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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180731 Rome

by 장영진
2018 유럽791.jpg 따사로운 햇살, 로마 숙소에서 빨래 (2018.7. 이탈리아 로마)


로마에서의 첫 아침, 8시가 조금 넘어 잠에서 깼다.

아침 햇살이 좋았다. 어젯밤 널어놓은 빨래가 놓인 테라스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여름 더위. 땀. 아이들과의 장시간 여행. 언제, 어떻게든 세탁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탁기가 있고, 빨래를 널 공간이 있는 집이 필요했다. 게다가 넓고 시설도 다 갖춰져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따스한 오전 햇살이 비추는 창문을 마주하며 커피 한잔 마실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웠다. 우리에게 주어진 로마 일정이 겨우 2박뿐이라 마음이 급했다.

아침을 차렸다. 주방 시설이 좋아 요리하기에 편리했다. 아침 메뉴는 카레, 복숭아, 계란 프라이. 여행을 다니며 차려 먹을 수 있는 메뉴가 한정적이어서 질릴 법도 하지만, 때론 간소한 식사가 좋은 법. 아이들 또한 잘 먹어줘서 큰 문제없이 로마에서의 첫 일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세현이는 유럽으로 떠나 오기 전부터 로마, 로마 노래를 불렀다. 언제부터일까. 이 녀석이 이탈리아 삼색 국기를 보고 로마라 부르고, 로마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부모가 일부러 가르쳐주지도 보여주지도 않았던 거 같은데. 아이들이 어떤 대상에 관심과 흥미를 보이고, 좋아하게 되는 '그 무언가'는 언제나 부모 예상 밖의 모습과 의미를 담고 있는 거 같다.

사실 우리 부부는 이탈리아보다 크로아티아에 가고 싶었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차를 빌려 스플릿, 플라체비체를 거쳐 자그레브까지. 하지만 운전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고, 세현이의 의견도 존중해서 우리는 이탈리아와 스위스 쪽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여행 계획을 세우며 짧은 로마 일정 속 세현이에게 어떤 로마의 모습을 보여주면 좋을지 고민했다. 결국, 부모의 버킷리스트인 콜로세움(사실은 콜로세움 뒷 편의 레스토랑)과 세현이가 좋아할 만한 트레비 분수에 방문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의 로마 첫째 날 일정은 콜로세움에서 점심 식사, 숙소에 돌아와 낮잠과 저녁 식사 후 밤에 트레비 분수에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더운 날씨에 대비해 짐은 최소한으로 챙기기로 다짐했다.

이전에 로마에 와서 가장 놀랐던 것 중 하나는 도시 규모가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웬만한 관광지는 도보로 다닐 만한 거리에 있어서 로마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대학생 시절 친형과 왔을 때도 로마 시내를 종일 걸었다. 이때는 젊은 패기에 며칠을 그렇게 다녀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 후 아내와 왔을 때도 지친 줄 모르고 로마 시내를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이때는 밤늦게 호텔에 와서 씻지도 못하고 뻗어버렸다. 20대와 30대의 차이인 것일까? 어찌 되었건 늘 로마에 올 때면, "이만큼이나 걸었어"라는 자신감과 뿌듯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그 뿌듯함을 욕심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민도 하지 않고, 유모차를 이끌고 집을 나서 곧장 파라미데역으로 갔다. 그리고 난생처음 로마의 24시간 교통권을 샀다. 로마 지하철 시설은 그리 좋지는 않다. 아이들과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방문한 도시가 유아 동반 여행에 얼마나 친화적인지 아닌지가 부모의 관심사가 되었다. 유모차를 끌고 다니기에 길(도보로 올라가는 턱 등)은 편하게 되어있는지, 지하철역에 유아 휴게실이나 수유실 등이 잘 갖춰져 있는지 등등.

지금까지 가장 잘 되어있는 도시를 꼽으라면 타이완 타이베이나 가오슝, 또는 일본의 여러 도시를 꼽을 수 있다. 서울의 경우 지하철을 이용할 때 엘리베이터 이용이 그다지 편리하게 되어있진 않는듯싶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유모차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야 할 때도 있다. 길에서 유모차를 끌고 다닐 때도 곧잘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유럽 도시에 비교하면 서울도 양반. 울퉁불퉁한 돌길. 아이들 화장실도 돈을 내야 할 경우가 대부분. 대부분의 유럽 도시들이 그렇듯 로마도 유아 동반 여행에 친화적이진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콜로세움에 금세 도착했다. 역시 바깥은 더웠다. 오기 전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서 검색했다. 어떤 의상을 입고 어떤 구도로 찍어야 사진이 멋질까 감을 잡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더운 날씨 탓에 아이들이 사진 찍을 상태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인근 식당으로 향했다.

콜로세움 인근 ‘루찌’라는 이름의 레스토랑. 여기 오기 위해 4년 반을 기다렸다. 2014년 콜로세움에 방문했던 아내와 나는, 골목을 기웃거리다 손님들로 붐비는 식당을 발견했다. 당시 식당에 대한 정보는 가진 게 없었지만, 그나마 익숙한 이탈리아 음식에 대한 신뢰, 손님 많은 식당은 괜찮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이 식당을 선택했었다.

첫 방문 때는 스테이크와 뽀모도로 스파게티를 시켜서 먹었는데, 주변 테이블을 둘러보니 많은 손님이 봉골레 파스타를 먹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먹어보지 못한 것이 억울해서, 바로 다음 날 다시 방문했다. 그리고 경험한 봉골레. 이 식당의 봉골레는 반드시 2인분을 주문해야 먹을 수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봉골레 파스타보다는 면도 굵고 약간 매콤한 맛이 가미되어 있다. 조금 특이했지만, 인기 있는 이유를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추억 때문에, 이곳에 다시 오기까지 4년이란 세월이 걸린 것이다. 여행 중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접하게 되면, 다시 그 도시를 방문할 이유가 생긴다. 향수를 자극하는 몇몇 특별한 식당이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부부에게 있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날씨와 음식인 거 같다.

감사하게도 식당에 자리 여유가 있었다. 우리는 자리에 앉자마자 애초에 계획한 봉골레 2인분과 스테이크 주문했다. 내부에 에어컨은 없었지만, 덥진 않았다. 오랜 시간 그리워한 음식을 다시 만난 상황에 감사했다. 그리고 현이 온이도 음식을 잘 먹어서 나름 편안하게 식사하고 나올 수 있었다. 물론 아내와 둘이서 편하게 시간을 보낸, 4년 전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2018 유럽793.jpg 로마 콜로세움 앞에서 인증샷 (2018.7. 이탈리아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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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만에 다시 맛본 봉골레 파스타 (2018.7. 이탈리아 로마)



점심 식사 후 시원한 곳에서 낮잠을 자기 위해 숙소로 돌아왔다. 구글 지도를 검색하니 콜로세움 부근에서 피라미드 역까지 오는 트램이 있었다. 하지만 정류장에 가보니 공사 중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노선이 없어진 것인지, 트램은 없고 버스가 있었다. 다행히 버스를 타고 집까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2시경 집에 들어오자마자 에어컨 틀고 아이들 재울 준비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조금 피곤했을까? 금방 잠이 들었다. 덕분에 아내와 나도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대략 한 시간 남짓 자고 일어나서 휴식을 취했다.

아침에 아내와 아이들이 3시간 동안 낮잠을 잤으면 좋겠다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아이들이 6시가 다 돼서 일어났다. 집이 너무 시원하고 편해서였을까. 4시간이나 낮잠을 잔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피곤했을지 안쓰럽기도 하면서. 그래도 한번 길게 자고 일어나서인지, 둘 다 컨디션이 괜찮아 보여서 감사하기도 했다.

아이들 자는 동안 열심히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된장국과 오삼불고기. 아내와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를 방문했을 때 오징어를 사서 요리를 해 먹은 적이 있다. 당시 숙소 옆 작은 슈퍼마켓에서 오징어를 샀는데, 그때 아내가 닭고기와 오징어를 함께 넣고 해준 정체불명의 요리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정말 맛있었다. 그 이후 아내에게 다시 해달라고 몇 번을 졸라도, 자신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단다. 결국, 우리는 재료가 좋았던 것으로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마트에서 비슷하게 생긴(링 형태의) 냉동 오징어를 사 왔다. 재료는 거의 비슷했다. 요리를 완성할 즈음 아이들을 깨웠다. 푹 자고 일어난 아이들과 오래간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비록 크로아티아의 추억만큼은 아니었지만, 훌륭한 만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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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산 재료로 만든 오삼 불고기 (2018.7. 이탈리아 로마) / 만족스런 집 안에서 시원한 수박 한 조각 (2018.7. 이탈리아 로마)



배불리 식사를 마쳤다. 아이들이 오랫동안 낮잠을 자 준 덕분에, 밤 일정에 부담이 없어졌다. 식사 정리를 마치고, 저녁 7시 반경 트레비 분수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해가 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고 아이들이 낮잠을 잘 잤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해가 긴 것은 여름 여행만의 분명한 특권이다. 해가 진 유럽 도시에서 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이어서, 해가 길면 그만큼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

아, 그런 데, 어둠이 늦게 찾아와 곤란한 경험도 있다. 2014년 파리에서 나와 아내, 그리고 앞에 말한 친구와 차를 빌렸다. 몽생미셸에 가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아침에 출발해 시간을 보내다 저녁 즈음 야경을 구경하고 돌아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당시 9시가 넘어도 어둠이 찾아오질 않아 매우 곤혹스러웠다. 만약 우리끼리였다면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올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 여행 카페를 통해 동행을 한 명 데려간 상황이었다. 결국, 우리는 밤 10시가 넘어서 몽생미셸 수도원을 출발할 수 있었고, 파리에 돌아오니 새벽 3시가 다 되어버렸다. 그곳에 가려면 꼭 1박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물론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해가 짧은 것보단 긴 게 무조건 좋다.

숙소 앞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젤라토를 사 들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맛난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까지는 아주 좋았다. 하지만 트레비 분수까지 가는 길이 만만친 않았다.


2018 유럽824.jpg 아이스크림 들고 트레비로 향하는 길 (2018.7. 이탈리아 로마)



우리는 먼저 내일 공항까지 가는 루트를 확인하기 위해 인근의 Roma Ostiense역에 들렀다. 해당 역에서 공항까지 바로 가는 기차 편이 없다고 확인한 후, 그곳에서 트레비로 향하는 버스를 타려고 했다. 역 앞 버스 정류장이 여러 곳 있었는데, 그만 반대로 가는 버스에 탑승해버렸다. 버스를 타고 가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우리는 그 즉시 버스에서 내렸다. 결국, 반대로 향하는 버스를 갈아타고 겨우겨우 트레비까지 갈 수 있었다.

버스를 잘못 탄 것이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도착할 무렵 로마 시내에 어두움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려 트레비까지 걷는 동안 어느덧 밤이 되었다. 트레비 주변엔 역시나 많은 인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도저히 유모차를 끌고 분수 앞까지 갈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또, 악명 높은 이탈리아 소매치기가 우려되기도 했다. 결국, 우린 입구 부근에 잠시 유모차를 세워놓고 자리를 잡았다. 아쉽지만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여유를 가지고 동전을 던지며 시간을 보낼 분위기는 아니었다. 경찰들은 곳곳에서 질서유지를 위해 휘슬을 불고 있었고, 사람들은 조금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분주했다.

로마에서 다른 곳은 못 가더라도 트레비에는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로마에 볼거리가 너무 많다. 하지만 아이들이 보고 듣는 것보다, 직접 무언가를 행동으로 할 수 있다면 기억에 더 남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더욱이 여행을 시작하며 세현이 할머니와 함께 공항으로 오는 길. 할머니는 로마에 너무 가고 싶다는 세현이 작은 손에 트레비 분수에서 던질 동전을 몇 개 쥐여주셨다.

트레비 분수와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들. 사람들이 동전을 던지는 손길 각각의 의미와 해석. 아이들이 동전을 던지며 무슨 마음을 품었을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들이 이곳에 와서 동전을 던져보았다는 기억은 계속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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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비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우리는 급하게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을 찾아 걸었다. 밤이 늦었지만, 더위는 여전하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이 작은 가게에서 파는 슬러시를 사서 나눠 먹었다. 낮잠을 잘 자고 일어난 아이들은 피곤한 기색이 없다. 더운 로마에서 오늘 하루 일정을 잘 버텨내어 어찌나 감사한 일인지. 우리 가족은 잠시 숙소 근처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가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로마에서의 첫날.

우리 부부에게, 그리고 세현 세온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하루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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