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802 Zürich
드디어 취리히에서 첫날 아침을 맞이한다.
전날 늦게 들어와 자는 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9시가 넘어 모두 기상했다. 여느 때처럼 온이가 가장 먼저 일어났다. 오늘 아침 식사 메뉴는 멸치 육수로 만든 국수이다. 간편하게 만들 수 있고, 가족 모두 면을 좋아하기에 우리의 히든 아이템이다. 하지만 국물의 양을 조절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그리고 면을 그대로 넣고 삶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국수가 너무 짰다. 감사하게도 아이들은 잘 먹는다. 간이 세서 그런가? 하지만 우리는 거의 먹지 못했다. 스위스 먹는 물가가 비싼데 아침부터 걱정이다.
준비하다 보니 오늘도 시간이 늦어졌다. 오늘 일정은 취리히 중앙역 인근 방문하기. 다른 계획은 없었다. 스위스에 올 때마다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오게 된다. 왠지 그런 이미지가 있다. 그냥 풍경만 봐도 아름다워서일까. 마치 휴양지에 온 것처럼 쉬어야 한다는 느낌. 우리는 편하게 다니기 위해 24시간 교통티켓을 사기로 했다.
취리히에는 기차나 트램 등 교통수단이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정말 편리하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Swiss Star Franklin란 이름의 호텔이다. 위치는 중앙역 북쪽에 있는 Oerlikon역 인근이었는데, 트램이나 기차를 이용하면 중앙역까지 5~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에어컨만 있었다면 정말 완벽했을 것이다.
우리는 티켓을 산 후 기차를 타고 취리히 중앙역으로 이동했다. 중앙역에 도착하니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다. 스위스에서는 늘 식사가 고민이다. 비싼 물가에 예산은 한정되어 있고, 그렇다고 스위스 로컬 음식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우리는 한참을 고민하며 길을 걷다 Rice up이라는 식당을 발견했다.
구글 지도에서 검색하니 이 식당은 아시안 퓨전 요리를 제공한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실제 메뉴는 여러 가지 비빔밥 형태였다. 우리에게 딱 알맞은 식당이었다. 아이들에게 밥을 충분히 제공해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단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됐다. 가격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 우리는 곧장 식당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소고기, 미트볼, 두부 베이스의 비빔밥을 주문했다. 꽤 인기가 있는 곳인지 내부는 사람들로 붐빈다. 우리나라의 비빔밥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잘 먹는다. 어른 입맛에도 나름 괜찮았다. 취리히에서 약 40 스위스 프랑(현재 환율 47,000원)의 예산으로 이 정도 수준의 밥을 먹을 수 있단 사실에 우리 부부는 매우 만족해했다. 물론 한국에서 이 음식을 이 가격에 판다면, 장사를 계속하기 쉽진 않겠지만 말이다.
식사를 마치자 어느덧 아이들 낮잠 시간이다. 오늘은 숙소에 들어가 낮잠을 재우기로 했다. 아이들도 그렇지만 부모에게도 낮잠이 필요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중앙역 인근의 한인 마트 ‘유미하나’에 들러 쌀과 김치를 샀다. 마트는 지하와 1층에 걸쳐 꽤 큰 규모를 갖추고 있어, 웬만한 물건을 다 구할 수 있을 법했다.
계산하던 중 주인아주머니께서 질문하셨다. 이렇게 더운데 왜 하필 스위스에 여행을 왔냐고.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다, “한국도 엄청 덥다던데요?”라며 웃으며 길을 나섰다. 실제로 스위스도 더웠지만, 한국의 무더위에 대한 소식을 이미 알고 있던 터라 오히려 지금 이곳에 와 있는 것이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우리나라는 괜찮은 걸까? 여름 무더위에 봄가을 미세먼지. 겨울의 추위. 어린 시절 아름다운 사계절이 우리의 자랑거리라고 보고 배웠는데, 어느덧 우리가 살아갈 삶의 터전이 우리 모두를 위협하고 있다. 미래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환경은 더 그렇겠지. 지금, 우리는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대로 괜찮은가? 해결은 할 수 있는 것일까?
트램을 타고 숙소로 복귀했다. 낮잠을 위해 숙소로 들어왔지만, 문제는 더위였다. 아무리 상대적으로 스위스 날씨가 시원하더라도, 에어컨이 없는 호텔 방 안은 너무 더웠다. 하지만 다시 어딘가를 이동하기에도 우린 너무 지쳤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힘들게 아이들을 재우고, 아내와 함께 잠깐의 낮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오후 5시 즈음 세현이, 그리고 세온이가 차례로 잠에서 깼다. 아이들이 잠에서 깨자마자 더위도 피하고 저녁 식사 재료를 살 겸 인근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숙소 인근에 Coop Supermarkt이란 이름의 커다란 마트가 있다. 기대한 대로 마트 안은 무척 시원했다. 우리는 지하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다양한 요리 재료를 샀다. 대략 한화 4만 원 정도의 금액. (다른 도시와 비교하면 여전히 비싸지만) 이곳 식당에서 먹는 금액과 비교하면 많이 저렴하다. 우리가 차려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비록 한정적이라 할지라도, 스위스에선 해 먹는 것이 우리 여행 스타일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곤, 식당에 가 비싼 음식을 시켜 먹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겐 어려운 일이다.
장을 보고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차려 먹었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밥, 감잣국, 멸치, 김, 된장 참치. 사실 저녁이라 하기엔 영 부실한 것이 사실이다. 부모야 뭘 먹어도 상관없지만, 아이들에게 조금 미안한 것도 사실이다. 세현이는 마트에서 사 온 지렁이 젤리와 함께 잘 먹었고, 온이는 잘 먹지 못했다. 아마 유럽에 와서 이것저것 간이 센 음식을 많이 먹다 보니, 싱거운 국이 입맛에 잘 맞지 않는 눈치다.
식사를 마치니 저녁 7시가 되었다. 시간이 조금 늦었지만, 같이 낮잠을 잘 자고 일어났기에 자신감을 갖고 길을 나섰다. 로마 야경 투어 이후, 해 질 무렵 돌아다니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취리히 라마트 강과 호수가 만나는 부근의 Kunsthaus Zürich역으로 이동했다.
노을을 어렴풋이 머금은 호수의 풍경. 백조(사실 백조인지 오리인지 아니면 다른 종의 생물인지 확실친 않다. 세현이는 백조라고 믿었고, 우리 가족 모두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를 보고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습. 여행의 피로와 힘듦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호수와 라마트 강변을 따라 중앙역까지의 산책길은 우리에게 취리히의 매력을 마음껏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정말 아름다운 도시다. 해는 서서히 지고 있고, 한적하지만 고풍스럽고 매력적인 도시의 경관. 아이들 손을 잡고 걸어오는 내내 아내와 취리히에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며 걸었다. 비싼 물가만 아니라면 정말 삶의 어느 순간에 잠시라도 살아보고 싶은 도시다.
감탄을 거듭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중앙역에 도착했다. 역 앞 coop 마트에 들러 아이들 간식과 물 등을 사고, 숙소로 향하는 기차에 탑승했다. 호텔 방에 들어와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저녁을 먹고 급하게 나서는 바람에 뒷정리가 아직이다. 아내가 아이들을 씻기는 동안, 나는 저녁 식사 후 남겨진 설거지를 마무리했다. 이미 해는 졌지만, 방 안은 여전히 더웠다.
모든 일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사진을 정리하려고 하는데,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카메라 한 대의 셔터 버튼이 안 보이는 것이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부딪힌 것도 아니었다. 시간을 보니 분명 저녁 시간 사진까지는 있었는데, 아마도 그 이후 걷는 도중에 셔터가 빠진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 작은 카메라는 아내가 매고 있었는데, 분명 견고하게 잘 매고 있었는데. 참 당황스럽고 억울한 일이었다.
문득 신혼여행 때 당시 카메라를 아내가 떨어뜨려 렌즈가 박살 났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 신혼여행에서 대놓고 화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화를 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건 아내의 말도 들어봐야 할 듯싶다), 마음이 상해 꿍해 있었던 기억이 있다. 새벽에 일어나 그 렌즈를 고쳐 보겠다고 책상에 앉아 골몰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아내는 여전히 날 놀린다. 정작 고장은 본인이 내놓고 말이다.
이번엔 박살이 난 건 아니니, 사라진 셔터 버튼이라도 찾아야 했다. 돌아왔던 길을 다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시간도 늦었겠다 돌아오는 길엔 아이들도 재우면 좋지 않은가. 길을 복기하며 찾아보았지만, 밤 중에 그 작은 셔터 버튼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되면 작은 카메라는 사용할 수 없다. 카메라가 두 대여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린 다시 호텔로 향했다. 하지만 아이들 재우는 일은 실패. 결국, 다시 방에 들어와 네 가족 모두 느지막이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이번 여행 중 다른 도시들은 모두 아내와 내가 가본 곳이었지만, 유일하게 취리히만 처음 와본 도시였다. 사실 아이들을 데리고 낯선 도시를 방문하는 일이 조금은 부담스러운 측면도 있었다. 워낙 부부 모두 가본 곳을 또 가는 성향인 것도 그렇고, 새로운 장소는 늘 여행자에게 긴장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스위스 취리히에서 우리 부부는 편안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언젠가 책에서 스위스 라마트 강변을 산책하며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때 글을 읽으면서는 작가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직접 그 길을 걸으니 확실히 알 것 같다. 중앙역에서 호수까지 걸어가는 길. 아마 우리 부부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부디 아이들도 오늘의 그 여유를 기억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