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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Apr 10. 2022

(단편소설) 내 손에 악마가 있어

'가끔 그런 상상을 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보는 색이 다르다는 것 말이지. 누가 어떤 색을 초록색으로 인식할 때 다른 사람에겐 그 농도가 아닐 수도 있는 거야. 어쩌면 분홍색이 누구에겐 초록색일 수도 있어. 그래서 우리는 모두 좋아하는 색이 다른 거지. 좋아하는 색이 다르다는 건 꽤 의미가 큰 거야. 이를테면 언어는 현상을 녹여낸 통념을 가둬두는 양식장이야. 그러면 색은 현상을 뇌로 전달하는 언어 이전의 언어지. 난 정말로 모든 사람이 색의 농도와 채도를 다르게 보고 있다고 믿어.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지금과 이를 바라보는 눈들을 인정할 수 없거든.'


혼자 일기장에 이렇게 쓴 건 일 년 전이었다. 우연히 책장 정리를 하다가 들춘 일기장을 보면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창 일필휘지로 적어 내려갔던 그날이 금방 머리에 그려졌다. "엄마 내 손에 악마가 있어"라고 두희가 얘기한 날 밤이었다.


나는 두희를 어렵게 얻었다. 서른이 되어서야 결혼해 그마저도 오 년이 지나서야 두희를 가졌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남편은 대기업을 다녔으나 또래 기수보다 진급이 늦었다. 남편 설명으로는 학연 지연으로 엮인 그 안에서 도저히 주도권을 쥐지 못했다. 남편은 진급 심사에서 떨어진 날이면 "일류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저 시골 촌구석 출신"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날 저녁을 맥주통에 빠져 보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처음 몇 번만 걱정이 됐지 자꾸 반복되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곤 했다. 내 기억으로만 최소 다섯 번은 미끄러졌다. 그러니까 최소 오 년은 또래보다 진급이 늦은 셈이었다. 이는 곧 적은 월급과 깎여버린 남편의 자존심을 입증했다. 그러다 오 년 만에 두희가 들어섰을 때 남편은 그해 진급 심사에서 겨우 승진했다. 두희가 태어나면서 만년 대리를 겨우 탈피했으니 어쩌면 나보다도 남편이 더 두희를 복덩이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얻은 두희는 온 집안의 사랑을 받으며 쑥쑥 컸다. 나보다 세 살 어린 남동생은 삼촌이 됐다는 사실에 온갖 장난감을 사다 날랐다. 친정 식구와 시댁 식구 모두 어렵사리 태어난 두희를 물심양면으로 돌봤다. 주말이면 이 집 갔다가 저 집 갔다가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애미야 내 그동안 너한테 입 삐쭉삐쭉 거린 거 미안하다"라는 시어머니의 말을 들으면 일말의 피로감이 씻겨 내려갔다. 두희는 삼대독자이자 우리 친정에서도 귀한 손이었다. 내 남동생은 결혼을 하지 않았을뿐더러 "결혼할 생각이 없다"라고 외치고 다니는 요즘 젊은이였다.


그렇게 평온했던 두희와 우리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두희의 중학교 입학 직전이었다. 남편이 운을 띄웠고 내가 맞장구쳤다.


"두희 한국중학교 보내야겠어."

"뭐라고요? 그 사립중학교를?"


"응, 하나밖에 없는 귀한 자식 나도 한 번 좋은 교육받게 해주고 싶어. 부모라면 다 그렇잖아. 당신도 그렇지 않아?"

"아니, 누가 몰라서 안 보내나. 전부 마음은 일등 부모지만 돈 때문에 그렇지. 당신, 거기 들어가는 돈이 얼마인 줄은 알아요? 그전에 들어갈 자격이나 주어져?"


"회사에서 딜이 왔어. 부모로서 받아들일 거야. 아니, 받아들이기로 난 이미 결정했어."

"딜? 무슨 딜?"


"어차피, 승승장구 승진은 그른 것 같은데 이참에 두희한테 모든 걸 쏟을 거야."


남편이 말한 회사와 딜은 '덤터기' 쓰기였다. 남편 회사는 '녹색기업'으로 인증된 대기업이었다. 정부가 녹색기업으로 인정하면 그 기업은 배출시설 설치 허가를 신고만 하면 됐다. 대기와 수질 같은 각종 환경 관련 보고나 검사도 헐겁게 받았다. 평소 에너지를 아껴 쓰고 온실 가스와 환경오염물질 줄이기에 앞장선 친환경 기업이라는 일종의 혜택이었다. 그런데 그런 남편의 회사가 최근 폐유를 인근 하천에 유출하다가 지역 언론사에 잡혔다. 자칫 잘못하면 폐유 유출이 전국 방송을 타면서 남편 대기업을 위협할 분위기라는 게 남편의 말이었다.


"내가 배출팀 실세잖아. 내 관리 소홀로 틀어막자는 거야. 회사에서도 그 언론사랑 이런저런 루트로 얘기 많이 할 거래. 개인 관리 선으로 끝내자는 방침이야. 회사 전체 윗선까지 골골 대기 싫으니 한 번 끊어보자는 거지."


남편의 말을 들었을 때 고개가 뒤로 젖혀지면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럼 그거랑 두희 한국중학교는 도대체 뭔 연관인데?"


"한국중학교 하면 최고의 사립중학교잖아. 윗선에서 내가 희생할 경우 두희가 거기 입학할 수 있도록 도와준데. 우리 계열사에서 그 중학교와 연관돼 있어. 당신도 왜 어릴 때부터 그런 학교에 무리해서 보내는 줄은 알지?"


"인맥?"


남편과 내가 알고 있는 이유는 정확했다. 어린 시절부터 사립중학교와 사립고등학교를 거치며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는 게 '있는 집' 자식들의 유행이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문화를 어린 시절부터 가꾸면서 끼리끼리 사회의 한 단면을 공고히 다졌다. 살면서 피부로 느꼈기 때문에 나는 그 경계 안의 달콤함과 경계 밖 비릿함을 알고 있었다. 남편도 모르긴 몰라도 회사 생활 안에서 혹은 아빠들끼리의 대화에서 그런 사례를 수없이 듣고 지켜봤을 것이다.


"6개월만 쉬고 사건 좀 조용해지면 복직도 시켜준다고 했어. 그건 확실하고. 장 이사님 알지? 이사님이 완전 또 실세잖아. 여보, 우리 한 번 두희라도 제대로 키워보자. 제대로 키우는 게 뭔지 모르면 모르겠는데 이런 기회도 왔잖아. 두희 3학년 졸업할 때까지 3년간 학비도 면제될 거야."


그렇게 남편은 결정한 상태였다. 사실상의 통보였다. 매번 진급 심사에서 밀린 남편의 허망함이 내포된 말이었다. 나 또한 오랜 시간을 두고 고민해도 그런 결정을 했을 거라 생각했을뿐더러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곡예 타기는 시작됐다. 폐유 방출 사흘 정도가 지났을 때 남편 회사는 예상과 다르게 신문 1면을 차지했다. 사회적으로 비교적 깨끗한 이미지였던 대기업이 신나게 얻어맞는 건 한순간이었다. 사장은 사과했다. 그렇지만 "잘못했다"라는 시인 안에는 한 직원의 무책임이 녹아있었다. '직원 관리를 잘못해 죄송하다' '인사 시스템 문제까지 뜯어고치겠다' 등의 교묘한 장치가 담긴 해명이 사장 입에서 나왔다. 이후엔 책임의식 없는 행동 때문에 주주들까지 피해를 봤다는 교묘한 수사가 주류 언론을 뒤덮었다. 남편의 실명까지 밝혀지진 않았지만 한 대기업의 배출팀은 그렇게 사회적으로 양심 부족한 사람이 됐다.


남편은 처음에 당황했다. 어떻게 남편의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몇몇 기자들 전화가 왔다. 처음엔 덜컥 받고 바로 끊었지만 이제는 아예 모르는 번호를 받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때마다 남편은 이미 회사와 은밀한 계약서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 위안받았다. 회사 법조팀이 최대한으로 노력해 회사 자체 벌금형으로 틀어막을 것이며 남편은 6개월만 쉬다가 사건이 잠잠해졌을 때 전혀 다른 부서로 복직 발령시켜준다는 계약서였다. 여론 상황을 봐서 원할 경우 지방 소재 계열사 근무도 가능하다고 했다. 게다가 또 다른 비밀스러운 추가 계약서가 남편과 나를 더욱 안심시켰다. 거기에는 두희의 한국중학교 입학 권한을 주며 회사는 3학년까지 3년간의 학비도 지원한다고 쓰여 있었다. 전화기를 꺼놓고 잠들지 못하는 밤에 나와 남편은 머리맡에 그 계약서를 두며 자곤 했다. 이따금 두희 방에 가서 자고 있는 아이 얼굴을 보며 부모가 가진 양심의 문제에 앞서 아이의 앞날이 더욱 중요하다고 수없이 반복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된 남편의 백수 생활은 예상보다 빨리 평온해졌다. 우리 생각보다 여론은 빨리 잠잠해졌다. 회사 차원의 여러 로비가 기대 이상의 힘이 있다는 걸 또 한 번 배우는 순간이었다. 더는 남편의 전화로 모르는 번호가 오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그래도 확실하게 다른 전화번호로 바꿨다. "전화가 마구 온다고 그때 번호를 바꾸면 역효과가 납니다. 한 달 정도 지나서 한 일주일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가 없을 때 그때쯤 바꾸세요"라고 남편 회사 법무팀장이라는 사람이 해준 말이었다. 남편은 연신 "네, 감사합니다. 네, 네"하고 답했다.


두희는 예정대로 한국중학교에 입학했다. 나와 남편은 친정과 시댁에 전부를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남편이 회사가 잘되고자 하는 마음에 폐유를 그런 식으로 처리했으며 그 때문에 회사가 정상참작을 해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의미로 복직도 시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중학교 입학은 철저히 우리가 운이 좋아 추첨됐으며 학비는 남편 월급과 내가 집에서 하는 출판사 원고 검열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을 아끼면 계산은 나온다고 거짓말했다. 오히려 두희가 처음부터 좋은 학교 코스를 밟아서 좋은 집안 자식들과 인맥을 쌓으면 아이의 삶 자체가 달라진다고 강조했다. 그 말을 수차례 반복하고 반복해 각인했다. 나와 남편보다 더욱 인맥에 얽힌 사회를 경험했던 양가 부모님들은 크게 반겼다. 평범한 행정 공무원으로 퇴직한 시아버지는 "귀한 손이니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해보자"라고 화답했다.


한국중학교는 드라마에서 흔히 지칭하는 '지도층' 자녀들이 다니는 곳으로 유명했다. 재벌 자녀, 고위 관료 자녀, 정치인 자녀, 대학병원장 자녀, 명문대 학과장 자녀 등등 다들 그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집안 자식들이 총집합했다. 학교는 정원의 20%를 공정한 추첨으로 선발했다. 하지만 80%는 학업계획서 제출이라는 명분 아래 이들 집안 자식들이 뽑혔다. 대부분이 그 이면을 쉬쉬하고 있다는 걸 회사에서 들었다고 남편이 내게 알려줬다. 나는 꼭 그렇지 않더라도 그 많은 학비와 교내 분위기를 감당하려면 사실상 우리 같은 일반인 자식들은 엄두조차 내지 못할 거라고 조소했다. 남편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모 대기업 자녀가 이번에 입학하는데 사실상 재벌 3세로 불리는 만큼 그 친구랑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식의 교육이 엄마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고 전해줬다. 나는 당장 두희가 써야 할 학업계획서를 위해 고액 상담이라도 받아야 할 형편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남편은 대충 아이의 인적사항과 성격 정도만 적으면 회사가 연결해준 사교육 업체에서 처리해주기로 했다고 친절히 설명했다.


"엄마, 이 교복 입고 학교 가는 거야?"


두희가 첫 등교를 하던 날이었다. 감색 정장과 비슷한 교복을 입은 두희는 신났다. 새로 산 책가방과 신발보다도 두희는 교복을 좋아했다. 같이 놀이터에서 흙 만지며 크고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이 두희의 교복이 멋있어서 부러워한다고 했다. 그들은 모두 공립 중학교로 진학했을 게 분명했다.


"엄마, 근데 나는 왜 멀리 있는 학교까지 갔냐고 친구들이 묻던데? 학교 버스도 재밌는지 물어보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엄마 아빠가 보내줬다고 해. 학교에서는 항상 선생님 말씀에 예예, 하며 따라 하고 친구들하고 노는 것도 열심히 하고."


아이의 본질적인 질문에 내가 뱉은 대답은 피상적으로 겉돌았다.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을 벌인 것인지 덜컥 겁도 났다. 하지만 두희를 학교 버스에 태우고 다시 학교 버스로부터 받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적어도 두희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이 모든 걸 누릴 수 있다고 위안했다. 고등학교는 또 다른 문제이며 어떻게든 풀 수 있다고 긍정했다. 근건 내 안의 자기 암시였다. 남편에겐 사회적 위험과 맞바꾼 거래였다. 남편의 복직도 금세 찾아왔다. 폐유 사건은 회사의 벌금과 사회공헌 활동 강화 정도로 끝났다. 로비가 통한 게 분명했다. 남편은 배출팀에서 벗어나 시설팀으로 복직했다. 사무실 근무보다 현장 근무가 많아졌다.


"아직은 보는 눈이 있을 수도 있으니 사무실 복귀보다는 현장 관리 업무로 빠지는 게 맞다"라고 남편은 회사의 방침을 설명했다. 조만간 인사팀이나 재무팀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다음 승진을 위한 줄타기를 할 거라고 남편은 두희가 잠든 방에서 한국중학교 교복을 만지며 술에 취해 거들먹거렸다. 당연히 그렇게까지 될 확률은 낮아 보였다. "그놈의 연줄을 우리 두희는 꼭 만들어줘야지." 남편은 두희의 교복 바짓단을 만지며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부모가 학교를 다니는 건 아니었다. 두희가 학교를 오가며 느낀 것들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학교 버스에 오르고 내리는 두희를 볼 뿐이었다. "어떻게 두희를 그 학교에 보낼 생각을 다 했어요? 돈도 돈이지만 안에서 분위기도 장난 아닐 텐데"라고 동네 엄마들이 물었다. 나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빚을 냈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그러나 학교 버스를 오가며 늘 밝은 얼굴이었던 아이가 1학기를 마칠 무렵 조금씩 어두워졌다. 아침에 꾸물거리는 일도 잦아졌다. 방과 후 논술 학원도 하나 보냈는데 그마저도 다니기 싫다고 투정 부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걱정이 밀려왔다. '어떻게 보낸 학교인데'하는 보상 심리도 저 밑에서 작동했다.


"요즘 학교에서 무슨 일 있니?"

"아니, 재미가 없어서 그래."


"재미가 왜 없어? 무슨 과목이 제일 재미없는데?"

"그냥 학교가 재미없어. 동네 애들 다니는 학교로 가고 싶어."


"그게 무슨 어린애 같은 소리야. 다 부러워하는 학교 다니면서. 수업이 따라가기 힘들어?"

"애들은 이런 교복 안 입잖아. 나만 이 동네에서 이 교복 입고 다니잖아."


방학을 일주일 앞두고 첫 투정이 터졌다. 다짜고짜 두희를 다그치고는 담임선생님한테 전화를 걸었다. 작은 과일바구니를 사들고 학교 수업이 끝난 뒤 두희네 교실로 찾아갔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두희가 굉장히 산만합니다. 수업에 도무지 집중하질 않아요. 친구들도 방해하고요. 특별히 마구 시끄럽게 굴거나 하지는 않는데 쓸데없는 낙서를 하거나 하는 일이 잦아요. 얼마 전에는 칠판에 가위를 집어던지기도 했어요.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는데 안 그래도 말씀드릴까 하다가 학교 법칙이 학부모님이 먼저 연락하시거나 오시기 전에는 신경 안 쓰이게 해려야 해서요. 저도 지도 책임으로 징계받을 수도 있기도 한데 사실 많이 놀랐습니다."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원래 중간 자리에 앉았는데 지금은 맨 뒤에 앉습니다. 원탁 책상을 놓고 둥글게 앉아 수업할 때도 두희 옆엔 비워두고 제가 수업 진행 중에 잠깐씩 앉아요. 하지만 엄밀히 말해 학습 능력도 떨어지고 한 학기 내내 적응도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영어 담당인데 다른 과목 선생님들 하고도 얘기를 나눠보면 제 과목이랑 수학 과목의 기초가 부족한 거 같더라고요. 혹시 초등학교 마치고 중학교 입학하기 전에 학원은 보내셨나요?"


말문이 막혔다. 내가 아는 기초와 선생님이 아는 기초의 아득함을 확인할 수 없어 창피했다.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학원이라는 말에선 텅 빈 통장이 생각났다. 억장이 무너졌다.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담임선생님의 말투는 그만큼 딱딱하고 단호했다. 급격하게 냉정한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서운하기도 했다. 집안 사정을 알고 하는 소리 같았다. 집에 돌아와 두희를 다시 다그쳤다.


"너 왜 그렇게 수업 시간에 낙서를 하고 집중도 안 하고 그랬어? 그래서 자리도 뒷자리로 밀린 거라며?" 두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꾸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나마 가위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냥 학교가 재미없어. 정말로 재미없다니까"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아이의 엇나감은 더욱 커졌다. 방학하고 돌아온 날에 두희는 글짓기 학원 외에는 어떤 것도 가기 싫다고 했다.


"엄마가 보내 줄게. 이번 방학에 수학하고 영어 기초 좀 잡아보자"라고 했지만 "싫어. 정말 소원인데 다음 방학부터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갈게. 그러니까 이번에만 동네 친구들하고 놀 게 해줘"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남편도 워낙 학교 애들이 선행 학습이니 뭐니 해서 나타났으니 한 학기 동안 두희가 스트레스 좀 받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방학에는 가만히 두자고 했다. 성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서 뛰어난 친구들을 사귀면서 나중에 커서도 도움받고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을 사귀는 게 더 중요한 것 아니냐고 했다. 나는 내 고집을 꺾기로 했다. 하지만 두희는 방학 둘째 날 아침에 일어나 "엄마 내 손에 악마가 있어"라고 헛소리를 했다. 그러면서 옷을 주섬주섬 입고는 집 밖에 나갔다. 그게 내가 본 두희의 마지막 모습이자 두희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그렇게 두희는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두희의 손에는 가위가 들려 있었다.


"그러니까. 애가 왜 뛰어내렸는지 이유부터 찾아야 할 거 아니에요? 학교 방학하고 이틀 뒤입니다. 제 말은 왜 학교에서의 원인은 찾지 않고 개인사로 취급하느냔 말입니다." 남편이 두희 아빠로서 자식의 마지막을 울부짖었다.


"아이가 아무것도 써 놓은 게 없잖습니까. 하다못해 일기장이나 쪽지에 학교 어쩌고라도 써놨으면 모르겠어요. 그런데 없잖아요. 보세요. 생활기록부에도 별다른 특이 사항 기록이 없습니다. 무턱대고 방학 후 일을 학교로 몰아가면 저희도 곤란합니다. 학교에서도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했잖아요."


남편은 담당 형사에게 울부짖음에 가까운 화를 냈다. 하지만 먹히지 않았다. 두희의 죽음은 가정과 개인사에 따른 자살로 결론 내려졌다. 빠른 속전속결 수사 종결에 기가 막혔다. 경찰 말마따나 무언가 학교와 관련된 언급이 나온 게 없었다. 두희가 그날 아침에 "내 손에 악마가 있다"라고 말했다는 나의 진술은 나약했다. 내가 갖고 있는 직감과 추론을 남들에게 뚜렷하게 전달하기엔 가진 힘이 없었다. 남편의 폐유 누명과 복직이 금세 잊힌 것처럼 이 사건도 금방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몇몇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내게 달라붙었지만 내 말이 그대로 실린 것은 없었다. 학교 부적응에 따른 자살일 것이란 내 외침은 어미의 절박한 심정 정도로만 묘사됐다. 그 이상의 지면과 전파를 기대했던 건 욕심이었다. 남편은 언론도 한통속이라 그렇다고 했지만 거기까지 대꾸하고 싸우기엔 내가 너무 지쳐갔다. 시간이 흘러 몇몇 기자들이 정의감과 기자 정신을 운운하며 내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연락이 두절되거나 사안을 지켜보자는 핑계를 대며 사라졌다. 매번 마지막 끈이라고 붙잡는 것들이 끊어지며 세상을 향한 나의 긍정적인 시선도 단절돼 갔다.


"회사에선 이쯤에서 힘 빼지 않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해. 괜히 더 시끄럽게 해 봐야 폐유 당사자인 것도 드러난다고. 그러다 보면 회사 안에서 내 신분도 보장될 수 없을 거야. 회사와 연계된 학교에 아이가 입학한 것부터 해서 별별 소리가 다 들릴지도 모른다고 선을 긋는 목소리도 있고."


남편이 어느 날 퇴근 후 말했다. 타는 듯한 그 목소리에서 잔잔한 먹먹함이 전달됐다. 우리 부부는 끌어안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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