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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뮌스터

20180722 Bonn Münster

by 장영진

유럽에서 첫날 아침을 맞이했다.

더 어렸을 땐 안 그랬는데, 언제부터인가 유럽으로 여행을 오면 첫 며칠은 시차 때문에 잠에서 일찍 깬다. 예전엔 잠을 좀 못 자도 버틸 수 있었고, 여행하는 데에 큰 불편함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하루만 잠을 적게 자도 버티기 버겁다. 두 아들 녀석은 아직 젊으니까 괜찮으려나.

어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본까지 이동하고, 호텔에 도착해 한국시각으로 새벽 2시가 넘어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도 이른 새벽, 잠에서 깨버렸다. 그나마 지난 여행 경험을 통해 예상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일찍 일어난 아이들에게 화를 냈을지 모를 일이다.

인생에서 시차 적응이 뭔지 처음 경험했던 때는 2014년 1월 이탈리아 여행 때였다. 아내와 나는 오전 비행기로 인천에서 출발해, 저녁 즈음 밀라노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잠에서 깼다. 그리고 다음 일정인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너무 일찍 일어난 나머지, 새벽에 야경을 구경하러 다녔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 유럽여행에서 시차 적응으로 고민하고 있다면, 옷을 챙겨 입고 새벽 야경(?)을 구경하러 밖으로 나가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해가 늦게 뜨는 겨울에야 가능할 일일지도 모르겠다. 새벽에 나가면 야경으로 유명한 명소를, 홀로 구경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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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유럽여행의 첫 숙소, Hotel Europa Bonn (2018.7. 독일 본)


아침 6시 아이들을 준비시켜 호텔 밖으로 나왔다. 바깥 햇살은 화창했지만, 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차가운 공기에 걱정한 나머지 한여름 그 누구도 하지 않는 보낭커버까지 유모차에 장착한 후 길을 나섰다. 우리 부부는 "역시 유럽은 여름에도 덥지 않구나"라고 속으로 흐뭇해하며, 앞으로 쾌적한 여행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이 믿음은 더위에 대한 공포심으로 곧 바뀌게 된다.)

유럽에서의 첫 목적지는 REWE이다. 지난 4년간 이곳을 그리워했다. 물론 꼭두새벽부터 특별히 살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작 물이나 아이들 음료 정도? 하지만 REWE는 아내와 나에게 소중한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장소이기에 의미가 있다. 2014년 독일에 넘어와 생활하면서, 정말 매일같이 REWE에 갔다. 마실 물도 사야 하고, 반찬거리도 사야 하고, 물병 반납까지. 이곳은 우리 부부의 독일에서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장소라 할 수 있다.

문제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열지 않았다는 사실. 어쩔 수 없이 음료와 물을 살 겸 조금 걷기로 했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한적한 거리를 걸으니 너무 좋다. 하지만 문을 연 상점을 찾기 힘들었다. 도시 중심부 광장을 거쳐 역에 이르기까지 길을 헤맸다. 온이는 자꾸 유모차에서 내려달라고 떼를 쓴다.

본 중앙역에 4년 만에 왔다. 4년 전 뮌스터에서 지낼 당시 본에 온 적이 있다. 물론 다른 도시를 가는 길에 반나절 정도 들른 기억 정도이다. 본 시내와 대학을 구경하고, 대학 후문의 맛있는 일식집에서 식사한 기억이 남아있다. 사실 어제 바로 뮌스터까지 갈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도 잠시 본에 들러 쉬어가기로 했다. 4년 전 이 작은 도시에서의 반나절 기억이 좋았기 때문이다.

독일 여행을 조금 해본 사람이라면 소도시를 다녀보라고 이야기한다. 독일에 중소도시를 오면 프랑크푸르트나 뮌헨, 베를린 등 대도시와는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뮌스터도 그렇고, 본, 드레스덴, 뉘른베르크 등. 기억에 남는 장소가 많다. 본이란 도시에 대해 우리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거리를 걷고 있으면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대학가를 좋아해서일까?


2018 유럽073.jpg 우리 부부의 소중한 추억, REWE 와 dm (2018.7. 독일 본)



여행 즈음 둘째 아들 온이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 부모나 형 도움 없이 혼자서는 힘든 수준. 여행 내내 걸음마가 서툰 온이를 챙기느라 상당히 번거롭기도 했다. 혹시 아이와의 여행을 생각하고 있다면, 상대적으로 아이를 더 통제하기 쉬울 때, 즉 걸음마 이전에 가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인적이 드문 시내를 어슬렁거리다 중앙역 근처 BackWerk에서 커피와 음료를 샀다. 아이들에게 카프리썬 음료를 사주고, 우리는 본 대학 방면으로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어느덧 호텔 조식 가능 시간이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인지 배가 고팠다. 호텔로 복귀했다.


2018 유럽078.jpg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온이 도와주기 (2018.7. 독일 본)



호텔에 들어오니 아침 8시 30분. 로비 옆 식당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Hotel Europa는 최신 시설을 갖춘 호텔도 아니고, 규모가 크지도 않다. 고풍스럽고, 아늑한 느낌을 선사하는 딱 독일의 작은 호텔 같았다. 덕분에 우리가 유럽에 와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조식도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체크아웃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간단하게 조식을 먹고 방에 올라와서 짐 정리를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우유를 주고, 나는 짐 정리를, 아내는 아이들이 점심으로 먹을 유부초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들고 온 캐리어 내부엔 온갖 음식 재료로 가득 차 있다. 여행을 떠나며 음식 재료를 준비하게 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식비 절약, 익숙한 음식에 대한 향수 등. 물론 유럽 웬만한 도시에 한인 슈퍼마켓이나 아시아 식료품점이 있기에 현지 조달도 어렵지 않다. 가격은 좀 비쌀지라도 얼마든지 우리 식재료를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여행을 떠날 때 항상 무언가 준비한다. 경제적 이유와 마음의 안정을 위해. 짐이 늘어날 걸 알면서도, 다음부턴 줄여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늘 그대로이다. 그러니 두 손 무겁게 들고 온 재료는, 하루빨리 처리하는데 정답. 첫날 점심부터 재료를 소진할 겸 유부초밥을 준비하기로 했다.



2018 유럽108.jpg 유럽에서 맛보는 엄마표 유부초밥 (2018.7. 독일 본)



오전 11시경 체크아웃을 하면서 카운터에 짐을 맡긴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아침보다는 부쩍 더워진 날씨. 그래도 아직 무더위까진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새벽 일찍 일어난 아이들을 재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유모차를 끌고 시내 이곳저곳을 방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아들이 잠 들 무렵, 시내 중심부에 있는 스타벅스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사회에서 스타벅스는 낯선(?) 미국 문화의 상징이다. 그러나 유럽에서 만나는 스타벅스는 내게 마치 우리 집에 온 것과 같은 착각이 들게끔 만든다. 유럽보단 미국 문화에 더 익숙해서일까. 아니면 그만큼 스타벅스가 우리에게 일상이 되어버린 것일까. 우리 동네 스타벅스에서 맡을 수 있었던 커피의 향을 이곳에서도 똑같이 느낄 수 있고, 유럽에서 찾기 힘든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청량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잠이 든 천사 같은 모습의 아이들을 옆에 두고, 마치 2014년 봄 독일에서의 여느 한 날 같이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만끽했다.

아이들이 많이 피곤했었나 보다. 잠에서 깰 기미가 안 보인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충분히 여유를 즐기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목표는 본 대학 방문하기. 우리는 아직 아직 자는 아이들을 끌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날이 너무 좋았고, 아이들도 마침 자고 있어서, 마음은 평온했고 한껏 여유로웠다.

조식으로 빵만 먹어서 그런지 배가 고팠다. 우리는 햄버거 가게에 들러 직접 만든 버거를 하나 주문했다. 간단히 요기하면서 걸어가는 사이 아이들이 잠에서 깼다. 지나가는 길에 놀이터가 보였다. 아들들이 관심을 보이는 눈치다. 우리는 잠시 놀다 가기로 했다.

참 신기하다. 놀이터는 어디를 가도 비슷한 모양새다. 우리 부부가 스타벅스에서 느꼈던 그 감정을, 놀이터를 마주한 아이들도 느꼈을까? 아이들은 이곳이 마치 우리 집 앞 놀이터인 양, 너무 신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 온이 걸음마가 아직은 불안해서, 우리 부부의 시선이 늘 향해 있었어야 한다는 사실만 제외하곤,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2018 유럽137.jpg 익숙한 놀이터의 풍경 (2018.7. 독일 본)
2018 유럽146.jpg 나는 형아, 혼자서도 잘해요 (2018.7. 독일 본)



다시 길을 나섰다. 뮌스터로 향하는 기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라인 강가 산책로를 따라 다시 호텔로 향했다. 도중에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아이들에게 유부초밥을 주었지만, 그리 잘 먹지는 않았다. 아들들 밥을 먹이겠다는 수고한 엄마의 마음을 몰라주는 녀석들. 결국, 시내로 들어와 피자 가게에서 피자를 한 조각 산 후 나누어 먹었다. 세현이 녀석은 웬일인지, 밥보다 빵, 피자와 파스타를 더 좋아한다. 유럽 체질인가 보다. 다행히 간단하게나마 배를 채울 수 있었다.

호텔에 도착해 짐을 찾아 바로 역으로 향했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뮌스터로 향하는 15시 46분 기차를 타기 위해 플랫폼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게 웬일. 우리가 탑승할 기차가 50분 연착되었다고 전광판에 나오고 있었다.

철도 강국 독일. 고등학교 독일어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 독일 ICE를 탄 이야기(물을 가득 담은 유리컵을 세워놔도 물이 넘치지 않는다는)를 들은 기억이 있다. 때문에 내 기억 속에서 독일 기차는 완벽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4년 전 독일에서 기차가 연착된 상황을 처음 겪었을 당시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이내 불편한 감정으로 발전했었다. 4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기차 연착을 마주하며 느끼는 내 감정의 불편함에 반해, 독일 현지인들은 기차 연착을 그저 삶의 일부라고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4년 전 기차 연착을 겪고 나서 인터넷을 통해 독일에서는 기차 연착 상황이 빈번하기에, 그 보상 또한 확실하다는 글을 본 기억이 있다. 보상이 확실해서일까. 아니면 그냥 그들의 단편적인 모습만을 보고 판단한 나의 선입견과 편견 때문인가? 아니면 삶과 시간을 소비하는 마음가짐과 자세가 다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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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첫 기차, 연착이라니 (2018.7. 독일 본) / 오지 않는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2018.7. 독일 본)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인가 보다. 조금, 아니 꽤 많이 불편했다. 물론 삶과 시간을 대하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데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나도 그런 여유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냥 내 감정에 솔직할 필요도, 권리도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이들과의 여행에서 기차나 비행기의 연착은 모두를 지치게 한다. 이후 여행 중 연착은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한참을 기다려 본 출발 시각보다 1시간 20분이 지난 17:00경 기차는 출발했다. 덕분에 19:00가 다 되어서야 뮌스터에 도착했고,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숙소에 들어와야만 했다. 다행히 호텔 위치가 뮌스터 중앙역 바로 뒤편이라서, 역 안 슈퍼에서 물 등을 구매해 호텔로 들어올 수 있었다.

힘들었지만 무사히 도착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감정의 불편함을 느끼는 상황은, 역설적으로 감사하다고 말할 기회가 되기도 한다. 삶의 매 순간이 불편한 것만은 아니니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숨 쉬고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때로는 감사한 일이니까. 불편함과 감사함은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 주위를 함께 맴돌고 있다고 느낀다. 삶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불편함을 만날 때마다, 그 이후의 감사함까지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싶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무엇보다도, 그 먼 길을 돌고 돌아 뮌스터에 도착할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그것도 아내, 아이들까지 함께.

우리는 그렇게 뮌스터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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