한 이유는 맛집을 찾을 때 아주 유용하기 때문이다. 식당 정보를 수집할 때 우리 부부의 구글 지도에 대한 신뢰는 상당하다. 대체로 4점 이상 식당은 언제 어디서든 실패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하여튼 구글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여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고면 무척 고마운 존재. 하지만 아이들과 더운 곳에서 이런 식의 기다림은 마음이 참 어렵다.
힘들게 테르미니역에 다시 도착했다. 아내의 친구 아이들 선물과 조그만 가방을 구경하려고 테르미니역 안에서 잠시 시간을 가지려고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이미 많이 지체되어 공항으로 바로 가야만 했다. 우리는 맡겨 놓은 짐을 찾고, 공항행 티켓을 구매하기 위해 역 중앙으로 향했다. 중앙 자동판매기에서 티켓을 사기 위해 서 있는데, 낯선 외국 여성이 도움을 주겠다고 접근해왔다. 언젠가 블로그에서 이탈리아에서 티켓 발권을 도와주고 돈을 요구한다는 글을 봤음에도, 정작 상황이 닥치면 아무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러고 보니 예전 독일 쾰른의 맥도날드에서도 다른 누군가의 질문에 고심하며 답하는 사이 캐리어를 소매치기당할 뻔한 기억도 있다. 아내가 재빨리 눈치채지 않았다면 우린 가방째로 도둑맞을뻔했다. 여성의 도움을 받아 발권하던 중, 다시 정신을 부여잡고 정중하게 사양하고선 자리를 옮겼다. 반대편으로 가 직접 발권을 완료했다.
하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고, 그냥 그분께 도움받고, 작은 도움을 주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가져보기도 했다. 굳이 이렇게 빡빡하게, 또는 타인을 경계하며 살아야만 할까. 또 내 안에 있는 낯선 이를 향한 막연한 두려움들을 어찌해야 하나. 여러모로 참 어렵다.
그동안 로마에서 공항으로 이동할 때면 항상 버스를 이용했다. 테르미니역에서 공항버스를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편하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엔 마음을 크게 먹었다. 무려 인당 14유로짜리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세현이가 기차를 타고 싶다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짐을 버스에 다 싣고, 유모차를 접고 펴고 하는 과정이 엄두가 안 났다. 비싼 만큼 기차 내부는 너무 쾌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모차를 접지 않고 그대로 탈 수 있어서 좋았다. 역시 돈 들인 만큼 여행이 편해질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또 확인한 셈이다.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아이들 덕분에 빠른 체크인도 가능했다. 이탈리아에서 유아 동반 승객에게 이런 멋진 배려라니.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 유아 동반 승객에 대한 배려는 거의 없다고 느끼던 중이다. 그만큼 색다른 경험이었다. 공항 직원의 배려인지, 항공사 직원의 배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에겐 너무나도 감사한 일. 체크인을 완료하고 탑승 구역으로 들어갔다. 비행기 출발까지 2시간 남짓. 아이들 화장실도 들리고, 저녁으로 빵과 커피 등을 사 먹고 나니 어느덧 탑승 시간이 되어버렸다.
아뿔싸, 비행기에 타기 전 온이를 미리 재울 시간을 계산하지 못했다. 타기 전에 재우지 않으면, 비행기에 들어가서는 영 재우기가 힘들다. 결국, 실력 좋은 아내가 급히 온이 재우기 작업에 돌입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실패. 거의 잠들뻔했는데….
더 큰 문제는 비행기 탑승 후 이륙까지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간혹 유럽에서 저가 항공을 이용하다 보니 종종 이런 상황을 만난다. 가격이 저렴하기에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지만, 그래도 비행기 연착은 언제나 힘들다. 우리는 부엘링 항공을 이용했는데, 기내 방송이 스페인어로만 나와 연착 사유를 알 수 없었기에 더 답답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대기하는 동안 세현이를 협박(?) - 눈 뜨면 꿀밤 맞는다고 - 해서 재울 수 있었다. 협박이 아니라 폭력인가? 하지만, 온이가 문제였다. 특유의 장난기가 발동한다. 거의 다 도착할 즈음 온이도 겨우 잠들었지만, 내리면서 세현이가 잠에서 깼다. 그리고 온이도 잠에서 깼다.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했다. 취리히 공항에 내려 수화물이 나오길 기다리던 중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한 엄마와 (세현이 정도 되는) 아들 둘이 어딘가를 다녀오는 길인가 보다. 늦은 시간이라 아이가 잠이 들었는데, 아이 엄마가 아이를 커다란 캐리어 위에 허리가 꺾인 채로 눕혀 놓았다. 저 아이는 저런 자세로도 잘 자는데, 세현이는 재우기 너무 힘들다며 아내에게 웃으며 하소연했다. 그리고 세현이 어렸을 때 잠을 재우기 위해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던 우리 모습이 떠오르며, 그 스위스 엄마의 쿨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이 너무 재밌어 사진을 남기고 싶었지만,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세상에 어디 소중하지 않은 자식이 있겠는가. 어떤 부모는 자식에게 지나친 관심과 보호를 주려 하고, 어떤 부모는 의도적으로 과도한 보호를 스스로 제한하려고 한다. 그리고 어떤 부모는 무관심이 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다양한 양육 방식이 있고, 정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아이에게 상황에 맞게 해야 하겠지.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보니 그게 뭔지 알기는 참 어렵다. 정말 어렵다.
그렇지만 아이를 보호하거나 보살피려고 하는 부모의 과도한 욕심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봐도 어떤 아이는 부모의 관심이 부담스럽고, 어떤 학생은 부모의 무관심에 힘들어한다. 자녀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지독한 무관심.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 양쪽 모두를 좋지 않게 바라봤던 시절이 있다. 그리고 아이 둘의 부모가 된 지금, 그 둘 사이 어디 즈음에서 적당한 선을 지킨다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교사인 내가 알게 모르게 흉보았던 부모들 모습이 꼭 부모인 내 모습 같아서 부끄럽다.
하여튼 스위스 취리히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탈리아에 비해 선선한 날씨, 깔끔한 공항과 거리 풍경이 인상적이다. 숙소도 공항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어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숙소는 편리한 셀프 체크인 정책을 제공하고 있었다. 가지고 있던 주소와 지도가 일치하지 않아 열쇠함을 찾는데 조금 고생하기는 했다. 주변을 몇 바퀴를 돌아야 했다. 그래도 집에 들어와 짐을 풀고 침대에 누우니 불평이 사그라든다.
스위스 물가는 상당히 비싸다. 그동안 인터라켄이나 루체른, 베른에 가보았지만, 취리히는 처음이다. 숙소를 찾다 보니 가격대가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어렵사리 감당할 수 있는 예산 범위 내 적당한 호텔을 찾았다. 시설은 깔끔한 편이었지만 역시나 에어컨이 없어서 다소 덥고 답답했다. 어쩔 수 없이 창문을 열어보지만, 이번엔 모기가 걱정이다. 모기향도 없는데. 하지만 시간이 늦어져서 더 깊이 고민할 힘이 없었다. 급하게 스마트폰 모기 퇴치 어플을 다운로드하였다. 적당히 아이들을 씻기고, 가족 모두 내일을 기약하며 어렵사리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