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는 오랜만에 골방에 박혔다. 되는대로 방바닥에 누워 걸신들린 듯 잡히는 대로 책을 꺼냈다. 세계문학으로 칸을 한정했는데 그들은 외출을 원했고 지수는 선별하는 재주를 부렸다.
‘조지 오웰은 괜히 시니컬한 표정으로 혼자 심각해 보여.’
지수는 이런 생각이 들면 <1984>를 펼쳐서 아무 데나 읽었다.
‘헤밍웨이는 시대 잘 탄 거품 아니었나. 요즘 같았으면 넷플릭스에 그냥 밀렸지.’
지수는 이런 전지적 평론가적 훈장질이 꿈틀대면 그의 단편선을 꺼내 잡았다.
그러다가도 ‘한국엔 김승옥이 최고였어. 이런 분이 말년에 언어 능력을 잃다니.’
지수는 이런 느끼한 애국심과 슬픔이 양면적으로 차오르면 <무진기행>을 잡아 펼쳤다.
하지만 앞집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부부싸움에 지수의 집중력은 산산이 조각났다.
“이 새끼? 지금 나한테 이 새끼라고 했어?”
아저씨. 제가 아까부터 들었는데 아주머니가 이 새끼라고까진 안 했고 그냥 된소리의 다른 단어는 있었어요.
“그래 했다. 어쩔래. 네가 우리 부모한테 뭘 하긴 했냐?”
아주머니. 제가 아까부터 들었는데 아저씨한테 이 새끼라고까진 안 했다니까요. 왜 흥분해서 하지도 않은 걸 인정해요.
“그럼 너는 우리 부모한테 뭐 했냐? 도대체 뭘 했는데?”
아저씨 그렇게 반박하면 도돌이표 찍잖아요. 아저씨가 생활비 안 줬다면서요. 차라리 아주머니가 얼떨결에 인정해버린 ‘이 새끼’를 더 잡고 물고 늘어지지 그랬어요.
“유치하다. 유치해. 네가 그러니까 그 모양인 거야.”
아주머니 그것 봐요. 부모 욕 들었는데도 ‘이 새끼’라곤 안 하시잖아요. 아저씨가 반박할 수 없게 주기로 한 생활비 같은 돈 문제를 더 파고드셨어야죠.
이 여름에 문 다 열고 고성방가 싸우는데 어찌 더 무엇을 읽겠나. 이런 생각에 지수는 코로나19 때문에 야구장 축구장 극장도 못 가는데 관람료라도 지불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이상한 생각마저 품었다.
잠잠해질 때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라고 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첫 문장이 지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요즘 스타일로 바꾸면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돈 문제를 안고 있다’ 정도가 되겠다고 지수는 고쳤다.
이를테면 치솟는 집값에 전세 대금은 천정부지 로켓을 쏘아대고 경제 기본 원리라는 수요와 공급은 어떻게 작동하나 들여다보고 있자니 이론은 이론이고 현실은 현실인 분리된 이상 말이다.
그러니 누군가 우리를 지켜준다거나 계층 이동 사다리가 있다는 희망 따윈 버리고 그럭저럭 호흡하는 과제만 덩그러니 남는다고 지수는 단언했다. 이 장엄한 과제 앞에서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명제를 잊고 산 지 오래고 남들도 영원불멸인 것처럼 아등바등하고 있으니 지수는 또 속아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주식 창을 열어 뒤채이고 부동산 정책 기사를 읽고 나니 지수에게 남는 것은 예년과 별다를 것 없는 여름의 시작뿐이었다. 연도만 달리하여 나오는 별다를 것 없는 여름 속에서 지수의 시간도 흘러 죽어갔다. 앞집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그래서 뭐 내가 돈 못 버는 게 내 죄냐. 세상이 그렇잖아. 세상이.”
아저씨 세상이 그렇다고 해도 돈 많은 사람들은 최소한 돈 걱정은 안 하던데요. 다른 문제는 있겠죠. 고민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하니까.
“그런 세상 잘 살게 해 준다고 네가 그랬잖아. 사기 치는 거야 지금.”
아주머니 사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아세요. 그게 사기라면 이 세상에 사기꾼 아닌 남자 드물어요. 그리고 요즘 같은 시대엔 어수룩하게 사기 치다간 되레 역풍 맞고 쇠고랑 차요.
지수는 창문을 닫아버렸다. 저 부부의 이전보다 가라앉은 말투를 보아 분노 상승 추세는 꼭짓점을 찍은 뒤 꺾여 내려오기 일보직전이었다. 결론 빤한 싸움은 몇 시간 뒤면 그저 그런 화해로 엉킬 게 분명했다.
이것은 착 가라앉는 침착 모드에 앞서 분노가 최고점을 통과한 뒤 내려오는 일종의 ‘분노 매도 포지션’으로 이른바 ‘데드 크로스’ 타이밍이었다.
때마침 지수의 휴대폰에선 “주문이 체결됐습니다”라고 외치는 알림이 계속됐다. 지수는 엊그제 대부업체에서 빌린 돈으로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일념 아래 또다시 주식 초단타 매매에 뛰어들었다. 골든 크로스에 재빨리 매수하고 데드 크로스에 재빨리 매도하는 것이 지수의 이번 도전 목표였다.
그것은 예전과 별다를 것 없는 지수의 멈추지 않는 삶을 위한 7막 7장 ‘도전 골든벨’ 출사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