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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Apr 10. 2022

(단편소설) 동굴

그 '동굴'에 들어가기 시작한 건 이사 첫날밤이었다. 자다 깬 어둠 속에서였다. 따지고 보면 둘째 날 새벽이 정확한 표현이다.


이삿짐 아저씨가 말했을 때였다. 아저씨는 엄마에게 "이쪽에 두면 될까요?"라며 내 책상을 만졌다. 그러면서 작은방 구석을 가리켰다. 나는 방문 뒤에 있는 붙박이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엄마가 "네, 한쪽 구석에 일단 붙여주세요"라고 대답하는 게 등 뒤로 들렸다. 저쪽 어디 거실 쯤에서 대충 답하는 목소리였다. 그때 나는 붙박이장 안쪽 구석에 달린 또 다른 문고리를 발견했다. 그 쇠고리는 시골 할머니네 다락방에 있는 것처럼 둥글었다. 둥근 고리 모양에 내 손목을 걸어 팔뚝까지 넣었다 뺐다 장난질을 쳤다. 그러다 팔뚝을 내 쪽으로 당겨봤는데 문고리는 요지부동이었다. 열리지도 않는 문고리 따위가 뭔가 싶어 밀어도 봤는데 일이 터지고 말았다. 때마침 '끼익'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밀렸다.


"얼른 책부터 책상에 올려야지. 얼굴 처박고 장난질을 치고 있네, 요놈이."


문고리의 움직임을 확인하려는 순간 아빠가 내 엉덩이를 발로 툭 찼다. 이삿짐 아저씨와 함께 무거운 짐들을 옮겨서 아빠의 얼굴엔 땀이 흥건했다. 아빠가 입은 소매 없는 흰색 셔츠도 흠뻑 젖어있었다. 해가 생떼를 쓰고 있는 것 같은 7월 중순의 더위였다. 그 더위는 급히 이사해야만 하는 우리 집 살림을 그렇게 옮겼다. 아빠의 셔츠와 얼굴은 그 폭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며칠 전 일이 겹쳤다.


"포장 이사하면 100만 원은 족히 더 들어"라고 엄마가 계산기를 두들기던 날이었다. 아빠는 갑자기 거실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며 알통 자랑을 하다가 배시시 웃었다. 계산기를 보며 이마를 찌푸리던 엄마의 얼굴은 아빠를 보자 실없이 웃으며 풀렸다. 아빠가 문고리 장난에 한창이던 날 불렀을 때, 난 엄마의 실없던 그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떠한 긴박감도 느꼈다. 그날 '아빠, 여기 문이 열려'라고 하지 못한 게 후회됐다. 아마도 그것은 말속에 미처 구겨 넣지 못한 내 시답잖은 방어 본능 같은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작은 거실과 방 두 개가 있는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서울 변두리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였다. 엄마 말을 옮기자면 '작고 아담할 수밖에 없는 아파트'였다. 아빠 말을 떠올리자면 '서민 냄새가 물씬 풍기는 우리와 잘 어울리는 아파트'였다.


우리 세 가족은 원래 전셋집을 전전했다. 계약이 끝나면 근처로 이사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주인아주머니의 통보가 우리 가족 이사의 발단이 됐다. 아주머니는 큰아들 결혼을 시킨다며 집을 빨리 빼 달라고 했다. 새로 도배도 하고 꾸밀 시간이 필요하다고 엄마한테 말했다. 재계약은 없으니 빨리 나가 주는 게 좋겠다는 표현이었다. 내 추측으론 자존심 센 엄마가 아주머니 앞에선 웃고 돌아왔을 것이다. 그날 엄마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여편네, 나도 재계약할 생각은 없었어"라며 냉수를 들이켰다. 그리곤 일주일 만에 이 아파트를 덜컥 사고 말았다.


엄마의 충동구매를 부채질한 것은 아빠의 치기였다. 늘 엄마한테 '깨갱'하며 지고 살던 아빠는 "적금 깨. 까짓것 대출 한 번 받아서 우리도 집 사자"라고 오랜만에 큰소리 한 번 쳤다. 온종일 냉수가 속에서 용솟음쳤을 엄마는 "당신, 투 잡 뛸 각오 해"하면서 다음날 곧장 은행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해서 60% 정도 대출금을 받고 통장을 탈탈 털어 산 게 아담한 이 아파트였다. "은행한테 이름 빌려줬으니 각오 단단히 해야 해"라던 엄마의 말에선 어떤 결기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엄마의 결의는 아파트 잔금을 치른 날 잠깐 풀렸다. 그날 밤 엄마는 펑펑 울었다. 결혼 이십 년이 넘어 내가 스무 살이 되니까 처음으로 집을 장만하게 됐다며 아빠와 거실에서 마른안주에 소주잔을 기울였다. 엄마는 아빠와 아파트 들어간 첫날에 꼭 베란다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자고 손가락 걸고 약속했다. 결과적으로 엄마와 아빠의 그 약속은 이삿짐 노동에 파묻혀 곯아떨어지면서 다음날로 밀렸다.


내가 아빠의 발끝 때문에 놓친 문고리를 다시 손에 쥔 건 새벽녘이었다. 예민한 성격인 나는 잠자리가 바뀌면 깊게 자지 못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건너가 작당 모의를 위한 확인부터 했다. 엄마와 아빠가 꿈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있는지 살핀 나는 내방으로 살금살금 돌아가 얼마간 창밖을 들여다봤다. 전월세를 전전하던 시절에서 이 여름날 갑작스레 집을 갖는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부동산 아저씨를 닦달해서 "생각보다 싸게 나온 물건이에요"라며 이 집을 봤을 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그 전을 생각해보자. 결혼해서 자식을 키우다 아파트를 산다는 건 그렇게 기쁜 일일까? 이런 종류의 상념을 하다가 나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때 '아차!'하는 생각과 함께 아빠의 엉덩이 차기 때문에 잊었던 신기한 문고리를 다시 잡았다. 방바닥부터 천정까지 나 있는 커다란 붙박이장을 열었다. 안에 대충 정리해 넣은 옷가지와 옷걸이에 걸린 두툼한 옷들을 치워야 오른쪽 바닥 아래 부근에서 겨우 문고리가 보였다. 이 완벽하게 은폐 엄폐가 가능한 문고리에서 묘한 어릴 적 동심이 싹텄다. 동화에서나 봤을 법한 비밀의 물건을 찾은 것 같은 마음에 가슴 한쪽이 설렜다.


"끼익."


예상보다 큰 소리에 나는 놀랐다. 이 소리가 엄마와 아빠의 '꿈속 삼겹살' 회동을 깰까 봐 깜짝 놀랐다. 둘이 소주잔을 짠하고 맞부딪혀서 홀짝 하려는데 급제동을 걸까 봐 걱정했다. 다행히 붙박이장 앞에서 엉거주춤 서 있는 내게 안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야심한 새벽에 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심상치 않다고 확신했다. 그때부터 동심 이상의 묘한 감정이입이 일었다. 문고리를 밀자 생각보다 큰 면적이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문고리 외에는 그 어떤 경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했던 틈이 금세 눈앞에서 정체를 드러냈다.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면적이 펼쳐졌다. 사각형의 그 공간은 공포감마저 몰고 왔다. '들어가 볼까? 뭐가 있을까? 아니, 그전에 엄마 아빠한테 말해볼까? 아니다, 손을 먼저 넣어보자.'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는 동안 오히려 알 수 없는 무서움이 더욱 밀려왔다. 내가 저쪽으로 문고리를 밀어낸 면적만큼 불안감이 몰려오는 듯했다. '겁쟁이야. 아니야, 누구라도 쉽게 들어갈 수 없을 거야' 따위의 감정적 대치 상태가 좌우로 흔들렸다. 어릴 적 본 공포영화들이 잠재의식에서 머릿속 중심부로 달려왔다. 끝내 나는 손조차 넣지 못했다. 그렇게 "끼익" 소리를 한 번 더 내며 문을 닫아버렸다. 일요일인 다음 날 아침에도 나는 엄마 아빠에게 문고리 얘기를 하지 못했다.


"사실 할머니 한 분이 오랜 시간 혼자 사시다가 이 집에서 돌아가셨대. 굉장한 부자셨는데 재산 때문에 싸우는 육 남매한테 전부 알아서 나누라고 던져주시고는 이 아파트 하나만 갖고 소박하게 사셨나 봐. 십 년 정도 그렇게 지내셨다고 하더라고. 내가 왜 이렇게 주변보다 시세가 싸냐고 했더니 부동산 김 씨 아저씨가 결국 실토했어. 돌아가셨는데 거의 한 달 가까이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나 봐. 그래서 오랜 기간 차가운 할머니 혼자 오래 있었고 집에 대한 사람들 선입견도 생겼지. 그래도 나쁜 분도 아니셨고 그게 뭔 대수야. 이거 봐 이거. 우리 집에서 아침밥 해 먹으니까 밥맛이 달라. 밥맛이."


아침 밥상에서 엄마가 이렇게 밥알을 굴리며 앞길을 여는데 나는 구태여 내 방에 숨어있는 문고리라는 샛길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괜한 트집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어차피 언제든 무심결에 말해도 된다는 판단을 자의적으로 내렸다. 대낮부터 새벽의 의심스러운 얘기를 꺼내기도 어려웠다.


"엄마, 그래서 어젯밤에 삼겹살은 맛있었어?"


샛길을 만드는 대신 길을 더 확장해주고 싶었다.


"어머, 맞다. 그 약속해놓고 잠도 못 잤네. 이 양반은 그거 또 까먹고 있지, 아주?"


"무슨 소리야. 내가 어제 꿈에서 당신 엄청나게 먹어대는 걸 봤는데. 그렇게 실컷 먹고는 오늘도 먹자고 해서 이따 장 보러 가면 꼭 사자고 하려고 했어."


엄마에게 져주면서도 이기는 아빠의 응축된 기술이 막 발휘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도 꿈에서 엄마 혼자 2인분 먹는 거 다 봤어. 소주도 어찌나 먹던지."


내가 하나 마나 한 지원사격을 했다. 하지만 엄마는 이미 식탁 위에 있는 메모지에 '삼겹살'이라고 적고 있었다.


그날 밤 오랜만에 배에 기름칠한 나는 밤에 다시 문고리와 만났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 문고리와 밤에 만난 두 번째 날이었다. 또다시 엄마 아빠의 꿈나라를 확인한 나는 "끼익" 소리를 최대한 작게 내려 노력했다. 문을 열었더니 안은 다시 깊은 통로를 내보였다. '아, 오늘은 기필코 작은 접촉이라도 해보리라'하는 전투적 소명감이 막 발휘되면서 '설마 쥐가 나오겠어?'하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단어까지 튀어나왔다. 오른팔을 쭉 뻗어 안으로 밀었다. 괜한 느낌인지는 모르겠으나 방과는 다른 찬 공기가 팔을 감쌌다. 시원한 느낌이 공포감 때문인지 진짜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는 생각할 여력조차 없었다. 내 용기에 스스로 감탄하기에도 바빴다. 스무 살이 되고 어른이 되는 것은 이렇게 미지의 세계에 혼자 팔 하나를 내던질 수 있을 정도로 용기가 생기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내 비록 지금은 재수생 신분이지만 용기는 어느 대학생 못지않으리'라고 결의에 차 팔을 더욱 깊게 밀었다. 오른쪽 뺨이 거의 문틈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내밀었다. 드디어 나는 저 미지의 세계와 접촉했다. 무언가 딱딱한 게 손에 잡혔다. 그리 크지는 않았다. 다섯 손가락을 오므려 잡아봤다. 완벽하게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웠다. 그러나 순간 '이거 쥐가 물고 온 어떤 기분 나쁜 존재의 변사체나 그런 거 아니야?'하는 생각이 머리를 강타했다. 하지만 나는 스무 살이었다. 스무 살은 재수생이든 대학생이든 용기가 저절로 생기는 시기라고 암시를 걸었다. 게다가 나는 그중에서도 어느 명문대생 못지않은 자신감과 용기가 있는 존재라고 갑자기 가슴을 쭉 내밀어 위로했다. 그리곤 오므린 오른손에 힘을 줘 그 물체를 기어코 밖으로 잡아냈다.


"티릭."


큰 지우개만 한 직육면체를 마주한 순간 안방으로 튀어가려는 충동을 참았다. 이게 정말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가 하는 고민을 얼마간 했다. 결과는 그게 맞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내가 집어내 붙박이장 앞에 둔 것은 금괴가 확실했다. 묵직한 느낌에 처음 만져보는 금에서 나는 '금덩어리'란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도 분명 금괴가 확실했다. "금값이 오르면서 금테크가 다시 환영받고 있다"던 저녁 뉴스 진행자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내 오므렸던 오른 손가락들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쥐나 변사체 따위의 것들은 벌써 잊은 채 오른팔을 단거리 선수처럼 다시 열린 문고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번엔 모든 걸 쓸어버리겠단 생각으로 오른손을 상하좌우로 마구 휘둘렀다. 그러나 내 기대와 달리 손에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일단은 금괴를 잠금장치가 있는 책상 서랍 안에 넣었다.


간밤에 일은 아침 밥상 앞에서도 생생했다. 난 입안에서 밥알을 굴리며 집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똑같은 날이었다. 하지만 금괴가 내 책상에 들어있으며 그 출처조차 말하지 못한 곳이라는 점이 평소와 달랐다. 평상시의 일들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어쩐지 자꾸만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새로움만큼이나 내 눈은 더욱 잔잔히 흘러갔다.


엄마와 아빠는 우리 가족이 유난히 좋아하는 재첩국을 앞에 놓고 출근 준비에 분주했다. 넥타를 고쳐 매던 아빠는 오른손으론 수저를 들었다. 왼손으론 연신 식탁 옆에 있는 거울을 주시하며 머리 모양을 매만졌다. 대기업 하청 업체를 다니다가 일명 '구조조정' 덫을 피하지 못한 아빠는 우여곡절 끝에 3년 전 중소기업 관리직에 입사했다. IT 기업이라 출근 복장이 자유로웠지만 아빠는 늘 예전처럼 넥타이에 반듯한 정장 차림으로 다녔다.


"사람 하는 일에는 성격 차이가 없어. 사람만 차이가 있는 거지. 아빤 적어도 단정한 옷차림에서 정갈한 정신이 나온다고 믿고 산다. 우리 시대는 이게 맞아."


아빠의 말은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직장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정수기 업체에서 일하는 엄마는 "쪼들린다. 쪼들려"라는 말을 달고 살았지만 표정까지 그렇진 않았다. 엄마는 아빠와 같이 일찍 출근해 오후 3~4시면 집에 들어와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엄마는 가끔 "내가 안 하면 이 집 남자들 다 바퀴벌레 소굴에서 굶어 죽어"라고 말했다.


엄마는 내가 대학 수학능력 시험을 망친 뒤 재수를 결정했을 때 "어차피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부족하긴 마찬가지야. 그게 경제적 상황이든 사람 마음의 여유든 다 똑같아. 풍족함에서 오는 한가함까지는 모르더라도 순간순간 웃음까진 잃지 말자"라고 내 책상에 쪽지를 붙여놨던 적이 있다. 삶을 대하는 이러한 엄마 아빠의 궤적과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지극한 일상이 나는 더없이 피부에 닿았다. 그러다 보면 '그깟 금덩어리가 뭐라고'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잠들기 전 스마트폰 인터넷 검색창에 써봤던 '금 시세'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러면 곧장 마음이 이러쿵저러쿵 좌우로 요동쳤다.


"우리 우현이 재수학원 진짜 안 가도 되겠어? 오늘부터 이사 왔으니 맘 잡고 한 번 집에서 해봐 그럼. 엄마가 일찍 들어와도 네가 말했던 저녁 6시까지는 살금살금 걸어 다닐게. 심지어 밥 먹으란 소리도 방에서 나오기 전엔 안 할게. 나중에라도 필요하면 학원이나 독서실 얘기하고."


세 식구가 비운 아침밥공기를 싱크대에 넣으며 엄마가 말했다. 나는 새 아파트 이사를 기점으로 집에서 재수 공부에 돌입하기로 했다. 사실 재수 학원 종합반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난 스무 살이었다. 집안 형편을 모른 체하고 엄마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긴 싫었다. "엄마, 진짜 괜찮아"라고 했지만 정말 한 줌의 미련도 없었던 건 아니다. 거짓말이었다. 어쩌면 재수학원 종합반 정도는 무리 없는 지출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덜컥 아파트까지 샀으니 얼마간은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고 싶었다.


"그래도 우현이 공부 잘했으니까 아빠는 네가 어떤 방식으로 공부하든지 걱정 안 해. 언제든 돈 걱정하지 말고 학원 가고 싶으면 다시 말해줬으면 좋겠어. 오늘부터 다시 추스르고."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나가며 아빠는 나지막이 말했다. 재수 학원 등록을 놓고 워낙 치열하게 토론했던 적이 있는데 아빠는 아직도 그게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아빠가 나간 뒤 엄마가 "식탁에 3만 원 뒀으니까 점심 먹고 산다던 책 사. 뭐 있으면 바로바로 전화하고"라며 집을 떠나 생존을 위한 돈벌이에 나섰다. 혼자 남은 나는 책상에 우두커니 앉았다. 책상 앞에 붙여 놓은 계획표를 보니 앞으로 헤쳐가야 할 재수 생활의 두려움과 막연함이 한 번에 몰려왔다. 하지만 그런 것은 금괴 앞에서 오래가지 않았다. 저녁 6시까지는 절대 컴퓨터를 켜지 않겠단 내 계획표 속 빨간 동그라미 강조 사항을 첫날부터 어겼다. 노트북을 켠 나는 금 시세와 한 돈의 무게 등 전혀 몰랐던 금과 관련된 사항을 검색했다. 금 한 돈이 3.75g이라는 것과 18k와 14k의 값이 꽤 차이가 난다는 걸 알았다. 오르내리는 시세 사이에서 적당한 이익을 취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잘하면 돈이 돈을, 아니 금이 금을 벌어 돈을 가져올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속물적 근성이 이렇게 싹트는구나'라는 생활 체험적 수필을 쓰듯 감탄했다. 그와 동시에 붙박이장을 바라보며 도대체 왜 저기서 금이 나왔을까 하는 의문도 품었다.


재수 첫날 공부는 그럭저럭 흘러갔다. 오후 4시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는데 그 이후 집엔 어떠한 작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엄마가 퇴근했지만 6시까지는 아들의 공부를 방해하지 않겠단 약속을 지킨 것이다. 나는 책상 알람이 6시를 알리자 한창 집중해서 보고 있던 세계사 책을 과감히 덮었다.


우리 가족은 저녁 8시면 식탁에 둘러앉았다. 아빠가 보통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저녁 7시에서 7시 30분이었다. 엄마는 한 번도 저녁 8시가 넘어갔는데 저녁밥을 짓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빠도 정말 불가항력의 회사 일이 아니고서야 저녁을 밖에서 먹는 일은 없었다.


"밥을 같이 먹어야 해. 특히 저녁을 여유 있게 같이 먹고 과일 먹으면서 9시 뉴스 보는 게 최고의 행복 아니겠어?"라고 아빠는 항상 말했다. 조금씩 홀짝이는 음주를 좋아하는 엄마도 "셋밖에 안 되는 식구가 이렇게 둘러앉아서 따뜻한 밥 한 끼 먹는 게 요즘 같은 시대에 얼마나 큰 행복인 줄 아니?"라고 언젠간 내게 되물었다. 이 물음에 대해 희미했던 내 답은 어느 날 다큐멘터리를 보며 선명해졌다. 다큐멘터리 속 무기징역형을 받은 죄수가 "가족과 따뜻한 밥 한 끼 같이 먹고 싶다"라고 했을 때 그 말이 가슴을 찌르며 다가왔다. 안팎에서 보기에 그만큼 엄마와 아빠의 사이는 좋았다. 둘이 꾸려가는 가정 속에 있는 내게는 이러한 단란함이 큰 축복이었다.


그날 밤에도 나의 문고리 밀기는 이어졌다. 모든 불이 다 꺼진 밤에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었다. 거실에 나가 안방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 붙박이장을 열었다. 역시나 머리를 구부리고 꽤 찾아야 했다. 걸어둔 코트 뒤에 가려진 오른쪽 아래를 들여다봐야 문고리가 보였다. 문고리를 밀었다. "끼익"하는 소리가 들렸다. 쥐나 변사체 따위의 공포감은 이미 금괴의 묵직함 뒤에 내던져진 후였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금 시세와 금 테크 관련 정보가 물밀 듯 머릿속 가운데로 밀려왔다. 혹시 어젯밤에 내가 뒤지지 못한 부분이 있을까 싶어 손을 더욱 면밀하게 안에서 휘저었다. 그 순간 "어라?"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오면서 손에 묵직한 게 또 잡혔다. 급히 건져 올렸다. 또 금괴였다. 이번에도 전날 건져 올린 것 못지않게 묵직했다. 도대체 어떻게 저 문고리 안에 금괴가 생길 수 있는가 고민했다. 일단은 손에 또다시 금괴가 들어왔다는 생각에 얼른 금괴를 서랍에 챙겨 넣었다.


다음날 아침밥은 미역국과 오징어무침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생일이 아니어도 이따금 미역국을 잘 끓여 먹었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었다. 엄마와 아빠 모두 보육원에서 자란 아픔을 갖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 모두 꽤 어린 나이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란 듯했다. 정확히 어떤 이유인지는 한 번도 내게 말한 적이 없었다. 엄마 아빠의 어린 시절 부모님에 대한 얘기도 들은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엄마와 아빠가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건 아니었다. 엄마가 초등학교 5학년에 올라갈 무렵에 아빠가 같은 보육원에 맡겨졌다. 아빠한테 들은 바로는 "전에 있던 보육원이 문을 닫게 되면서 아이들 대부분이 엄마가 있던 보육원으로 옮겨졌다"는 게 이유였다. 동갑인 엄마와 아빠는 그때부터 조금씩 친구로 친하게 지냈다. 뛰어다니고 운동하기 좋아하는 엄마와 조용히 글 쓰고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아빠가 가깝게 지낸 건 그 자체로 보육원 사이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일이었다. "사내대장부 같은 내 성격에 유들유들한 네 아빠가 그렇게 매력을 느낀 것"이라고 할 때마다 아빠는 웃으며 끄덕이기만 할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친구가 된 엄마와 아빠는 둘 다 경제적 여건상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그 대신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 직후 작은 회사에 같이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미래를 구상했다. 그리고 그 미래의 결정체가 "우현이"라고 둘은 입버릇처럼 나를 지칭했다. 그런 미래가 "저 밤마다 금괴를 캐고 있어요"라고 허무맹랑한 말을 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도 해봤다. 일단은 확실히 여러 개가 모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곰곰이 생각해도 밤마다 저 깊숙한 곳에서 금괴가 나온다는 걸 믿을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부모라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최소한 금괴가 왜 나오는지 정도는 알아낸 뒤 그것과 함께 금괴를 보여줘야겠다고 스스로 결론 내렸다.


다음 날 시험공부를 시작하고 저녁 6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리자 나는 거실로 나갔다. 엄마는 이삿짐 정리가 아직 덜 된 장롱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게 뭔지 아니?"라고 어떻게 뒤통수에도 눈이 있는지 엄마는 날 불렀다. 가봤더니 엄마는 오래된 사진첩을 보여줬다. 거기엔 내 어릴 적 사진부터 고등학교 입학식 날 엄마 아빠와 나란히 찍은 사진까지 빼곡했다. 엄마 아빠와 야구장에 처음 놀러 가 솜사탕을 들고 찍은 사진을 보면서 앳된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다. 초등학교 입학한 해의 여름이었다. 계곡에서 브이 자를 하고 있는 엄마 사진은 사실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가장 눈에 띄는 사진은 마지막에 있었다. 처음으로 우리 식구가 산 자동차 앞에서 아빠가 차 키를 들고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까지 다 보고 나니 갑자기 난 두통이 밀려왔다.


"엄마,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프지?"라고 물었는데도 엄마는 연신 사진 보는 것에 바빴다. "머리 아프다니까"라고 또 징징거렸는데도 엄마는 추억에 빠졌는지 대꾸가 없었다. 나는 거실로 나가 TV 아래 있는 서랍에서 두통약을 꺼내 먹은 뒤 한참이나 사진첩을 뒤지는 엄마 모습을 봤다. '저게 저렇게 좋은가'라는 생각이 솟구치기도 했다. 그래도 요 며칠 사이에 가장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 모습을 보자니 한편으론 기분이 풀렸다. '조금만 있어 봐요. 내가 저 금괴가 어디에서 오는지부터 확인 좀 할게요. 그럼 엄마는 아마도 아빠랑 부둥켜안고 울 거 같은데'라고 혼잣말을 하고 나니 갑자기 빨리 밤이 됐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에도 어김없이 문고리 밀기가 시작됐다. 거실에서 안방을 주시하다 엄마 아빠가 잠든 것을 확인한 나는 매우 성스런 작업이라 여기며 문고리를 찾았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열었더니 역시나 문고리 안엔 작은 금괴가 있었다. "아 도대체, 왜 한 번에 나오지 않고 하루에 하나씩 나오는 거야. 그리고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냐고." 나는 혼잣말하며 기쁨을 동반한 푸념을 늘어놨다. 아무리 그날의 금괴를 꺼낸 뒤 추가로 문고리 안을 뒤져도 손에 걸리는 게 없었다. 불빛을 비춰 눈으로 쳐다보면 뭔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손전등을 갖다 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끙끙거려봤다. 예상대로 보이는 건 하나도 없었다. '저 문고리 안 구멍을 드릴로 부숴서 안을 도려내야 하나'라는 생각도 해봤다. 그런데 그럴 경우 매일 하나씩 나오는 금괴를 영영 갖지 못할 것이란 불안함이 들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에서 욕심이 모든 걸 망치는 그런 교훈적인 장면도 떠올랐다. 적어도 매우 풍족한 개수의 금괴를 모은 뒤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결론 내렸다. 지금은 엄마와 아빠와 내가 완전히 부자가 될 정도의 금괴를 모으진 못했다고 판단했다. 그날 밤 역시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손에 들어온 금괴를 책상 서랍에 넣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침밥엔 새우 볶음밥이 올라왔다. 일요일 아침이라 엄마가 신경 좀 쓴 메뉴였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아침부터 볶았어. 맛있게 먹어"라는 엄마의 지시가 떨어졌다. 사실 엄마의 지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었다. 아빠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 엄마의 새우 볶음밥이었다. 적당히 기름을 두른 그 균형감과 밖에서 파는 것과는 달리 매우 큼직큼직하게 새우를 잘라 넣은 푸짐함은 어디서도 맛볼 수 없었다. 아빠가 웃으며 "아이고, 휴일이 좋긴 좋아. 새우 볶음밥도 다 먹고"라고 했을 때 이미 나는 세 숟가락 째를 입에 넣고 있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공부 쉬지? 나들이 가기로 했으니까 밥 먹고 얼른 준비해."


우걱우걱 급하게 먹고 있는 아빠를 곁눈질하며 엄마가 나인지 아빠인지 누구한테 하는지 정확하지 않은 지시를 내렸다. 아빠는 대답 없이 밥만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나도 옆에서 새우 볶음밥을 쉼 없이 뜨고 숟가락엔 김치를 얹으며 정신없이 먹었다. 눈물이 날 정도의 행복한 맛이었다. 정말로 맛있어서 눈물이 몇 방울 밥알에 떨어졌다. 밥을 먹은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사 이후 처음으로 낮에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간 내가 모은 금괴 세 개가 가지런히 있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하지? 어쩌면 믿지 않을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뿌듯했다. 가슴속 한구석이 따뜻해지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금방이라도 큰 부자가 될 것 같았다. 갑자기 눈을 감고 금괴가 모였을 때의 삶을 상상했다. 상상 속에서 나는 엄마 아빠와 함께 고급 승용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운전은 엄마와 아빠가 번갈아가면서 했는데 내가 그린 장면에선 아빠가 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고급 승용차를 몰며 빌딩을 소유한 고소득 임대업자가 됐다. 그런데도 이 아파트만큼은 팔지 않았다. 매일 금괴가 어디선가 날아오는 이 집을 남에게 넘길 이유는 상상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얘가, 뭐하니? 빨리 옷 입어. 날씨 좋은데 나가야지."


고속도로를 한창 질주하는 나를 집으로 부른 건 엄마의 잔소리였다. '이런! 아직 닫지 않은 서랍의 금괴를 봤으면 어쩌지?'라고 생각했으나 다행히 엄마는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옷장을 열어 문고리를 손으로 한 번 딸깍거려본 나는 걸려 있는 옷을 주섬주섬 챙겼다. 제일 아끼는 흰색 티셔츠에 요즘 유행하는 찢어진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발목까지 오는 짧은 흰 양말을 신고 나가면서 신발은 흰색 운동화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엄마, 준비 다 됐어."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빠, 다 했어."


거실로 나가면서 말했지만 아빠도 먼저 자동차 시동을 걸러 간 것인지 대답이 없었다. 다시 내방으로 돌아와 컴퓨터 전원을 확인하고 현관으로 나갔다. 보조키가 잠겨 있었다. 이상했다. 일단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신발을 신었다. 그리곤 보조키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줘도 돌아가지 않았다. 왼쪽이었나 싶어 왼쪽으로도 돌렸는데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엄지와 거지를 둥글게 말아 보조키 고리에 건 뒤 힘을 주고 아무리 힘을 줘도 전혀 보조키에 내 힘이 전달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시야가 몽롱한 게 꼭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등 뒤에서부터 잠이 밀려오는 듯했다. 잠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난 현관에 주저앉았다. “엄마? 어디갔어? 아빠는 먼저 나갔어?”



"끝인가요?"


같은 시각 밖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한 젊은 의사가 말했다.


"일단락 합시다."


중년의 의사가 답했다.


"실험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젊은 의사가 물었다.


"그날의 기억을 되돌려보는 거야. 우현이란 저 친구의 멈춰버린 기억을 자극해서 그가 한 행동을 우리가 보자는 거. 그게 다야. 치료를 위해 풀어나갈 단서를 찾아보자는 거."


"그럼 저 친구가 저렇게 금괴에 집착했던 것은 뭘까요?"


"매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일종의 관념적 히스테리라고 일단은 보고 있어. 자기는 모르지만 무의식에는 확실히 히스테리로 자리 잡혀 있는 거지. 저 친구 정신 멀쩡할 때 얘기를 들어보니 대입 재수를 할 수밖에 없게 됐을 때 정말이지 죽고 싶고 그렇게 부모한테 미안했대."


"그날 교통사고가 그렇게 끔찍했나요?"


"사진만 봐도 끔찍했지. 처음으로 저 식구가 자동차를 사서 나들이 가는 길이었나 봐. 전부 세상을 떠나고 저 친구 혼자 남았지. 피투성이가 된 저 친구를 옮겼을 때 사실 굉장히 많은 뇌 손상이 있어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한 의사는 없었어. 부모 둘 모두 고아였고 친척 하나 없었으니 병상에 누울 저 친구를 돌봐줄 사람도 당연히 없고. 다행히 몸이 어느 정도는 되돌아왔고 가끔 제정신이 드니까 여기까지 온 거야."


"저 친구는 저 병실 안이 자신의 아파트라고 알고 있는 거죠?"


"그렇지. 사건 당시 거의 모든 얘기가 횡설수설이었는데 한 가지만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했어."


"뭐였나요?"


"내가 금괴를 모으면 우리 엄마랑 아빠랑 일을 조금이라도 쉴 수 있고 자기도 마음 편히 재수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거. 새 자동차로 여행도 갈 수 있을 거고. 거의 세 차례 정도 그 얘기를 하더라고. 금괴가 계속 나올 거라고 하기도 했고."


"거기서 힌트를 얻은 건가요?"


"그렇지. 우리 역할은 매일 병실 문틈으로 금괴 비슷한 누런 덩어리를 넣어주는 것뿐이고. 하도 금 얘기를 많이 했으니까."


"안타깝네요. 식구라도 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겠네요. 내일은 제가 환자 일지 작성할게요."


"아니야.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지금 저 친구를 봐. 눈이 다시 여기 처음 온 날처럼 풀렸어. 아무래도 자신이 문을 열고 나갈 수 없다는 것에서 또 다른 충격이나 자극을 받은 모양이야. 아마 내일이나 모레까지 일어나지 않고 잠을 잘 거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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