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726 Paris
파리에서의 첫 아침이 밝았다.
어제 밤늦게 파리에 도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텔을 새로 예약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제야 시차 적응이 된 건지, 아니면 오랜만에 시원하게 잠을 자서인지, 가족 모두 늦은 시간 잠에서 깼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사실 별다른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파리 첫날 오전 일정은 호텔에서 보내기로 작정했다. 사실 에어컨이 나오는 호텔에서 조금 더 여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컸는지도 모르겠다.
에어컨을 켠 채로 잠을 잤더니, 아침엔 바람이 조금 차게 느껴졌다. 아이들 겉옷을 입혀 로비로 내려왔다. 근처에 식당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우리는 호텔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그동안 경험한 파리 호텔 조식 가격은 만만치 않았다. 5년 전 신혼여행을 제외하고는 가격 부담에 조식을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곳 조식 가격은 나쁘지 않았다. 마침 아이들은 무료. 가족이 모처럼 여유 있는 아침 식사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차려진 음식의 종류가 아주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간단한 빵과 커피. 몇몇 과일들. 아이들과 배를 채우기엔 충분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 로비에서 아이들과 잠시 시간을 보냈다. 전반적으로 호텔 이용객이 그리 많지는 않아서 한적했다. 호텔 체크아웃 마감은 12시. 우리는 시간을 꽉 채우고 파리 시내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방으로 다시 올라왔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사이, 부모는 파리 첫날 일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하루하루의 세부 일정을 미리 생각하고 계획하는 여행 스타일이 아니다. 여행 중 그 날 필요한 대로, 또는 기분 내키는 대로 어디를 갈지 결정한다. 호텔을 떠나 파리 시내로 들어가, 원래 예약된 호텔까지 갈 시간을 계산하니 어딜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고민 끝에 무리하지 않고 호텔 인근 장난감 가게(토이저러스)에 방문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더위를 피할 수 있고, 아이들과 시간 보내기엔 최고의 공간이므로.
12시가 다 되어 체크아웃을 완료했다. 우리는 곧장 호텔 셔틀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파리 드골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공항 리무진 버스, 시내버스, 택시, 기차(RER) 등등. 나와 아내는 항상 기차를 이용했었다. 버스보단, 이미 정해져 있는 선로와 역을 지나는 기차에 더 안정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이번에는 351번 시내버스를 선택했다. 351번 버스가 호텔 인근 Place de la Nation까지 가기 때문이었다. 기차를 이용하려면 파리 시내를 삥 돌아야 했다. 문제는 351번 버스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이전까진 시내로 나가는 시내버스가 있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급하게 몇몇 블로그를 통해 정보를 모았고, Gare 2 terminal에서 버스를 타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2 터미널에 무사히 도착하여 옥외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기 시작했는데,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금세 직감할 수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 351번 버스는 오지 않았다. 아니, 중간에 버스가 오긴 왔다. 내리는 사람은 있지만 탈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버스 기사들은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351번 버스를 탈 수 있는 것인지 알 수도 없었고, 마냥 더운 옥외 정류장에서 한 시간 넘는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 점점 햇볕은 뜨거워지고, 아이들도 지치기 시작한다. 기다리다 지쳐 주변 영어가 가능한 사람들이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수소문 끝에 Nation 역까지 가는 351번 버스를 타려면 3 터미널로 이동하여 갈아타야 한다는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짐을 들고 부랴부랴 3 터미널로 이동했다. 마침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바로 탑승할 수 있었다. 웬 버스를 이용하겠다고, 아침부터 너무 진을 뺐다. 아내와 나는 오후 일정 전부 취소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목적지까지는 거의 40~50분, 꽤 먼 거리였다. 다행히 아이들은 버스에 타서야 잠이 들었다.
힘들게 버스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제 곧 호텔로 들어간다는 희망을 품은 채 버스에서 내리는 도중, 우리 여행을 위협할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유모차 바퀴가 버스와 도보 틈에 껴버린 것이다. 그 순간 빠진 바퀴를 빠르게 수거해 왔어야 했는데, 꼭 이럴 때면 생각이 멈춘다. 버스가 지나간 후 찾으면 된다고 철석같이 믿어버렸다. 잠시 후 버스는 출발했고, 유모차의 작은 바퀴는 버스의 커다란 바퀴에 눌려 찌그러져 버렸다. 이 정도면 고쳐서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순간 우리 부부의 머릿속은 백지가 되었다. 멀리 여행을 떠나온 지 5일째. 앞으로 2주가 넘는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당황스러움 이후 찾아온 감정은 짜증이었다. 아직 호텔에 가기 위해선 트램을 갈아타고 또 걸어야 한다. 고장이 난 유모차, 걷기 힘들어하는 아이들. 크고 작은 캐리어 둘. 배낭과 손가방들. 이걸 어찌 다 이끌고 호텔까지 간단 말인가. 짜증 난다고 지금 여기서 여행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힘들게, 정말 힘들게 호텔에 도착했다. 우리가 예약한 곳은 세주르 & 어페어호텔이란 이름의 호텔이었다. 방 안은 기대 이상으로 깔끔했지만, 역시나 에어컨은 없었다. 뮌스터에서 에어컨 없는 생활의 어려움을 절실히 경험했던바, 앞으로 4일간의 시간이 걱정스럽기도 했다. 방에 짐을 대충 넣어놓고, 바로 유모차를 사러 출발했다. 우리 부부는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가능한 한 빨리 문제를 해결하여 고민거리를 없애려고 노력한다. 운명의 장난인지, 오후에 토이저러스를 가려고 계획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저렴하고 쓸만한 유모차를 사면 불편한 마음이 조금은 진정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계획은 잘 세웠다며, 스스로 위안으로 삼았다.
파리를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숙박비용이 만만치 않다. 특히 아이들과의 여행을 위해, 아이들 숙박이 가능하고, 취사가 가능한 방을 찾다 보면 가격대가 계속 올라간다. 3주간의 여행을 계획하면서 숙박비 부담이 있었고, 한정된 예산 안에서 숙소를 찾다 보니 결국 파리 외곽에 있는 숙소를 잡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호텔 바로 앞에 트램 정류장이 있었다. 트램을 이용할 땐 유모차를 폴딩하지 않고 그대로 타고 내릴 수 있어서, 지하철이나 버스보다 더 좋은 점도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유모차가 없다. 공항에서 버스 기다리는 시간도 너무 오래 걸렸고, 목적지까지 버스 운행 시간도 길었다. 덕분에 우리 가족 모두 완전히 지쳐버렸다. 아이들은 계속해서 안아달라고 요구했다. 트램을 내려서 토이저러스까지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혹시 파리가 문제인가?
그러고 보니 우리 부부는 파리에 올 때마다 (안 좋은 의미에서) 많은 일을 겪었다. 신혼여행 땐 지하철 파업으로 귀국행 비행기를 놓쳐 80만 원을 수수료로 내고 다음 날 비행기로 변경해 귀국했더랬다. 다음번 파리에 왔을 때는 아침 늦잠으로 로마행 비행기를 놓쳤다. 덕분에 출발 3시간 전 볼로냐로 향하는 비행기를 아주 비싸게 주고 사서, 다시 기차를 타고 볼로냐에서 로마로 이동했던 경험도 있다. 이런 경험 탓에 매번 다시는 파리에 오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지만, 그 다짐이 무색하게 또 파리에 와 있다.
파리에서 참 많은 일을 겪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유럽까지 와서 유모차 바퀴가 빠지고 고장이 나는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 부부끼리 여행하며 겪은 어려움과는 힘듦의 정도가 달랐다. 아이들을 들쳐 안고, 더운 날씨 속에서 토이저러스로 가면서, 그나마 위안으로 삼은 것은 토이저러스에 다양한 유모차가 종류별로 놓여있고, 우리는 충분히 고민 후 가성비가 뛰어난 유모차를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였다.
어렵사리 토이저러스에 도착했다. 하지만 멀리서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우리가 기대한 대형 유아용품 판매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유모차는 2층에서 판매하고 있는데, 대략 다섯 종류의 유모차만 진열되어 있었다. 우리가 필요한 쌍둥이 유모차는 아예 없다. 그나마 79유로짜리 저렴한 유모차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두 개를 사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구경하는 사이, 정말 많이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결국, 우리는 이곳에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을 내렸다. 내일 다른 유모차 판매점을 찾아보고, 정 없으면 이곳에 다시 와서 사기로 했다.
인근 스포츠용품점에도 유모차는 없었다. 속 타는 부모 마음도 모른 채 두 아들은 신나서 장난감을 구경하고 자전거를 타며 실내를 활보했다. 그래, 이 어린아이들이 부모 마음을 들여다봐 주길 기대하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이지. 부부 사이에도 서로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주고 받아주기 쉽지 않은데.
극도의 스트레스와 더위를 달래보고자 바로 옆 스타벅스로 향했다. 하지만 스타벅스에 웬 사람이 이리 많은지. 스타벅스의 인기는 동서 어디나 비슷한가 보다. 겨우 자리를 잡고, 시원한 아메리카노와 케이크 한 조각을 사서 나누어 먹었다. 번잡한 매장 안에서 겨우 커피 한 잔, 케이크 한 조각만 사서 넷이 나눠 먹는 모습이 조금은 민망했지만,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은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그것도 잠시, 우리는 스타벅스를 나서 다시 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호텔 바로 아래 마트에서 물을 사기 위해 간단히 장을 봤다.
참 길고도 멀리, 그 힘든 시간을 보내고 다시 호텔로 들어왔다. 더위를 먹었는지 밥맛이 영 없다. 저녁을 거를까 생각해보았지만, 아이들과의 여행에선 이 또한 어려운 문제다. 내 감정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 아이들 밥은 먹어야 했기에, 결국 우리는 부지런히 저녁을 준비했다.
저녁 메뉴는 밥, 고기와 양파를 넣은 국. 김과 누룽지. 깻잎. 사실은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차린 저녁이지만, 문득 누룽지와 김. 깻잎을 보고 옛 추억이 떠올랐다. 2014년 아내와의 독일 생활. 그때 우리 식탁은 거의 이런 모습이었지. 아내와의 가장 따뜻했던 시간을 추억하며 저녁을 먹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무엇보다 이 먼 곳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잘 지내고 있지 않은가. 누구 하나 아프지 않고 말이다. 다시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다.
저녁 8시가 넘었다. 저녁을 다 먹고, 지하 세탁기를 이용해 그동안 밀린 빨래도 돌렸다. 더운 여름, 긴 시간 여행을 하다 보니 세탁기가 있느냐 없느냐도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아이들을 재우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도 피곤했었을까, 두 아들 모두 금방 잠이 들었다. 나도 아내도 무척이나 피곤했기에 사실 바로 잠을 청했어야 했지만, 우리에겐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다. 바로 유모차 판매점 검색.
구글 지도에 여러 형태의 검색어를 넣고 폭풍 검색에 돌입했다. 파리에 있는 “유아용품 전문점” “중고 유아 물품 판매점” 여러 곳을 찾아냈다. 몇몇 업체는 홈페이지까지 연결이 되어있어서, 우리는 가격대가 괜찮은 쌍둥이 유모차가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비싼 유모차를 살 용기는 없다. 결국, 가까운 곳 위주로 업체 후보를 선정했고, 내일 아침 찾아가 보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파리에서의 첫 하루. 같은 24시간이지만, 이보다 더 길게 느껴질 수 있을까. 내일은 꼭 유모차 구매에 성공해야지. 기왕 이렇게 된 거, 새 유모차를 타고 매력적인 파리 거리를 걷는 우리 모습을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