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23 Münster
4년 만에 뮌스터에 왔다.
우리가 그리워하던 도시의 풍경은 기억 속 모습과 사뭇 달랐다.
뮌스터 중앙역 Münster Hauptbahnhof
2014년 유럽에서 살아보겠노라고 무작정 한국을 떠나 독일에 왔다. 생전 처음 들어본 독일의 어느 소도시에 도착해, 우리에게 방을 빌려준 유학생을 처음 만난 장소. 중앙역은 뮌스터에 대한 우리 기억 속 첫 느낌을 간직한 장소이다.
4년 전, 뮌스터 중앙역의 차분하고 고즈넉한 모습은 이곳이 독일 서부에 있는 한 소도시라는 느낌을 선사했었다. 하지만 2018년 현재 뮌스터 중앙역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공간이 되어있었다. 현대화된 역사는 상당히 쾌적했고, 역 내 많은 상점은 많은 이들에게 편리함을 선사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왜 예전 모습이 그립다고 느껴지는 것일까. 내 기억 속 뮌스터 중앙역은 어디에 있는 걸까? 물론 잠시 스쳐 지나가며 사진이나 남길 여행객들이나 느낄 감정이라고 생각일지 모른다. 이 공간이 삶 그 자체인 이들에게는 어찌 보면 편리함이 더 중요할 수도 있으니. 현대화된 역의 모습을 보며 느낀 아쉬움의 근원은, 그냥 지나간 젊음과 내 소중한 추억을 다시 확인하고 싶은 욕심일까?
사실 변한 건 풍경만이 아니었다. 4년 동안 우리 부부에게도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2014년 우리에겐 돈도, 집도, 직업도, 자식도 없었다. 가진 것이라곤 시간과 젊음, 그리고 여유?
2018년 지금 우리는 나이로는 삼십 대 중반에 들어서고 있고(물론 아직 젊다), 네 살, 그리고 두 살 아들과 가족이 되었다는 현실 속에 있다. 돈은 여전히, 가졌다고 말하기에 민망하지만, 직업은 생겼다. 십 대 후반부터 계속해서 꿈꿔왔던 바로 그 일. 4년 동안 그리워했던 뮌스터 앞에서, 나와 내 옆에 있는 사람, 그리고 도시의 변화를 감지하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때와 지금의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과연 나는 그 시절보다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무엇에 감사하고, 무엇을 불평하는가.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볼 때면, 시간이 참 매정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간은 우리 삶을, 그리고 우리 기억과 추억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내가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무엇을 느끼건. 절대 배려해주지 않는다. 시간은 언제나 냉정하게 그냥 그렇게 흐른다. 중앙역의 모습이 변한 것처럼.
뮌스터는 대학의 도시이다. 더불어 자전거의 도시이기도 하다. 도시 곳곳에 대학 건물이 숨어있다. 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활보하며, 자전거를 타는 이들을 위한 많은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뮌스터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Ring 형태의 숲길과 화려하진 않지만 고풍스러운 여러 건축물은 본과 마찬가지로 한 번쯤 이 도시에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을 자극한다.
4년 전 뮌스터에 두 달 넘게 살면서도, 이 도시를 잘 알았던 것은 아니다. 마치 서울에 살며 서울에 대해 잘 모르듯이. 두 달이란 시간이 짧다면 짧을 수 있지만, 여행이라 생각하면 상당히 긴 시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이 어떤 역사적 가치를 지닌 도시인지, 이 도시에 어떤 공간들이 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뮌스터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것은 유럽 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서 접한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허수경 시인이 쓴 『너 없이 걸었다』라는 책을 발견했다. 우리가 뮌스터를 우연히 만난 것처럼, 이 책 또한 우연히 만난 책이다. 그녀는 젊은 시절 뮌스터에서의 삶과, 도시의 역사, 이곳 거리를 걸으며 보고 느낀 점들을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책의 프롤로그 내용부터 우리의 상황과 딱 들어맞았다. 마치 우리가 이 책을 보고 처음 뮌스터에 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은 “뮌스터, 당신이 모르는 어느 도시”라며 글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는 유럽 지도에서 뮌스터가 대략 어디쯤 위치하는지 설명하고, 그냥 한번 들러보라고 독자들에게 권한다. 특별한 목적이,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들러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 이야기한다.
마치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껏 뮌스터를 두고 내가 어떤 누군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알지 못했던 어떤 곳을,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가보는 것. 때로는 그런 여행도 멋지지 않을까?
책을 읽으며 우리 부부가 걸었던 그 길이 이곳이구나. 이 도시에 이런 역사적인 일들이 있었구나. 그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골목에 붙은 이름의 의미, 늘 오가면서 봤던 교회 첨탑에 담긴 역사. 책을 읽는 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치 다시 뮌스터에 서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얻게 된 그 앎은 우리 추억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우리 부부는 여행 가기 전 도시에 대해 충분히 공부하는 타입은 아니다. 도시 방문 전 그 도시를 충분히 공부하며 여행하는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처럼, 알고 가면 더 많이 보고 온전히 느낄 수 있을 터. 하지만, 적어도 나에겐 그 과정이 참 어렵게 느껴진다. 해보려고 해도 잘 안된다. 결국은 나의 게으름 때문일 테지만. 우리는 그냥 가서 보고 느끼고, 이후 오랫동안 추억하는 정도로 여행을 마친다.
여행 중 가끔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장소에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끔은 계획을 변경하여, 이름조차 몰랐던 낯선 도시를 방문하길 권하고 싶다. 특히 아이들과의 여행에선 더 그렇다. 시시때때로 계획을 변경할 수 있는 유연함이 없으면, 부모만 더 힘들어진다. 미리 그 도시를, 그 장소를 공부하지 않았다면 좀 어떤가. 일단 다녀온 후, 그 이후에 그곳에 대한 정보를 모으며 돌아보는 과정도 매우 즐겁다. 가끔은, ‘듣고 보는 것’보다 ‘보고 듣는 것’이 더 우리 추억을 풍요롭게 만들지도 모른다.
허수경 시인의 말을 빌려, 정말 그냥 한번 이 작은 도시에 들러보라 누군가에게 권해보고 싶다.
6시가 조금 넘어 잠에서 깼다. 우리 네 사람 모두 시차 적응을 못 한 느낌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유모차에 아이들을 태워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뮌스터 거리를 걷고 싶었다. 4년 전 두 다리만 믿고 뮌스터 곳곳을 쉴 새 없이 걸으며 보고 느꼈던 풍경이 그리웠다. 현대화된 중앙역의 모습과는 달리 거리의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느낌이다. 우리는 천천히 역 주변을 살폈다.
한 시간쯤 되었으려나. 슬슬 배가 고파왔다. 우리는 방으로 들어와 가지고 있는 재료들을 활용해 아침을 차려 먹었다. 조식을 제공하는 호텔만 다닐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장기간 여행하는 우리 부부에겐 그것 또한 경제적 부담으로 느껴졌다. 따라서 숙소를 찾을 때 취사가 가능한 곳을 옵션으로 포함해 예약했다. 밥을 차려 먹는 것이 조금 귀찮지만,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남들 눈치 안 보고, 원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어 좋다. 특히 아이들과의 여행에서 먹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지 않는가.
오전 11시경. 본격적인 뮌스터 첫날 일정 시작한다. 뮌스터 중심부에 나가고 싶었다. 여행 중 매일 구체적인 시간 계획을 세운다면 좋겠지만, 아이들과의 여행에선 계획을 세우기도, 계획대로 시간을 보내기도 참 어렵다. 계획을 세워봐도, 그것이 부모의 욕심이었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될 뿐이다. 우리는 여행 초반이니, 뮌스터에선 특별한 계획 없이 지내기로 약속했다.
먼저 뮌스터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시청과 대성당 방면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벽같이 일어난 아이들은 자기 시작했다.
거리 주변 풍경이 우리의 향수를 자극했다. 가장 먼저 본에서 못 들른 REWE로 향했다. 이 상점엔 특유의 향이 있다. 굳이 말하자면 입구 근처에서 판매하는 빵과 여러 음식 재료들 향이 섞인 냄새이다. 분명 좋은 향이라고 이야기하긴 어려운 모호한 냄새이다. 하지만 상점에 들어가는 순간 2014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대상, 장소 또는 상황을 냄새로 기억한다. 내겐 이곳 독일의 REWE가 그렇고, 중학교 때 갔던 일본 하카타역에서 풍기던 빵 굽는 냄새가 그랬다. 기억 속에 각인된 냄새를 맡을 때면 그 장소와 그 상황, 그때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냄새는 개인의 추억을 자극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어서 TK Maxx로 향했다. 참 흥미로운 상점이다. 뮌스터에도 있을 정도면, 웬만한 규모의 독일 도시에 매장이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어제 본에서도 들르고 싶었지만, 일요일이라 영업을 하지 않아 아쉬웠다. 4년 전 우리에게 방을 빌려준 유학생이 소개해줘 이 매장을 알게 되었고, 방문할 때마다 좋은 물건을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게 만든다. 마침 아이들도 자고 있기에, 편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날은 점점 더워지고 있었고, 아이들을 시원하게 재울 수 있었다는 점 또한 감사했다. 상점 안 느낌은 우리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1층의 가방이나 잡화, 여성 액세서리, 2층의 의류까지 구경거리가 아주 많다.
기내용 캐리어를 하나 사기로 했다. 인천공항에서 상자에 담았던 물품을 다시 캐리어에 옮겨 담기는 했지만, 들고 온 가방에 넣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새로 살 캐리어도 기왕이면 큰 게 좋겠지만, 화물용을 사면 저가항공을 이용할 때마다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 캐리어 비용보다 수화물 추가 비용이 더 들지도 모른다. 돈 아끼기를 즐기는(?) 우리 부부는 기내용을 사기로 결정했다.
그러고 보니 2014년에도 TK Maxx에서 캐리어를 샀었다. 당시에도 가방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때 산 캐리어는 우리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상징적인 물건이어서, 지금까지도 고장 날까 노심초사 소중하게 다루는 중. 지금 사서 계속 들고 다닐 수는 없기에, 우리는 어떤 제품을 살지 결정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인근 식당 Hotdog Station으로 향했다. 4년 전, 길을 걷다 줄을 선 현지인들을 따라 무심코 들른 곳이다. 우연히 한번 먹고 그 맛에 반해 뮌스터에 있는 동안 즐겨 찾던 바로 그곳. 이후 핫도그 만드는 비법을 배워와 한국에서 장사해도 좋겠다는 농담까지 할 정도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가게 안에 자리가 없다. 주문 후 핫도그를 받아 길에서 먹어야 한다. 가게 앞엔 핫도그 먹는 이들로 북새통이다. 그럼 어떤가, 저렴한 가격에 이 정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만 있다면야. 우리는 그 시절 그 맛을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메뉴판을 보고, 그때와 똑같이 캘리포니아 핫도그와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 세현이가 먼저 잠에서 깨고, 곧 온이도 일어났다. 아이들 없이 편하게 먹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녀석들도 핫도그를 맛보고 싶었을까, 아니면 조금 더웠으려나? 생각보다 일찍 잠에서 깬 아이들 비위를 맞추느라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하긴 어려웠지만, 두 손 가득한 핫도그와 튀긴 감자는 그간의 기대만큼이나 우리 입을 즐겁게 해 주었다. 하지만 핫도그 하나로 네 명이 먹으려니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다시 올 수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벌써 점심시간이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점심을 먹을지 정하질 못했다. 급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구글맵을 검색하고, 근처 dean&david란 이름의 식당으로 향했다. 핫도그를 먹은 후라 간단한 식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온이를 위한 밥도 있으니 우리에겐 안성맞춤. 식당에서 판매하는 음식은 커리와 샐러드 종류였다. 우리는 하나씩 주문한 후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한 카레 맛과 조금 달랐다. 나쁜 맛은 아니었지만, 조금 특이한 향이 있어서인지 아이들은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되면 남은 음식을 부모가 다 먹는 사태가 벌어진다. 나름 아이들을 생각해서 정한 식당이고 메뉴였는데. 아이들이 조금 피곤해서 입맛이 없는 건가 싶었다. 우리는 급하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한번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식당을 나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들어와 아이들을 재우려 했는데, 두 아들 녀석은 도통 잘 생각이 없어 보인다. 사실 방 안이 잘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아침에 방이 시원해지라고 방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나왔다. 하지만 시원해지기는커녕, 뜨거운 태양이 방안을 그대로 내리쬐어서 완전히 찜통이 되어있었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재웠다간 큰일 나겠다 싶어, 간단히 씻고 다시 길을 나섰다.
다시 뮌스터 중심부에 가서 상점들을 구경하기로 했다. 뮌스터 중앙역에서 도시 중심부인 시청과 대성당 부근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가 소요된다. 유모차를 끌고 가느라 대략 2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4년 전 나와 아내가 지낸 기숙사는 여기서 또 30분을 더 걸어가야 하는 곳이다. 우리는 매일 같이 이 먼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주로 다니던 길의 풍경이 여전히 눈에 밟힌다. 우리 부부가 뮌스터에서 하고 싶은 일은 바로 이 거리의 작은 상점 하나하나, 그 속에서 예전 추억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별다른 계획이 없으니, 그냥 흘러가는 대로 시간을 보내도 돼서 참 좋았다. 마치 2014년 그때처럼.
시내에 나와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Rossmann 상점도 구경하고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저녁 식사는 숙소에 들어와 먹기로 했다. 시청 앞을 거쳐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날이 더웠는지 둘째 아들이 짜증을 부리기 시작한다. 뮌스터 시내 중심 길바닥에 눌러앉은 둘째 아들. 이런 상황은 부모로서도 감당하기 쉽지 않다. 사실 아이들과의 여행 내내 이런 상황은 반복된다. 아직 의사소통이 어려운 돌 갓 지난 아들을 이 먼 곳까지 데려온 우리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작정 드러눕는 아이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다.
들어오는 길에 REWE를 들려서 저녁 식사를 위한 재료를 구매했다. 언젠가 우리나라 예능 프로그램에도 나온 적 있지만, 독일 마트의 공산품, 식료품 물가는 상당히 저렴하다. 물, 고기나 우유, 달걀, 채소 등의 물가는 확실히 우리나라보다 싸다. 문제는 우리가 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제한적이라는 사실. 달걀과 돼지고기를 조금 샀다. 저렴한 가격에 품질도 훌륭하다. 숙소에 들어와 한국에서 들고 온 재료들과 아주 풍성하게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을 씻긴 후 아이들을 재웠다. 역시나 피곤했었나 보다. 아이들은 금방 잠이 들었다.
부모도 무언가 더 할 수 있는 에너지는 없었다. 우리는 내일을 위해 일찍 자기로 했다. 뮌스터에서의 첫날 일정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