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제가 나를 찾았다. 무려 삼 년만이다. 소문으로 테제는 지금 서울 어디에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똑똑한 그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도 역시 테제다웠다. 그는 소속을 싫어했다. 테제 이름은 박태진이었는데 우리는 모두 그를 태제라고 불렀다. 태제의 사전적 의미는 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최초의 명제 또는 주장이다. 뜻에 맞게 태제는 늘 무언가를 제시했고 이따금 그걸 삶으로 시행했다. 누가 테제를 처음에 테제라고 불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어쨌든 모두 그렇게 불렀다. 테제는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책에 비유하자면 그리스인 조르바에 가까웠다. 그러나 조르바라고 부르기에 테제는 나이가 어리고 몸집이 두툼하진 않았다. 테제는 키가 컸고 눈이 깊었으며 호리호리하지만 단단한 몸을 가졌다. 그렇다. 써놓고 보니 테제는 요즘 말로 훈남이었고 그가 입을 열면 온갖 새로운 관점이 제시되곤 했으니 뇌도 섹시한 사람이었다. 내가 테제를 묘사하려던 의도는 이게 아닌데 이렇게 되고 말았다. 테제의 늪에 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는 여전히 내 정신세계 일부를 지배하고 있노라고 자인한 꼴이 되어버렸지만 나쁘지만은 않다.
그런 테제가 나를 찾았다. 우리는 삼 년간 왕래가 없었고 그건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자연스러운 메시지였다. 테제는 먼저 연락하는 법이 별로 없었는데 대학 졸업과 동시에 그는 그대로 자유롭게 전국을 유람했고 나는 나대로 고향에 박혀 경찰 공무원 준비를 했다. 나는 책이라면 라면 받침대로도 쓸 게 없을 정도로 거리가 멀었다. 그런 나와 경찰 공무원 시험 합격 사이는 아득했다. 나는 시험에 떨어지고 다시 응시 원서에 이름 써서 제출하길 반복했다. 그사이 겨울은 봄이 됐다가 봄은 겨울이 되며 시간을 굴렸다. 나는 이런 다람쥐 쳇바퀴 돌리기를 계속 이어가야 하느냐 마느냐 시점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그때 테제가 날 찾은 셈이다. 나는 벌써부터 테제가 내놓을 말들에 기대 반 우려 반으로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테제는 어떻게 살았을까. 아니 그보다 테제가 내 삽질을 듣고 나면 뭐라고 말할까.
“문을 왜 이리 굼뜨게 열어?”
테제다운 첫말이었다. 테제와 나는 이 년 여를 한 지붕 아래 동거동락하다가 삼 년 여간 연락이 뚝 끊겼다. 그러다가 테제는 삼 년 만에 ‘아직 거기 살지?’라는 문자 한 통 보낸 뒤 불쑥 찾아왔다. 그리곤 초인종을 기껏 한 번 눌러 십 초 만에 만나자마자 첫마디를 이렇게 시작했다. 길게 설명했지만 한마디로 제멋대로에 자기중심 끝판왕이자 이따금 저 옛날 거리의 철학자를 자처하며 그들을 코스프레하는 자의식 과잉된 인간의 함축된 말이었다.
테제의 모습은 예상대로 부스스했다. 귀를 덮는 머리카락에 염색을 하긴 했는데 언제 했는지 모를 정도로 밑머리와 윗머리의 색이 달랐다. 그 자신의 성격 이상으로 자유분방한 반곱슬 머리칼 덥수룩함을 넘어서서 제멋대로 갈퀴를 휘날리는 숫사자와 같았다. 옆구리에는 어디 분리수거장에서 주워왔을 법한 낡은 책을 끼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거리에서 떠들고 다니던 수다쟁이이자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같지 않느냐고 강변하는 듯했다.
테제는 늘 그랬다. 테제와 나는 오랜 시간 대학교 농구동아리에서 활동하며 호흡을 맞췄다. 우리는 1학년 시절부터 학교를 들썩거릴 정도로 교내외 농구대회 상을 휩쓸고 다녔다. 테제는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준결승전부턴 굵은 책을 옆구리에 끼고 농구장에 왔다. 그 당시 군대 군기 못지않은 젊은 꼰대로 불리는 선배들이 테제한테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눈총을 줄 법도 했다. 하지만 고작 1학년 주제에 동기들을 이끌고 온갖 경기들을 이기고 다니며 그 안에서 코트 위의 사령관이라고 불리는 테제에게 지적질을 할 이는 선배 중에도 없었다. 테제의 실력은 아마추어 사이에선 월등했고 큰 키에 몸도 날랬는데 무엇보다도 머리가 뛰어났다. 어디서 파고들었는지 온갖 이론으로 중무장해 상대가 어떤 전략과 전술을 들고 나왔는지 간파하여 자신이 진두지휘하는 전략으로 상대 급소를 찔렀다. 선배들은 이 지략에서 밀려버렸으므로 테제를 꼬집을 말이 없었다.
구체적으로는 이런 모습이다. 테제가 경기 전 코트에 들어선다. 옆구리엔 어김없이 큰 책을 끼고서다. 그 책은 주로 철학책이거나 어디 듣도 보도 못한 도서관 저 구석에 있을 법한 인문학 책이다. 테제는 그걸 끼고 오지만 않고 우리팀과 상대팀이 몸을 푸는데도 태연히 벤치에서 읽는다. 보다 못한 선배 중 하나가 이제 몸을 풀어야지. 안 그러면 부상당한다. 따위의 말을 슬쩍 흘려야 마지못한 듯이 테제는 몸을 푼다. 그리고 경기에 임한다. 경기가 시작돼 채 5분여도 안 되면 테제는 작전타임을 부르라고 벤치에 있는 선배한테 주문한다. 그러면 벤치에 있는 농구 경력 출중하고 실력도 좋지만 테제가 봤을 땐 한없이 형편없는 주장 선배가 작전타임을 부른다. 이후 선수들이 벤치에 모이면 테제의 강변이 시작된다. 저쪽은 지금 지역방어를 서고 있어. 저 지역방어는 여기가 약해. 그러면서 테제는 작전판 위에 특정 지점을 찍는다. 그러면 그쪽을 열심히 오가며 슛 기회를 보는 건 나다. 테제가 계획한 루트에 따라 우리팀의 공은 열심히 배분되고 나는 그곳에서 슛 기회를 얻는다. 패스를 받아 슛을 정확히 림에 넣는 것까지가 내 몫이다. 득점 이후 수비를 위해 백코트하면 테제는 나와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등을 두들겨준다. 그렇게 몇 번의 작전타임이 오가고 경기가 끝나면 우리는 늘 이긴다. 이런 식으로 테제가 진두지휘하고 나를 비롯한 팀원들은 자기 역할만 해서 승리를 차곡차곡 챙겼으니 아무도 철학자 테제가 지시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선배들은 갈수록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것이 테제였다. 그런 테제가 내게 와서 끊겼던 연락을 그답게 이어 붙이려는 참이었다.
“경찰 공무원 한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꼴 보아하니 여전한가 보다?”
테제는 으레 짓던 함박웃음을 동반해 말했다. 그가 말하는 메시지는 매일이 날카롭고 일견 기분도 상할 수 있었지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본새에서 교묘하게 자잘한 시비를 비켜나갔다. 게다가 테제를 잘 알면 알수록 그와 괜한 대거리를 해봐야 피곤해지고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것쯤은 누구나 겪게 되어 있었다. 테제는 머리카락이 좀 더 자유로워진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잘 됐겠냐. 너는 머리가 더 긴 것 말고는 뭐가 없네? 그 책은 또 뭐야? 어디서 주운 거 아니냐? 바퀴벌레 들끓겠다.”
우리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과거를 주제로 한 대화는 우리에게 맞지 않았다. 테제가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도 그렇거니와 내가 경찰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졌으면 떨어진 것이지 그걸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우리 사이에 어울리지 않았다. 우리는 늘 현재를 말했고 현재가 충만해지면 그뿐이었다. 정확히는 우리가 아니라 테제가 그런 형태로 대화를 이끌었다. 테제 말로 과거에 얽매이는 인간은 현재를 사는 바퀴벌레만도 못했다. 그런 테제의 숭고한 가치 앞에서 그가 옆구리에 달고 왔을지도 모르는 책벌레만도 못한 처사를 할 순 없었다.
“이 책은 뭐. 몇 번 읽었는데 이제 버리려고. 안 그래도 여기 분리수거장 맞지? 여기다 버리면 되겠네.”
테제는 대문 옆에 있는 분리수거장에 책을 내던졌다. 그는 늘 그랬다. 어떤 책은 이상하리만치 소중히 하면서도 대부분의 책은 읽고 나서 내버리곤 했다. 그가 던진 책이 분리수거장 박스 위로 떨어졌다. 책엔 ‘진리와 정당화’라고 적혀있었다. 저자 이름이 위르겐 하버마스라고 쓰여 있었는데 당연히 내겐 독일 축구 감독 위르겐 클롭 외에는 위르겐 어쩌고라고 읽혔다.
“그래서 시험은 계속 볼 거야? 언젠데?”
“아직 몇 달 여유는 있는데 모르겠다. 나도.”
“그럼 잘됐다. 나랑 좀 살자. 같이 라면 먹고 살 사람이 없다.”
“라면?”
“뭘 놀라. 방 하나 얻어서 좀 살려고 하는데 혼자는 재미없잖아. 간만에 같이 농구나 좀 하다가 맥주나 먹고 그렇게 살자는 거지.”
그와 이 년여를 같이 살면서 우린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대학교 선배들 말로는 아무리 친해도 룸메이트로 지내면 싸우기 마련이라는데 나와 테제는 그럴 일이 없었다. 우리는 농구 시합이 있는 저녁 외엔 철저히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나는 나대로 성실히 수업을 오가며 연애하느라 시간이 없었다. 테제는 테제대로 불성실하게 수업을 가지 않으며 도서관에서 요상한 책들을 읽느라 바빴다. 우리가 공통으로 하는 건 교내외 농구대회 상금을 쓸어 담는 것과 이후에 맥주를 마시는 것이었다. 한 가지 더 있었는데 그것은 뉴스를 보는 거였다. 테제는 늘 아침과 저녁에 뉴스를 봤다. TV에서 흘러나올 때도 있었고 라디오에서 들릴 때도 있었다. 어쨌든 그는 매일 뉴스를 소비하면서 나한테 의견을 묻곤 했다. 당시 우리가 듣던 뉴스란 게 비슷비슷했다. 싸우고 잡아채고 엎어치기까지 나왔다는 정치 뉴스가 그러했고 그런 정치에서 흘러나온 사회 현상을 쉬쉬하며 감추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들어간 언론의 보도 방식이 그러했다. 그나마 재밌는 건 연예인 뉴스나 스포츠 뉴스였는데 테제는 그런 것도 빠지지 않고 챙겼다. 이를 테면 ‘나훈아가 침묵을 깨고 콘서트를 연다’라는 기사가 나오면 저 옛날 나훈아와 남진의 라이벌 시대가 어떠했고 지금 어떻게 흘러왔으며 왜 도대체 나훈아는 왜 방송 활동을 의도적으로 꺼리는지 등을 찾아보는 거였다.
“너 왜 스타가 말 그대로 별인 상태로 있어야 하는 줄 알아? 그건 30퍼센트의 안티 팬이 있어야 진짜 스타가 되고 별이 될 수 있는 거래. 그리고 별은 보이면서도 잡을 수 없는 일종의 꿈이어야 되고. 나훈아는 그런 비즈니스 마인드를 갖춘 거야.”
이런 식이었다. 라면 받침대로 쓸 책도 없는데다가 뉴스라면 그저 흘러듣기 바쁜 내게 테제는 박학다식의 대명사이자 어쩔 땐 너무 많이 알아 빛나는 것 같은 별로 보였다.
테제가 차문을 열면서 타라고 했을 때 나는 놀랐다. 어디서 이 차를 샀을까. 아니 어디서 용케 주워왔을까. 차는 여기저기가 찌그러져 있었다. 정말로 다 먹은 콜라캔처럼 여기저기가 우그러져 있었다. 문을 열어 안을 보자 창문은 손으로 돌려서 올리고 내리는 구식 중의 구식이었다. 창은 밖에서도 안이 훤히 보였고 당연히 안에서도 밖이 훤히 보여 사생활을 중시하는 요즘 사람들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테제가 무려 차키를 꽂고 돌리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시동을 걸자 차는 부응 소리를 내며 터덜거리는 엔진 파열음을 있는 그대로 저 밑에서부터 앞좌석까지 끌어왔다. 테제야. 너 이런 차 어디서 난 거야. 이거 가기는 해? 아이고 키로 수가 삼십만이 넘었네. 이거 가긴 가냐. 아니 그보다 기름 먹는 하마 같은데. 이런 말들을 죽죽 늘어놓았는데 테제가 답한 건 하나 뿐이었다. “잘 굴러가.”
차는 잘 굴러가고 잘 서면 돼. 본질에 충실하면 땡이지. 나머진 사치 아니겠냐. 청산유수 같은 변명 아닌 변명에 역시 테제다움을 느끼면서 나는 이 차가 차라리 고속도로에 들어서기 전에 멈춰서 어디 카센터라도 손쉽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테제는 그런 건 아랑곳 하지 않고 신나게 차를 밟아 속도를 높였는데 이 오래된 차가 소음을 완화시켜주지 않고 그대로 차 안으로 전달해주는 통에 나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말문이 다 막혀버리니 나는 얼마간 눈을 감고 ‘도대체 이 녀석한테 삶이란 뭘까?’ 따위의 테제가 할 법한 발상을 나도 해버리고 말았다.
엔진소리가 조금은 잦아들었을 때 테제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한텐 콘솔박스를 열어 그 안에 있는 껌을 씹으라고 했다. 나는 그 껌이 도대체 언제부터 거기에 들었던 건지 불안했다. 그러나 어쩌면 이 차를 타고 가다가 객사하는 통에 이 껌이 인생 마지막 껌이 될 수도 있으니 씹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해 씹기로 했다. 질겅질겅 껌 씹는 나와 푹푹 피워대는 테제의 담배 연기가 얽히자 그쯤 되어 나는 우리가 무슨 모험을 떠나는 것이라고 긍정적인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테제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어때? 옛날처럼 막 살던 느낌 나지? 우린 모험을 떠나는 거야. 가고 싶은 대로. 느끼고 싶은 대로.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사는 거라고. 얼마간 먹고 사는 건 걱정마. 돈이라면 내가 좀 모아뒀으니까.”
“그래 참 좋다. 이 고물차가 오히려 분위기엔 맞네. 근데 이 껌 도대체 얼마나 오래 된 거니?”
“그 껌? 껌도 유효기간이 있나? 그냥 씹어. 아마 이 차 몰던 전 주인이 넣어놨나 보지. 나는 거길 열어본 적이 없으니까.”
“열어본 적이 없다고? 그럼 껌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장난치려고 한 말인데 정말 껌이 있어서 나도 놀랐어. 어쨌든 씹으면 되는 거고. 내가 준 게 됐잖아.”
어느새 나는 출처 모를 껌을 씹고 있었으며 자동차는 퍼지기 일보직전처럼 그르렁거렸다. 교통 혼잡으로 차가 설 때마다 우릴 흘깃흘깃 보는 차창 밖의 시선이 느껴졌는데 보나마나 나만 그런 것을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므로 이것은 테제의 잘못이 아닌 남을 의식하는 나의 태도와 그나마 썬텐이 안 된 차의 잘못쯤으로 귀결될 게 뻔했다. 그러니까 논쟁할 주제도 못 되는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우리의 이 모험이 이제 막 시작한 것에 설렘마저 느꼈다. 이제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될 것이며 언제 끝날 것인가. 그나저나 선뜻 따라나선 나도 웃기네. 정말로 나도 수험생 생활에 지쳤나 보다. 그런 생각들이 퍼지는 찰나에 테제가 차를 세웠다.
“일단 서울을 조망하기 위해 북악 스카이웨이부터 가야지? 한눈에 훑어보면서 커피 한잔 때리자.”
“이 똥차가 거기까지 올라갈 수나 있어?”
이런 대화가 오갔지만 결론은 이미 나온 상태였다. 테제는 다 계획이 있었다. 나는 그 계획에 이런저런 반론을 내놨다가 테제가 내놓는 또 다른 반론에 합해주는 태도를 취해주면 되었다. 그게 테제와 나의 오래 전 방식이었고 이제와 달라질 리는 없었다. 북악스카이웨이에서 테제는 별 말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 캔커피를 홀짝이며 저 맞은편에 보이는 단독주택단지를 바라봤다. 밤바람이 볼을 훑고 머리칼을 살랑였는데 어째서인지 해방감마저 들었다. 정말로 시험에서 해방됐다는 생각과 그렇기에 정말로 시험에서 떨어져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란 생각도 불현듯 들었다. 나는 그때 테제와 만남 이후 다시는 수험생 생활을 하지 못할 것이란 확신을 하고 말았다.
“이제 가자. 할 일이 있어.”
똥차는 다시 움직였고 테제는 자신이 짜놓은 계획표 안으로 나를 본격적으로 넣었다. 우리가 당도한 곳은 어느 변두리 동네의 기원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기원이라고 하면 무슨 본질적 역사쯤을 생각할 듯싶은데 우리가 닿은 곳은 정말로 기원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나무로 짜인 판 앞에서 돌을 만지는 바둑 두는 곳 말이다.
“태진이 왔냐. 오늘은 판 좀 벌어지는데.”
기원 주인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 머리엔 잠자리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북악 스카이웨이에서 흩날리던 내 머리카락 몇 올이 아저씨 머리에 옮겨 간 것처럼 듬성듬성 벗겨진 머리가 형광등에 반사됐다. 왼손엔 제멋대로 타면서 재를 떨어트리는 담배 한 개비가 거꾸로 타고 있었다. 테제는 대충 웃으며 잠자리 아저씨한테 꾸벅 인사를 한 뒤 나를 데리고 구석 자리로 갔다. 기원 안엔 담배 냄새와 믹스 커피 냄새가 한데 어우러져 진동했다. 한쪽에선 낡은 구닥다리 티브이가 저 혼자 떠들고 있었는데 반대편에 있는 환풍구도 먼지가 가득한 채 억지로 돌고 있었으므로 둘은 한 세트 같았다. 테제가 자리에 앉자 잠자리 아저씨가 믹스 커피를 들고 마주 앉았다. 나는 아저씨 머리 위에 머리카락이 여전한 것을 보고나서야 저것이 정말로 저 아저씨의 머리카락이라는 확인 절차를 통과한 기분이 들어 안도했다.
“한 이십 분 뒤에 온대. 간만에 삼백짜리 판 벌어지니까 다들 구경도 하겠다고 저러지 뭐야. 예의 차려서 다들 조용히 있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기분 좋게 한 판 둬.”
아저씨는 환풍구 앞에 앉은 서너 명의 또 다른 아저씨들을 가리키며 테제에게 믹스 커피를 건넸다. 중년부터 누가 봐도 할아버지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까지 전부 아저씨가 눈길을 건네자 손을 들어 보여 테제에게 흔들었다. 테제는 그들에게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했다.
“이게 지금 무슨 판인데? 내기 바둑 두는 거야? 너?”
“응. 이기면 삼백 만원. 서로 삼백씩 올리고 두는 거야. 아직 상대할 사람이 안 왔어.”
“상대가 누군데?”
“서 사장님이라고 이 근처 과일 가게 하신다네. 둘 다 똑 같이 삼백 만원 걸고 두는 거지만 내가 일종의 챔피언이고 저쪽이 도전자야. 기원은 사람 몰려서 좋고. 이래저래 부수입도 올리고. 나는 이기면 돈 벌고 모두가 좋은 구조.”
나는 기원이 이래저래 무슨 부수입을 올리는지 알 턱이 없었지만 관심도 없었다. 그보다는 테제가 삼백 만원이나 이 판에 걸고 내기 바둑을 두겠다고 앉은 것이며 몇 년간을 이렇게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놀라우면서도 역시 테제 같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마저 들었다. 지긋지긋했던 수험생 생활에서 벗어나 이런 큰 도박을 옆에서 본다는 것이 한편으론 흥미롭기도 했다. 테제 역시 지더라도 큰 상관이 없는 액수였으므로 돈을 걸었을 터였다. 예전부터 테제는 묻지 않아도 전부 계획이 있는 녀석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서 사장은 때 빼고 광낸 구두를 신고 왔다. 위아래 색을 맞춘 감색 정장에 짙은 파란색 넥타이를 맸다. 과일 가게 사장치고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손에 과일 껍질 하나 만지지 않았을 차림새였다. 그렇지만 서 사장이 정말 과일 가게 사장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반상 앞에 앉는 순간 구경꾼들은 몰려와서 팔짱을 끼거나 믹스 커피를 홀짝였다. 테제는 옷소매를 추켜 올린 뒤 담배를 꺼내 물었다. 둘은 간단히 눈인사만 한 뒤였고 판은 벌어졌다. 나 또한 삼백만원이라는 큰 돈 앞에서 테제가 이기기만을 바랄뿐 다른 것들은 저 뒤로 보내버렸다. 농구장에서 기괴한 전술로 우리를 이끌고 상대팀을 쳐부수던 테제는 비로소 자신이 구상한 모든 전략과 전술을 오롯이 펼쳐낼 수 있는 자신만의 전쟁터를 찾은 것이었다. 내가 아는 테제는 절대로 질 리가 없었고 지더라도 치명상을 입을 정도의 무리한 내기는 할 리가 없었다. 숨죽이는 이들 사이에서 테제는 흑을 잡았고 과일 가게 사장 같지 않은 과일 가게 서 사장은 백을 잡고 덤으로 여섯집 반을 가진 뒤 대국이 펼쳐졌다. 잠자리 사장님은 초시계를 테제와 서 사장 앞으로 각각 십 분씩 설정했다. 자신들이 가진 십 분 안에 둘을 모든 수를 계속해서 내놓고 한 판을 끝내야했다. 바둑치고는 속전속결이었다.
침묵 속에서 바둑돌이 탁탁거리며 반상 안에 착석했다. 결과적으로 둘 사이엔 십 분도 사치였다. 둘은 이미 끝난 판을 복기하듯 빠르게 손을 놀렸다. 기원 바둑이 어떤 것이라는 정도만 아는 나도 이렇게 빨리 두는 바둑은 처음 봤다. 초시계는 애초 형식적인 시간 제한일뿐 실질적으론 의미가 없었다. 테제가 흑을 반상에 올리면 곧바로 서 사장이 백을 잡아 응수하는 식이었다. 이따금 구경꾼들 사이에서 “허허”하는 탄식이 나왔다. 그럴 때마다 잠자리 사장님은 손가락으로 조용하라는 시늉을 하며 그들을 자제시켰다. 내가 보기에도 초반 막상막하로 흘러갔던 대국은 중반부터 테제가 유리하게 보였다. 종반엔 어느 누가 봐도 테제의 흑이 더 많은 집을 만들었다는 게 보일 정도였다. 이제 막 칠분 여가 흐른 뒤였다. 할아버지뻘 되는 구경꾼 아저씨는 생각보다 싱겁다는 듯 실소를 짓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칠분 만에 삼백 만원이라니. 저 삼백 만원으로 테제는 뭘 할까. 어쩌면 저 돈을 벌어서 나랑 당분간 놀려고 했던 계획이었나. 내 심장도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계좌로 하시겠어요? 아니면 현금으로?”
서 사장이 돌을 내려놓고 항복을 선언하자 잠자리 아저씨가 나긋하게 물었다. 서 사장은 파란 넥타이를 매만지며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나는 서 사장이 오른발 발끝을 까딱이는 걸 봤다. 그 무의식적인 행동은 자신이 질 것이란 건 전혀 고려하지 않은 눈치였다. 아마도 서 사장은 테제만 잡으면 이 기원에서 자신이 가장 강한 사람이 된다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현금으로 하지. 돈 안 주고 움직이지는 건 법도에 어긋나니까 내가 갈 순 없고. 박 사장 내 차 알지? 밑에 내려가면 조수석에 비타오백 박스 있어. 그거 가져와.”
서 사장은 잠자리 아저씨한테 자동차 키를 넘겼고 구경꾼들은 더 재미난 구경이 난 것처럼 집중했다. 잠자리 아저씨가 돈을 가져올 때까진 쥐죽은 듯 조용했다. 테제는 말없이 반상을 보며 담배를 피웠고 서 사장도 똑같은 자세와 똑같은 행동으로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젊은 친구가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정석적이고 고전적이야. 그런데 또 변칙에도 능하고. 바둑 스타일이 무척 오래된 것 같아. 얼마나 뒀나?”
서 사장이 비로소 삼백 만원짜리 비타오백을 테제한테 건넨 뒤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잠자리 아저씨는 뒤꿈치를 들며 서 사장 어깨너머로 비타오백 박스 안에 있는 돈을 훑었다.
“뭐 오래 되진 않았고요. 스타일이 고전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원래 뭐든 원리만 알면 진짜 해답은 고전에 있거든요. 돈은 뭐 저도 정당하게 이긴 것이니 감사히 받아 가겠습니다.”
테제다운 말이었다. 적당히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도 상대가 진짜 듣고 싶은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나이가 지긋한 서 사장 입장에선 테제가 옛날 스타일의 바둑을 뒀다고 했다. 그렇다면 서 사장은 자신보다도 더 옛날 스타일의 바둑을 둔다는 테제가 도대체 얼마나 어렸을 때부터 바둑을 뒀는지 그게 궁금했을 터였다. 하지만 테제는 그런 것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원리만 파악하면 기초에서 비롯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원론적인 답변으로 돌려세웠다. 서 사장은 마른 침을 입술에 묻혔고 테제는 꾸벅 인사를 하고 나한테 가자고 손짓한 뒤 기원을 나갔다.
테제는 쏜살같이 똥차에 올라탔다. 나도 갑자기 뛰어서 차로 가는 녀석을 따라 뛰었다. 테제는 또다시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리곤 연신 들이마시고 내쉬고를 반복하다가 입을 열었다.
“야 죽을 뻔했다 인마. 저 아저씨 저거 뭐야. 아까 중반에 내가 까딱 한 수만 잘못 뒀어도 돈 날릴 뻔했어. 도미노가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 어휴.”
자신만만했던 테제의 표정은 많이 희석된 뒤였다. 나는 바둑을 잘 알지 못했으므로 그저 까딱 한 번의 실수면 아예 승패가 뒤집힐 수도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너 이렇게 쫄아 놓고는 어떻게 그렇게 아닌 척을 할 수가 있냐. 옛날부터 진짜 궁금했어.”
“아닌 척? 진짜 아닌데. 그 앞에선 진짜 아니야. 끝나니깐 돌아보고 쫀 거지. 그게 고수랑 하수 차이 아니겠냐.”
알쏭달쏭한 답변이 나왔고 원래부터 나는 제대로 된 답변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우리의 삼백 만원은 황홀했다. 테제가 아낌없이 돈을 쓰고 놀자고 했으므로 그 돈은 우리의 돈이었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이 뭐냐고 테제가 내게 물었다. 나는 무한 리필집이 아닌 유명한 고깃집에 가서 먹고 싶은 만큼 삼겹살이며 소갈비살이며 돼지껍데기며 먹고 싶다고 말했다. 어설픈 내 말을 듣고 참 소박하다고 테제가 웃었지만 내겐 식물성 단백질이 아닌 구워 먹는 동물성 단백질이 절실했다. 수험생 생활 내내 나는 고기가 먹고 싶을 때마다 무한리필 고깃집을 이따금 들렀다. 그런 곳이 무한리필인 이유는 아무래도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이란 걸 나는 다음날 화장실에서 끙끙거리고 따가워하는 내 항문을 느끼며 깨달은 지 오래였다.
소주가 몇 잔 돌았고 몇 마디가 오가자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가사처럼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테제 말을 들어보면 그랬다. 테제는 그 성격 그대로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다. 번듯한 직장에 갑갑함을 느껴 두 달 만에 집어던지고 나온 뒤였다. 그런 그에게 진정으로 남은 사회 친구는 없었다. 사회의 인간관계는 대학 시절처럼 테제의 독특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주면 테제의 개성이 큰 역량을 발휘할 것이 분명해도 그들은 테제를 뜨내기 근로자 이상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테제는 그저 그런 일자리를 당연히 떠났고 그는 원점에서 늘 홀로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수험생 생활이란 게 원칙적으로 간절함과 초연함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거였다. 이번엔 되겠지. 이번엔 준비 많이 했어. 이런 식의 긍정이 오가다가도 지독한 경쟁률을 마주하면 간절함이 극에 달한 불안함으로 전이되었다. 급기야 소갈비살 전문점을 지나 무한리필 고깃집 앞을 서성이는 것과 같은 초연함이 필요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런 찰나에 우리는 지금 여기서 다시 만나 서로를 쓰다듬어 주는 중이었다. 테제의 똥차는 우리에게 지금 여기 다시 만난 만남의 광장이었다. 테제가 승리한 기원의 바둑판 앞은 실탄이 두둑이 장전된 무기고 같은 곳이었다. 총알이 가득 든 장총을 받았으니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그야말로 먹고 마시고 쉬고 뒤돌아볼 것 없이 똥차와 함께 달렸다.
“오케이. 이제 물올랐어. 큰판으로 한판 먹고 이 짓도 끝이다.”
전날 마신 소주가 아침까지 돌고 있을 때 테제가 스마트폰 메시지를 보며 꺼낸 말이었다. 우리는 바둑판 앞에서 떠난 지 보름이 다 되도록 명확한 거처 없이 지냈다. 하루는 이 호텔에서 머물고 또 하루는 저 호텔에서 머무는 식이었다. 똥차를 몰고 남으로 가다가 흥얼거리던 노래가 바뀌면 좌회전해서 동쪽으로 가곤 했다. 아무렴 어떨까. 스마트폰과 돈이면 거의 모든 의식주가 해결 가능하니 무리도 아니었다. 디지털 노마드란 이런 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한 번 크게 벌고 이제 끝낸다. 도와줄 수 있지? 별 거 없어. 난 또 이 위대한 승부에서 이길 거니까.”
테제는 격양돼 있었다. 한 번 크게 번다는 것과 도와달라는 것에서 나는 테제가 또 다시 내기 바둑을 펼치는데 그사이에서 내 역할이 하나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나쁠 것 없었다. 우리는 언젠간 제자리로 돌아가겠지만 보름의 시간은 어쩐지 짧았다. 테제는 호텔 베란다에서 먼 바다를 쳐다보며 막춤을 췄고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며 웃었다.
테제가 설명한 위대한 승부와 시나리오는 간단했다. 기원 아저씨가 소개해준 바둑 도박 사이트에 접속해 그곳이 자랑하는 초고수와 맞붙는 것이었다. 기원 아저씨는 이 판을 성사시키면 얼마의 인센티브를 받았다. 도박 사이트는 도박 사이트대로 관전자 입장료를 모으는 식이었다. 특히 그들 사이트가 홍보가 되면서 향후 더 많은 수익을 챙길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둔 듯했다. 늘 그렇듯 도박의 말로는 도박판을 만들어준 곳만 해피엔딩이었다. 손님이 많을수록 돈은 돌고 돌다가 결국 카지노만 부자가 되는 것과 같았다. 테제는 이런 제안을 반복해서 받았지만 그때마다 생각해보겠다며 버텼다. 일종의 튕기는 수법이었다. 테제의 협상 전략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리 수당은 원하는 액수까지 치솟았다. 자그마치 십억이었다. 십억이 어떤 돈인가. 아파트를 사고 차를 사고 얼마간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며 먹지 않아도 배가 두둑한 돈일 것이었다. 테제는 그렇게까지 버티고 버텨 비로소 액수를 끌어올렸다.
“십억이야. 십억이란 돈이 생긴다는 것 생각해 본 적 있어?”
좀처럼 격양되지 않는 테제도 이 승부가 성사되자 짐짓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문제는 상대였다.
“상대가 누군데? 십억이라는 판돈이 걸릴 정도면 엄청난 사람일 거 아냐?”
나는 제발 상대방 따윈 아무것도 아니며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테제가 말해주길 바랐다.
“상대 이름은 황해래. 황해라는 것밖엔 몰라. 기원 사장 말로는 이 사이트에서 초고수로 유명하다는데 사실은 프로 바둑기사가 차명 아이디로 활동하고 있다는 설도 있고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라는 얘기도 있고.”
내 기대감은 한풀 꺾였다. 아마 표정에서도 드러났을 거였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그렇게 엄청난 상대면 질 수도 있잖아. 그냥 사이좋게 뒤로 협상해서 한 사람이 이기는 거로 하고 오억씩 나눠가지면 안 돼?”
내 말을 들은 테제가 웃었다. 제법이라는 뜻으로 읽혔다.
“애초 이런 판에선 그런 게 성립 불가능해. 황해가 정말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증거도 없어. 도박 사이트랑 연관된 인물일 수도 있고. 특히나 우리가 이상한 수를 두거나 하면 바로 의심을 받아. 몇 년 전이었나. 이렇게 비슷한 판이 벌어졌는데 대국하던 둘이 담합한 게 결국 들켜서 소리 소문도 없이 어디 생매장됐다는 소문도 있어.”
내 기대가 산산조각나는 소리였다. 무려 프로 바둑기사라니. 어쩌면 이미 도박 사이트가 섭외한 인물일 수도 있다니. 아예 담합은 불가능에 가깝고 오억원이라도 챙기려고 수를 썼다간 목이 날아갈 처지였다. 이제 기대는 테제가 제발 이길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뿐이었다.
“너 지금 내가 질 것 같다고 생각하는구나?”
테제가 정곡을 찔러왔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말을 더 이어가라는 식으로 침묵했다.
“잘 들어. 우리가 몇 년 만에 만나서 네가 감을 잃은 것 같은데 나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내가 애초에 판돈을 왜 올렸겠어. 황해라고? 그래봤자 인터넷 도박 사이트에서 두는 사람일뿐이야. 프로기사라고? 그럴 리가. 쟤들 운영자들이 위치추적부터 온갖 추적을 다 할 텐데 프로가 왜 거기 끼어. 그냥 바둑 잘 두는 협잡꾼이거나 쟤들이 고수 중에 캐스팅해서 아이디 준 졸개일 거야. 쫄 필요 없어. 이미 나는 계산 끝났고 안전하게 승리 수당 받는 것 외에 큰 숙제는 없어.”
기대했던 답은 이렇게 제일 늦게 나왔고 나는 어서 빨리 내가 도와줘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래야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것 아닌가.
“그래서 내가 뭘 도와야 하는데? 우리 십억 타면 나도 좀 가질 정도의 일이야?”
내 웃음에 테제는 당연하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해. 차를 몰고 계속 달려. 최대한 지방 도로에서 움직여야 해. 그래야 안 막혀서 속도 좀 낼 수 있지. 아마도 쟤네는 실시간으로 내 스마트폰 위치추적을 할 거야. 잘못했다가 잡히면 나는 쟤들의 협박 속에서 꼼짝없이 시키는 대로 둬야 할지도 몰라. 온라인이니까 아무도 내가 협박 대국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지. 그러면 쟤들이 정말로 황해한테 십억을 주는지 알 수도 없고 쟤네는 앉아서 꿩 먹고 알 먹으니까. 그걸 조심해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위치추적 피하게 무조건 계속해서 달리라고? 잡히지 않게?”
“계속 달려. 그리고 대국이 끝나는 순간 모두가 내 승리를 지켜볼 거니까 승리는 입증 될 거야. 결국 우리 손에 돈이 들어오는 건 맞아.”
선명해졌다. 어렸을 때 본 스릴러 영화도 떠올랐다. 스피드였나? 제한 속도 이하로 달리면 폭탄이 터지는 차가 나오는 영화였다. 근데 그 영화가 어떻게 됐더라. 어쨌든 테제의 ‘우리’라는 말이 내겐 촉매제였다. 나는 추적을 따돌리며 똥차를 몰고 그 안에서 테제는 고도의 집중력으로 온라인 바둑을 두는 장면이 그려졌다. 물리적 폭력과 도망 사이에서 두뇌 활동을 한다는 건 묘한 쾌감마저 일으켰다. 원래 두 집단이 싸우면 최상위층은 항상 두뇌 활동으로 멋진 전략을 쏟아내지 않던가.
“똥차를 가져온 것도 그런 이유야?”
“그렇지. 다 타고 버려야만 하는 차가 좋을 필요는 없어.”
결국 전부 계획된 거였다. 그런데 테제는 왜 하필 나를 찾아왔을까. 궁금증이 샘솟았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테제의 화법을 보면 답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정도나 “친구니까” 정도의 답이 돌아볼 게 뻔했다.
십억이 걸린 대국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테제와 나는 전날 전주의 한 호텔에서 잤다. 이곳에서 사방으로 돌아다닐 터였다. 약속한 오전 아홉시에 테제는 기원 아저씨가 알려준 사이트로 접속했다. 이윽고 운영자한테서 날아온 쪽지로 테제는 대국 방에 입장했다. 구경꾼들로 보이는 수백개의 아이디들이 들어와 있었다. 얼마 뒤 아이디 ‘황해’가 입장했다. 황해의 등장과 동시에 채팅창은 구경꾼들이 저마다 내뱉는 말들로 가득 찼다. 운영자는 십분 뒤에 대국을 시작하겠다는 공지를 띄웠다. 나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테제는 지금부터 무조건 차를 멈추지 말고 어디로든 달리라고 했다. 이런 사이트를 운영하는 녀석들을 만만히 봐선 안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테제는 그 어느 때보다 진중했다.
“그런데 돈은 어떻게 받아?”
“그것도 얘기 끝났어. 내가 원하는 장소만 말하면 돼. 그러면 쟤들이 돈을 두고 갈 거야. 허름한 주택가 한쪽으로 얘기하려고 해. 십억이면 오만원권으로 사과박스 하나거든. 우린 그 근처에 있다가 순식간에 돈 뒀다는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박스 챙겨야지.”
“그게 다야? 간단한데?”
“꼭 그렇지는 않아. 물론 녀석들은 돈을 줬다는 인증샷을 찍어서 사이트에 올리는 식으로 이것이 사기가 아님을 입증하겠지. 그래야 저들 사이에서 또 다른 황해나 아니면 나처럼 큰 판에 뛸 수 있는 자격을 위해 목숨 거는 사람들이 나오니까. 쟤들은 그 욕망을 이용해 그 이상의 돈을 벌 거고. 아마도 우리가 박스 챙기자마자 우리한테 준 돈을 뺏으려고 달려들 수도 있어. 그래서 우리는 곧바로 돈을 찾은 뒤에 사라져야 하는 거야. 그때도 너랑 나는 곧장 달리는 거야. 나는 달리면서 휴대폰 초기화해서 밖으로 버릴 거고.”
2011년이었나. 서울 여의도 백화점 10층에 있는 물품보관업체에서 현금 10억이 담긴 박스가 발견됐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있다. 그때 그 돈의 출처도 이런 것이었을까. 그 돈이 나중에 어디로 갔다는 얘기는 게을러서 찾아보지 않았다. 내 귀에까지 쉽게 들리지 않은 거로 봐서는 크게 보도되지도 않은 모양이다.
십 분이 지났다. 테제의 위대한 승부가 시작됐다. 나는 전주역 앞에서 대구역으로 내비게이션을 찍고 차를 몰았다. 도착 전에 대국이 끝나면 좋을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대구면 교통이 좋아 어디로든 또다시 움직이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해 내린 결론이었다. 유동 인구가 많다는 점도 우리의 안전을 위한 고려 사항이었다. 돈은 전국 어디가 됐든 하루 안이면 올 것이었다. 테제 말마따나 우리가 돈을 받았다는 인증이 남아야만 이 판을 벌인 저들도 더 많은 도박 꿈나무들의 욕망을 이용해 돈을 벌 것이었기에 그런 걱정은 치워뒀다.
창밖으로 가을바람이 분위기를 잡았다. 차 안엔 고도로 집중하는 테제와 십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나의 침묵만 가득했다. 테제도 십억이 정말 간절할까. 나는 ‘십억 중에 나한테 얼마나 쓰려고 이래?’라는 질문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심장은 더 쿵쾅거렸다. 내가 아는 테제는 통이 컸다. 게다가 하필 나를 찾아왔다. 내 머릿속엔 행복 회로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아갔다. ‘딱’ ‘딱’ 거리는 바둑알 놓이는 소리마다 기대와 두려움이 번졌다. 내기 바둑치고는 서로 무척이나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며 두는 듯했다. 그렇지. 무려 십억이니까. 테제는 머리카락을 꼬기도 하고 줄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창문을 열어 거친 욕을 툭툭 내던지기도 했다. 두 시간이 지났다.
“끝났다. 이겼어.”
이토록 듣고 싶었던 여섯 글자는 세상에 없었다. 테제는 웃고 있었다. 나보곤 차를 한쪽으로 세우라고 했다. 나는 대구역 앞 택시들이 서는 곳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웠다. 지금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무려 십억이었다.
“저쪽 편의점 앞에 박스들 쌓아둔 곳 보이지? 저쪽으로 쟤들한테 사진 찍어 보냈어. 정확히 5시간 뒤에 돈이 도착할 거라고 쟤들이 공지했어. 그러니까 돈 챙기는 순간 나는 핸드폰을 집어던질 거고 우린 이 차로 근처 모텔부터 가. 모텔에 가자마자 너랑 나는 트렁크에 있는 배낭 두 개에 돈을 나눠 넣는 거야. 그다음엔 뛰는 것만 남았어. 간단해. 비행기 타고 서울 올라가는 것처럼 공항으로 갔다가 따돌리고 우린 기차를 탈거야.”
테제가 트렁크에 배낭까지 준비해뒀다는 것은 일찍이 이런 판이 벌어질 것이고 결국 자신이 이길 것이란 것까지 준비해둔 거였다. 테제는 나를 찾아오기 전부터 이런 시나리오를 그렸다.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게다가 하필 나였으므로 하필 내가 챙겨야 하는 돈 액수는 더욱 커질 것이란 기대감이 들었지만 여전히 입 밖으로 물을 순 없었다. 그것은 어쩐지 긁어 부스럼이 되는 것 같았다. 테제에게 그런 속물적인 모습은 보여주기 싫다는 마음이 사실은 더 컸다. 머릿속으론 일억만 되어도 문제없다는 주판알마저 돌아갔다.
테제 말대로 되었다. 테제는 저쪽과 몇 차례 문자를 주고받았다. 정확히 5시간 뒤에 우리는 편의점 앞 박스 더미로 가서 사과박스를 챙겼다. 그때부터 우리는 뛰었다. 테재 계획대로 또 다른 모텔로 갔고 거기서 배낭을 꺼내 닥치는 대로 돈을 나눠넣었다. 옷도 갈아입었다. 우리는 공항으로 향했고 공항 화장실에서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택시로 갈아탔다. 똥차와는 그렇게 이별했다. 그리곤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에선 불안함과 떨림이 끊이지 않았다. 어디 수상한 사람이 우리를 뒤쫓지는 않나 불안해 평정심을 잃고 뒤를 자꾸만 돌아봤다. 우리는 역방향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테제도 평소 같지 않았다.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렸다. 세 번째 화장실을 다녀온 테제가 털썩 앉으며 말했다.
“우리의 모험은 여기까지. 사실 난 가볼 곳이 있어서.”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이라니. 테제는 태연히 말했고 아무리 돈을 구겨 넣었어도 공평하게 나눴으니 내가 가진 몫은 5억원쯤이 될 터였다. 칼로 자른 것이 아니니 아무렴 4억이면 어떻고 3억이면 어떨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 타이밍에 갈 곳이 있다고? 나 혼자 가라고?
“뭘 그렇게 놀래. 이쯤이면 충분히 안전해 인마. 쫄지 말라니까.”
자기도 세 번이나 화장실을 다녀온 주제에 나한테 쫄지말라고 할 처지는 아닌 듯했지만 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 그거 가방에 있는 거. 그거 다 가져. 그리고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오랜만에 만나서 우리 참 옛날만큼 재밌게 놀았다. 안 그러냐?”
나는 어쩐 일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말로 어쩐 일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았고 그 이유가 거액을 받았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확실했다. 나는 추억이란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돌아갈 수 없었던 그 시절이 이렇게 복기가 되어 방점을 찍는 것 같았다.
“대꾸 좀 해봐 인마. 곧 다시 연락할 거야. 정말로. 연락처 안 바꿀 거지? 아니다. 혹시 모르니까. 이메일 주소 하나 적어봐 여기 손바닥에.”
테제는 나한테 그 큼지막한 오른손과 함께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내밀었다. 테제는 내가 적어준 이메일 주소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SLAM-T’로 시작하는 내 이메일 주소 때문이었다. ‘슬램 티’는 우리가 함께 농구할 때 테제가 나의 노마크 슛찬스를 만들어주기 위해 짜낸 작전이었다. 테제가 “슬램 티”라고 외치면 팀원들이 약속된 움직임을 이행했고 나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완벽한 슛 찬스를 챙겼다.
“이 정도면 완벽한 슬램 티지?”
테제가 말했다. 나는 그저 웃었다.
“너 사실 내 이메일 주소 알고 있지? 나 옛날부터 그거 썼고 보통 한번 쓴 아이디가 독특하면 다 그거 쓰잖아.”
이런 상황에서 나도 애써 침착하고 남자다운 척을 했다.
“알긴 뭘. 너 찾아가기 전에 혹시 아직도 쓰나 검색은 해봤지.”
테제도 멋쩍게 웃었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마침 기차는 멈췄고 테제는 내렸다.
벌써 십 년이 지났다. 그때를 돌아봐도 여전히 의아한 건 나는 테제가 내린 역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다. 나는 테제의 뒷모습을 보며 아무래도 꾸역꾸역 추억거리들을 그러모아 회상에 잠겼었나 보다. 그 이후로 테제를 만난 적은 없다. 어쩌다 만나는 그 시절 친구들도 테제의 소식을 아는 이는 없었다. 외국으로 나갔다는 소문부터 영영 세상을 등져버렸다는 소문까지 무성했다. 나는 그 어떤 것도 믿지 않고 그만큼 다른 이들에게도 테제의 인상이 강렬했다는 것만 기억에 챙겨 넣었다. 물론 나와 테제의 ‘동거 2막’을 입밖에 낸 적도 없었다.
“안녕 테제. 여전히 그렇게 너만의 방식으로 잘 지내니. 덕분에 나는 네 돈으로 여유 있게 취업 준비도 하고 지금은 꽤 괜찮은 곳에 다녀. 당연한 수순으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살고 있어. 돈은 말이지. 돈은 정말 최소한의 것만 썼는데 나머지가 어디 있는지는 직접 오면 알려줄게. 믿어줘. 정말로 있어. 그러니까 연락 좀 줘. 오늘 따라 네가 그립네. 내 이메일 주소는 여전해.”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보며 이런 편지를 쓰는데 아내가 다가와서 테제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같은 동네에 살던 어릴 적 친구라고 둘러댔다. 아내는 이 정도로 몰래 손 편지를 쓸 정도면 첫사랑이 아니냐고 채근했다. “그럴지도 몰라”라고 나는 웃었고 일 초 만에 아내한테 등짝을 맞았다. 다행히 아내가 돈 어쩌고저쩌고 쓴 것은 못 본 듯했다. 정말로 테제는 어디 있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