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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Apr 10. 2022

(단편소설) 어둠을 살라먹는 법

아침을 사는 이들은 저녁을 모른다. 아침 기지개 켜는 이들은 해가 원래 그 자리에 있는 줄 안다. 해가 숨은 저녁은 어둡고 음습하며 생명이 저마다의 거처에서 휴식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때 그곳을 박차고 나와 움직여야만 한다. 이들은 어둠을 살라먹어야 비로소 밥을 씹는 자신의 처지를 온몸으로 체감한다. 이따금 이들은 세상을 한탄하지만 손에 잡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동시에 이들은 아침을 누리지 못한 채 살면서도 아침에서 밤으로 가는 세상의 법칙에서 끝끝내 밀려나 조용히 소멸한다. 아침이 낮을 부르듯 저녁은 밤을 부른다.


그날도 영민의 저녁 출근은 찜찜했다. 눈 뜨자마자 온몸이 욱신거렸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다. 칠년 전 수술한 어깨가 이번에도 귀신 같이 날씨를 예보했다. 커튼을 열고 창밖을 보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휴대폰을 보니 밤사이 빗줄기가 굵어져 내일 아침까지 장대비가 쏟아질 것이라는 날씨 정보가 떴다. 기상 직후 날씨를 보는 건 영민의 오랜 습관이었다. 야간 운전으로 또다른 밥벌이를 시작한 이후 그날의 판관 포청천은 날씨가 되었다. 해 뜨면 집에 들어와서 해지면 나가는 생활의 숙명은 밤하늘 마음에 따라 갈렸다.


“오늘은 좀 쉬라는지 어깨가 욱신거리네.”


곁에서 자는 아내 은주를 향해 영민이 말했다. 정말로 쉴 생각은 없었다. 그저 관심 받고 싶고 힘내라는 대꾸라도 들어보고 싶었다.


“약속한 거 벌써 잊었어? 건강이 태어나면 들어갈 돈이 한 다발이야. 나라에서 몇 푼 준다지만 당장 분유값은? 나도 일하고 싶어. 나도 일하고 싶은데 상황이 이래서 더 답답하다고.”


은주가 눈도 뜨지 않은 채 피곤하다는 듯 웅얼거렸다. 힘없는 말에선 귀찮음마저 묻어나왔다. 고개는 돌리지도 않고 벽을 본 채였다. 건강이는 영민과 은주 부부가 뒤늦게 가까스로 얻은 아이의 태명이었다.


“4번 타자, 좌익수 김영민!”

“날려버려, 날려버려, 홈. 런. 김. 영. 민.”


전광판에서 나오는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와 관중의 함성소리가 영민의 귓가를 때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성공 가도를 달리는 야구 선수의 아드레날린이 폭발했다. 매 타석 등장마다 듣지만 이따금 부담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받는 연봉에 서푼 어치도 되지 않는 귓밥 같은 거였다. 영민은 크게 심호흡하고 대기타석에서 돌리던 방망이를 멈췄다. 이제 영민의 시간이었다. 영민은 방망이를 꽉 잡고 타석까지 일부러 더 천천히 걸어나갔다. 함성은 더욱 커졌고 심장은 오히려 안정되었다. 영민은 자신이 무대체질이라고 자신했다.


영민의 머릿속엔 초등학교 시절부터 넘어온 고난의 시간이 필름처럼 돌아갔다. 야구부 합숙비를 못내 코치 눈치 보던 일, 숙소에서 자다가 불려 나가 선배한테 방망이로 엉덩이 터지도록 두드려 맞던 어느 밤, 프로 구단과 계약해 약소한 계약금으로 홀어머니 소고기 사드리던 날, 산으로 둘러싸인 2군 훈련소에서 기약 없이 허공에 스윙 연습하던 날들이 머리를 수놓았다.


9회 말 2아웃 주자 2-3루에서 팀은 4대 6으로 뒤지고 있었다. 영민의 안타 하나면 3루 주자와 2루 주자까지 들어와 경기는 6대 6 동점이 될 것이었다. 넓은 잠실구장은 우중간이든 좌중간이든 외야수 사이만 가르는 안타만 나와도 3루 주자와 2루 주자가 동시에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영민은 홈런 타자였다. 팀은 그의 ‘한 방’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영민은 홈런 개수마다 연봉 총액이 늘어나는 옵션 계약을 시즌 전에 맺었다. 지난 시즌 홈런 1위를 차지한 만큼 올해도 그 이상을 해내라는 압박이자 당근이었다. 지금 홈런이라도 터지면 점수는 순식간에 7대 6으로 뒤집어질 터였다. 3점을 순식간에 뽑는 거였다. 경기는 그걸로 끝나면서 ‘역전 굿바이 홈런’이라는 미디어 헤드라인을 뽑아낼 참이었다. 한국시리즈 마지막 7차전에 끝내기 역전 홈런은 야구계에 영민 자신의 이름을 길이 새길 역사가 분명했다.


영민은 홈팀 더그아웃 바로 위 관중석을 올려봤다. 결혼을 약속한 은주가 왼쪽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오른손으론 입을 가린 채 글썽였다. 영민이 홈런을 치고 루를 돌아 들어올 때마다 은주와 주고받는 신호였다. 팀이 원했고 은주가 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은주가 눈물을 글썽였다. 영민은 단타를 노리는 대신 큰 거 한 방을 위한 풀스윙을 다짐했다.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고 심호흡을 크게 했다.


삼구 삼진. 경기 종료.


거짓말 같았다. 순식간이었다. 귀신에라도 홀린 듯 방망이는 말을 듣지 않았다. 영민의 스윙은 무뎠고 실밥까지 꿰뚫던 눈은 투수의 변화구 궤적마저 분별하지 못했다. 조급함은 그저 그런 스윙으로 스트라이크만 연신 늘렸다. 상대 팀은 환호했다. 영민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꽉 들어찬 잠실에서 영민의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최고의 순간 영민은 결국 기회를 잡지 못한 실패자가 되었다. 다음은 없었다. 일생일대 한 번 올까 말까 한 외나무다리에서 영민은 발을 삐끗했다. 역사의 주인공이 될 기회 앞에서 영민은 맹탕이 되고 말았다. 강물에 빠진 것처럼 영민은 관중석의 은주를 바라보며 말없이 허우적댔다.


그날은 정말로 외나무다리였을까.


영민은 이후 부상을 달고 살았다. 오른쪽 어깨 인대 손상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그 부분이 말을 듣지 않았다. 홈런 타자가 장타력을 잃고 말았다. 다시금 영민은 2군을 전전했다. 재활과 복귀가 반복됐다. 이미 전성기는 끝났다는 게 야구계 평판이었다. 서른 여섯의 나이는 더는 예전처럼 ‘도전’과 ‘훈련’으로 점철될 시기가 아니었다. 영민은 소리 소문 없이 은퇴했다. 언론에선 그를 “오랜 2군 생활 끝에 반짝 빛을 봤지만 끝내 꽃 피우지 못한 타자”라고 서술했다. 어디서는 “노력형 선수의 최대 약점인 큰 경기에서 약한 면모가 다시 입증됐다”라고 혹평했다. 또 다른 곳에선 “스타란 결국 타고나는 것이며 그렇게 타고난 선수들은 아무리 부진에 빠졌다가도 결국 큰 경기에서 잘해 부활한다”면서 “영민은 이런 유형의 선수가 아니었다고” 교묘한 사례를 들어 논평했다.


영민은 은퇴 직후 구단에서 마련한 2군 타격 코치 자리를 잠깐 맡았다. 하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팀 성적이 좋으면 감독 공이 됐지만 타격이 잠깐이라도 부족하면 1군을 비롯한 2군 타격 코치의 지도 능력까지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럴 때마다 잠깐 반짝한 이력이라는 꼬리표가 영민을 둘러싸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영민이 야구계를 떠나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영민의 이름은 한국 야구계를 수놓은 천재 타자 ‘이영민’의 이름을 따서 아버지가 지어준 것이었다. 얼굴도 못보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지어준 영민의 이름은 그렇게 야구계에서 지워지고 한때 반짝한 추억으로 어둠 속에 묻혔다. 이후 덥석 시작한 영민의 사업은 줄줄이 파산했다. 해외 야구 용품을 직수입하는 업체를 차렸다가 소송에 휘말려 망했다. 동업자는 이미 투자금의 두 배 이상을 뒷돈으로 챙기고 떠난 뒤였다. 영민은 선수 에이전트 회사를 하겠다고 기웃거렸지만 그쪽은 변호사들이 꽉 잡고 있어 직원 봉급만 주다가 파산했다. 권리금을 잔뜩 주고 인수한 파스타 집은 파리만 날렸다. 프랜차이즈 빵집을 열었다가는 본사 납입금만 맞추다가 문을 닫는 사태까지 치달았다. 전부 어그러진 시장 조사로 덤볐다가 무너졌고 그럴 때마다 세상은 운동만 해서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라고 영민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애인에서 아내가 된 은주마저 세상을 모르니 당하는 것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영민의 내리막길은 끊이지 않고 펼쳐졌다. 쌓인 빚이 영민을 찍어 눌렀다. 영민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은주 말에 따라 2년 전부터 택시 운전 일을 시작했다. 더는 돌아갈 더그아웃도 흘끔흘끔 쳐다볼 관중석도 없이 외로운 야간 운전이 그렇게 펼쳐졌다. 밤은 아침보다 길었고 어둠은 밝음보다 선명했다.


세상과 야구계는 투수의 패스트볼처럼 빠르게 그를 잊었다. 평생 야구 외길만 걸은 그에게 빚 많은 마흔 네살 나이는 이도 저도 아닌 경계인으로 몰아넣는 조건이 되었다. 영민은 한국시리즈 7차전 이후 거푸 헛스윙을 하는 것처럼 살았다고 고개를 저었다. 밤은 그렇게 가까이 있었다.


“다녀올게.”


영민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출산 직후 숨을 쉬고 살기 위해선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은주는 말없이 건강이가 있는 자신의 배만 쓰다듬었다. 눈은 뜨지 않고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요즘 부쩍 반복되는 저녁 출근 풍경은 그렇게 별다를 것 없었다. 영민이 차에 타자마자 굵은 빗줄기가 창을 때렸다. 영민은 호출 신호를 기다렸다. 서울 논현동에서 경기도 김포까지 가겠다는 손님 신호가 떴다. 콜을 잡았다.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손님은 취해있었다. 몸을 못 가눌 정도는 아니었지만 손님은 뒷자리에서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영민은 콜에 찍힌 주소대로 차를 몰았다. 145km까지 속도를 냈다. 맘에 안 드는 숫자인 145로 속도를 살짝 밟았다가 돌아오는 건 영민이 가진 일종의 반감이자 혼자만의 은밀한 일탈이었다. 차가 없는 밤은 그런 짜릿함을 느끼기에 최적이었고 과속 카메라 위치는 투수의 변화구보다 예측하기 쉬웠다.


운명의 경기에서 삼구삼진을 당한 그날 전광판에 찍힌 상대 투수의 마지막 구속은 145km였다. 빠르다고 할 수 없고 느리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런 애매한 구속이었다.


‘이걸 못 쳤다니. 분명 이상했어.’


영민은 전방에 카메라가 있다는 내비게이션 울림을 받고선 액셀에서 발을 뗐다. 속도는 120km까지 줄었다.


“쿵.”


순간 뭔가가 자동차 보닛을 때리고 유리창을 넘었다. 빗줄기가 앞 유리에서 널찍이 퍼졌다가 재탕됐다. 뒷자리 손님은 계속 잠들어있었다. 본능적으로 시계를 봤다. 밤 11시 56분이 째깍거렸다. 영민은 차를 세웠다. 문을 열고 내렸다. 떨렸다. 사람만 아니길 빌었다. 차에서 내려 뒤로 걸었다. 그 시간이 꼭 한국시리즈 7차전 대기타석에서 그라운드로 나가던 때처럼 길었다. 긴장감은 그 이상이었다. 우산을 쓸 겨를도 없었다. 여자가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붉은 피가 그 여자 몸에서 흘러나와 웅덩이에서 장대비와 뒤엉켰다. 피가 여자 등을 적시면 장대비가 주변을 재빨리 씻는 공포 영화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영민은 여자의 코에 손가락을 갔다 댔다. 그 어떤 바람도 인기척도 없었다. 무수한 장대비가 쏟아졌다. 영민의 머리카락에선 물만 뚝뚝 떨어졌다.


‘망할. 망할. 망할.’


영민은 타석에 주저앉아 은주를 쳐다봤던 그날처럼 쓰러진 여자를 내려다봤다. 허무함이 번졌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였을까. 그때 방망이에 공을 맞췄다면 여기까지 오진 않았겠지. 아니야. 어깨부상부터 문제가 있었어. 그때라도 재기는 충분히 할 수 있었지. 아니야. 그것도 아니야. 모든 것이 그대로였더라도 오 년만 더 젊었으면 다시 도전할 수 있었어. 2군에서 보낸 생활이 너무 길었어. 그날 이후 수십 번도 더 되돌렸던 회로들이 필름처럼 영민의 머릿속에서 돌아갔다.


“쿵.”


이번엔 영민이었다. 온몸이 붕 떴다. 마지막 헛스윙을 했을 때처럼 잔뜩 힘 들어갔던 몸이 허공에서 맥없이 흩어졌다. 영민은 손가락 끝까지 저릿함을 느꼈다. 방망이에 축약됐던 몸이 사방으로 돌아가던 그날 삼구삼진 같았다. 꽉 막혀있던 혈류가 온몸에 급히 도는 느낌이었다. 곧 깊은 잠에 빠질 것 같은 나른함이 몰려왔다. 뒤통수가 바닥에 닿는 기분이 들었을 때 영민의 눈엔 반짝이는 휴대폰 액정 화면이 들어왔다. 열리기만해도 통화 수신이 되는 폴더폰은 저쪽 목소리를 전했다.


“축하합니다. 태명 건강이. 어여쁜 공주님으로 8월 3일 00시 3분 3.1kg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빠 닮았나 봐요. 눈이 아주 크네요. 산모도 건강하십니다. 축하드립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렇게 되어선 안 되는데. 또 헛스윙은 잔인한데. 영민은 빗줄기에 씻겨 내려가는 자신의 피를 보며 생각했다. 온몸이 뜨거웠다. 그토록 지리멸렬했던 몇 년이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남겨질 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도 남아야 하는데. ‘그래도 하루가 지났네. 다행이야. 아빠 제삿날과 딸 생일이 같으면 안 되지. 미안해. 건강아. 진짜 이름은 엄마한테 부탁할게. 아빠는 또 헛스윙한 거야. 아빠는 또 아웃을 당했어. 145km에 또 당해버린 거야.’




“아빠. 아빠 빨리 일어나. 아직도 자고 있으면 어떡해.”

희영이 목소리 톤을 높였다.


“코끼리 열차 타러 가기로 했잖아. 아빠 일어나.”

이제 막 유치원에 다니는 희영이 요즘 빠진 것은 서울랜드에 있는 코끼리 열차였다.


“코끼리 열차 타고 핫도그도 사줘. 약속했잖아. 빨리 일어나.”


희영이 연훈을 흔들었다. 연훈은 졸린 눈을 겨우 부비고 벽에 걸린 시계부터 봤다. 희영이 요즘 한창 시계 보는 법을 배우고 있어서 숫자마다 5분 단위를 적은 견출지가 붙어있었다. 은주가 붙여놓은 것이었다. 연훈은 토요일 아침 9시에 희영과 서울랜드에 가기로 약속한 것을 뒤늦게 어렴풋이 기억했다. 시계는 10시 5분을 가리켰다. 연훈은 연일 이어지는 야근에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과 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다.


“아빠 10시 5분 맞지? 나 시계 볼 줄 알아. 빨리 일어나.”

겨우 몸만 반쯤 일으킨 연훈을 희영이 조막막한 손으로 등부터 추켜올렸다. 연훈은 희영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아서 온몸을 품속에 안았다.


“네가 뭐가 못 났는데? 도대체 뭐가 모자라고 팔푼이여서 애 딸린 여자한테 가야 하는 건데? 동네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들 수가 없어.”


연훈은 결혼식 당일까지도 눈을 흘기며 자신의 옆구리를 꼬집은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연훈의 엄마는 아들 가진 시어머니 노릇은 귀신 같이 하면서도 여전히 은주한테는 쌀쌀맞았다. 같은 회사에 다니긴 했어도 인사팀에서 근무하는 연훈과 영업팀에서 근무하는 은주가 만날 일은 없었다. 회사의 온갖 살림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관리하는 실세 중에 실세가 연훈이 속한 인사팀이었다. 그와 반대로 말만 영업팀으로 묶여있지 그 안에서도 비정규직에다가 사실상 주부들이 잠깐잠깐 거쳐 가며 일하는 곳이 은주가 속한 이른바 콜센터팀이었다. 콜센터팀은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로 점쳐진 자리를 고스란히 내보이듯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이름으로 영업팀 안에 비공식적으로 있었다.


“연 차장이 가서 좀 해결해야겠어. 도대체 왜 자꾸 민원 전화가 들어오는 거야. 콜센터 놈들은 저런 거 하나 해결 못하고 도대체가 뭐하는 인간들이야.”


인사팀 박 부장이 연훈을 불러 해결하라고 한 것은 민원이 비등하는 직원을 적당히 정리하라는 거였다. 불친절 민원이 폭발하는 계약직을 처리하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그 안에는 이런 일쯤은 차장 나부랭이가 하기에도 얄팍한 일이지만 반대로 인사팀이 나서야 할 만큼 해당 직원이 버팅기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연훈이 지시를 받고 콜센터에 갔을 때 은주는 헤드셋으로 두 귀를 막고 키보드 숫자번호를 연신 돌리며 전화를 받고 있었다. 콜센터 층에선 인사팀 차장 정도만 떠도 직원들이 벌벌 떨었다. 연훈의 얼굴을 아는 콜센터 팀장은 방에서 나와 연신 입맛만 다시면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황은주 씨죠? 잠시 면담 시간 좀 가질 수 있을까요?”


그렇게 시작된 연훈과 면담 앞에서 은주는 펑펑 울었다. 얼마 전 딸아이가 태어났고 산후조리원은커녕 당장의 분유값도 없어 복대까지 차고 몸도 못푼 채 회사에 다닌다는 말이 면담실을 꽉 채웠다.


“아이 아버지는 불의의 사고로 떠났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손발이 떨려요.”


이렇게 시작된 은주의 설명은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생존 발악이었다. 무일푼에 고아인 자신은 콜센터를 떠나는 순간 죽을 수밖에 없다. 이런 절박한 심정이 어느 순간 갑질 하는 고객들한테 스트레스를 이유로 폭발한 것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거리에 내몰려 죽어야 하는 상황까지 가야 할 정도로 세상이 각박한가. 다시는 네 그렇습니다. 고객님 많이 불편하셨겠어요. 따위의 말 외에는 불필요한 언행을 하지 않겠다. 그래도 기회를 못 주시겠느냐. 은주의 토로는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연훈은 은주의 말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연훈이 태어나서 막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어머니 말로 아버지는 평생 도박 빚에 시달리다가 객사한 천하의 후레자식이었다. 인물 좋고 머리 좋고 사람 좋았지만 그것은 밖에서나 가당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연훈을 미국 유학까지 보내며 뒷바라지했다. 어머니는 국숫집에서 국수를 날랐다. 떡집에서는 떡을 뽑고 전단지를 돌렸다. 고시촌에서는 길거리에서 김밥을 팔았다. 비정규직 없는 시대라서 가능했다. 가게 주인이나 도매상과 정만 잘붙이면 살살거리면서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과거와 앞에 앉은 은주의 눈물이 상념 속에서 땅거미처럼 짙게 깔렸다.


“황은주 씨는 딱 한 달만 더 두고 보기로 했습니다. 사정이 너무 딱하더라고요. 대신에 그 안에 또다시 민원이 빗발치면 그때는 시키시지 않으셔도 제가 먼저 달려가서 조용히 내보내겠습니다.”


인사팀 사무실로 돌아온 연훈은 부장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민원이 빗발치면’이란 말은 사실 두루뭉술한 것이었다. 부장은 전자담배만 피워대며 아무말없이 나가라는 식으로 연훈에게 손짓했다. ‘민원이 빗발치면’이라는 전제 조건은 명백한 고객 과실인데도 콜센터 직원에게 괜한 트집을 잡으며 민원이 들어오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인 이런 규정은 누구든 내보낼 수 있지만 누구든 내보내지 않을 수도 있는 경계에 있었다. 연훈은 자신이 그 심판대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로는 우연의 연속이었다. 출퇴근길에 연훈은 은주와 마주치는 일이 잦았고 둘은 가볍게 인사하는 사이까지 됐다. 연훈 입장에선 그 전에 은주를 마주쳤는지 안 마주쳤는지도 모를 정도로 신경 쓰지 않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날 이후 둘 사이에 비밀을 공유했다는 것만으로도 연훈에겐 은주가 눈에 띄었다. 어쩌면 자주 마주친 것이 아니라 이제야 알아본 것일 수도 있었다.


“요즘은 민원 빗발친다는 얘기가 없던데요.”

“말씀드린대로 매뉴얼에 있는 얘기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그런가 봐요.”


둘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진전되었다. 결국 연훈이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하면서 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연훈은 딸을 혼자 키우고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얼굴에 그늘 한 점 없는 은주에게 끌렸다. 둘은 교제한 지 일 년 여 만에 결혼을 결심했고 둘 사이에 있는 딸 희영의 이름은 연훈의 성을 따서 연희영이 되었다.


연훈과 은주의 가정은 단란했고 찬란했다. 외아들로 자란 연훈은 결혼과 동시에 예쁜 딸이 생긴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은주에게 수십번 말했다. 연훈이 보기에 은주는 태어날 때부터 귀티나는 외모를 타고났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어 꾸몄더니 군살 하나 없는 몸매에 단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우리 아이 하나 더 가지면 안 돼?”

“아이는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고 싶어. 당신도 희영이 끔찍이 아끼잖아.”


“그렇지만 혼자는 너무 외로워.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둘 다 혼자였잖아.”


“혼자여도 외롭지 않을 수 있고 혼자가 아니어도 외로울 수 있어. 고아원에서 바글바글 지내면 외롭지 않을 것 같아? 아니야. 더 외로워.”


이따금 분위기 좋은 곳에서 외식할 때면 둘의 대화 막판에 이 주제는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그때마다 은주의 대답도 한결 같았다. 연훈은 매번 아쉬움이 끌어 올라왔지만 완곡하게 거절하는 은주의 태도 앞에서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은주가 고아원 시절 얘기까지 꺼내는 것은 더는 대화를 이어갔다간 이성적인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걸 뜻했다. 너무 깊이 팬 상처는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덮고 가는 것이라고 언젠가 은주는 연훈에게 울며불며 소리쳤다.


“아빠. 다음 거 타자. 이건 사람 많아. 나 앞에 타고 싶단 말이야.”

“그래. 아빠가 아저씨한테 말할게. 우리 다음 코끼리 열차 앞자리 타자.”


서울랜드에서 희영을 목마 태운 연훈은 방실방실 웃었다. 옆에 선 은주는 연훈의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단란한 가정의 황홀한 코끼리 열차 탑승이었다.


“희영이는 코끼리 열차가 왜 이렇게 좋아?”

“시원하잖아. 그리고 귀엽잖아. 코끼리가 얼마나 귀여워. 더 쌩쌩 달렸으면 좋겠어.”


연훈과 연희영은 완벽한 부녀지간이었다.




은주의 ‘이민병’이 다시 도진 것은 초복을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매년 여름만 되면 은주는 연훈에게 캐나다 근무를 신청해서 세 가족이 모두 떠나자고 말했다. 이것은 결혼했을 당시부터 이따금 나오던 얘기였는데 해가 지날수록 캐나다 이민을 요구하는 은주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삭막한 한 한국에서 더는 살기 싫어. 희영 아빠. 우리 애 데리고 캐나다로 가자. 주재원 신청하면 되잖아.”


“알았어. 다 좋은데 어머니는 어떡해. 절대 같이 가신다고는 안하시는데 어떻게 혼자 두고 가. 당신도 잘 알잖아. 우리 어머니도 달랑 나 하나야.”


올해는 은주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고 연훈도 더욱 확실히 선을 그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맞섰다. 연훈은 자신의 외벌이로도 충분히 세 식구가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은주의 데면데면한 사이가 고민스럽지만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희영이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나중에 유학을 가고 싶으면 보내주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주재원? 몇 년 나가는 거야 문제없지. 그런데 돌아올 땐? 돌아올 땐 너 혼잘 걸? 마케팅팀 김 부장 봐라. 애랑 애 엄마 본지가 이 년은 됐을 걸?”


직장 동료 얘기를 들어봐도 처음엔 주재원으로 나갔다가 결국은 혼자 한국으로 돌아와 기러기 아빠 신세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것은 홀어머니 밑에서 혼자 자란 연훈이 원하는 가족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민 가자는 은주의 이유도 그냥 한국이 싫어서 정도였다. 캐나다라고 가서 파라다이스가 펼쳐지는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연훈은 익히 알았다.


“당신 정말 한국이 싫은 거 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 나는 도저히 어머니까지 두고 갈 수가 없어. 직장 생활해서 승진하고 그런 것도 내 목표가 아닌 거 당신이 더 잘 알잖아. 그냥 희영이랑 우리 이렇게 오순도순 지내고 평범하게 살면 돼. 희영이 나중에 유학가고 싶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든 뒷바라지 할게.”


연훈의 말에 희영은 입맛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둘의 이민 대화는 주로 이렇게 끝났다.


“정말 네가 연훈이한테 캐나다 가자고 했니?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니? 너무하는 거 아니니 얘?”


“그건 그냥 저희끼리 하던 얘기예요. 저는 그저 희영이 생각에.”


“희영이만 네 딸이고 훈이는 내 아들 아니니? 우리가 어디까지 더 얘기를 해야 할까? 정말 누구는 속없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아니. 나도 너 못지않게 아등바등 애 하나 키운 거다. 애가 염치가 있어야지.”


매년 비밀처럼 부쳐지던 캐나다 토론은 어느 새 시어머니 귀에도 흘러들어갔다. 은주는 속으로 ‘등신 같은 인간’이라고 연훈을 욕했다. 자신을 죽기만큼 싫어하는 시어머니한테 캐나다 이민 운운하는 얘기가 들어갔으니 이것은 루비콘 강을 건너버린 것과 같았다. 설득은 말이 통해야 가능한 것이었고 말이 통하지 않는 설득은 사이만 멀어지게 할 뿐이었다. 은주가 보기에 자신과 시어머니 사이에 더는 멀어질 사이 따위도 애초 없었다. 그것은 시대를 뛰어넘어 자식만 바라보고 사는 모성의 또 다른 시대적응이자 변이일 뿐이었다.




8월 2일은 영민이 사고를 당한 날이었다. 하루 뒤인 8월 3일은 희영이 태어난 날이었다. 희영은 아빠를 닮아 눈이 컸고 그 눈을 볼 때마다 은주는 영민이 생각났다. 은주는 그것이 못내 싫었다. 남들은 짙은 쌍꺼플에 큰눈을 가진 희영을 보면서 예쁘다고 했다. 하지만 영민을 닮은 그 눈으로 희영이 세상을 한없이 낙관적이고 심각하지 않게 되는대로 살까봐 은주는 늘 걱정했다. 은주는 차라리 희영의 눈이 자신처럼 길게 뻗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은주가 보기에 눈이 가늘고 길면 오히려 속내를 감추기 쉬웠고 세상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 있었다. 희영의 저 둥글고 큰 눈은 영민의 나이브함을 그대로 빼다 박은 것 같았다.


“이걸 대단하다고 해도 될까요? 벌써 육 년째죠? 이 정도면 정말 살고자 하는 의자가 강하신 겁니다. 둘 사이에 아이도 없다고 하셨는데 정말 부인을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영민을 보면서 의사가 말했다. 은주가 이민을 가고 싶은 이유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영민은 살아 있었다. 영민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은주는 한국이 싫었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것에서 불안함을 느꼈다. 의사는 영민과 은주 사이에 희영이 있는 걸 몰랐다. 은주는 그런 얘길 일절 하지 않았다. 의사가 보기에 은주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며 한 달에 한 번 꼬박꼬박 충남 공주까지 면회 오는 다소곳한 여자였다. 은주는 차도 없었고 집 주소도 자주 바뀌었다. 의사가 보기에 은주의 생활도 팍팍했다. 게다가 은주는 만만치 않은 병원비도 직접 부담하면서 한 번도 비통해하거나 지치지 않았다. 의사 입장에서 둘의 사랑은 완벽했다.


“오늘은 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은주가 고용한 영민의 간병인이 말문을 열었다. 아직 연변 억양이 가시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티를 내지 않으려는 중년 여자의 말투였다. 은주는 눈치 없이 의사 앞에서 이런 얘길 꺼내는 여자가 싫어서 눈을 흘겼다. 간병인이 입을 다물었다. 의사가 나가자 은주는 보호자 의자를 간병인 앞으로 바싹 가져와 앉았다.


“제가 개인적인 얘기는 둘이 있을 때 말고는 절대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지킬 건 지켜주세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도 시간이 없어서요.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지 좀.”


은주가 핀잔을 주자 여자가 끝을 얼버무렸다.


“조금 더 기다려주세요. 아직 일 년 안 됐죠? 두 달 남았잖아요. 전에 계신 분도 일 년 넘었는데 그냥 돌아가게 되셔서 결국 제가 보너스 더 드리는 조건으로 돌아가셨어요. 일 년 넘으면 제가 그만큼 챙겨드리니깐 그땐 그냥 편히 돌아가세요. 그러니까 앞으로 제가 얘기 꺼내기 전에는 절대 먼저 말 꺼내지 마세요.”


은주가 다시 쏘아붙였다.


영민 곁에는 은주가 고용한 간병인이 늘 상주했다. 그들의 계약은 일 년 단위였다. 매달 월급을 받던 간병인은 일 년이 넘으면 은주가 약속한 성과급 명목의 보너스를 챙겨서 떠났다. 그때는 간병인 자동 교체였다. 은주와 그들이 맺은 계약 조건은 일 년 안에 결론을 내린다는 거였다. 은주가 내건 ‘결론’은 소극적 안락사였다. 은주 자신이 영민 면회를 오다가 어느 순간 “다음 주 안에 해결하세요”라고 말하고 떠나면 간병인이 영민의 호흡기를 떼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거였다. 작당모의였고 은주는 뒷감당을 할 자신이 있었다. 간병인이 매달 받는 월급은 다른 곳보다 적었다. 그러나 이런 특약 덕분에 이들은 은주가 결단 내리기만을 바라며 일 년을 채웠다. 그렇게 바뀐 간병인이 벌서 여섯 번째였다. 은주가 바라는 건 영민이 제 뜻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이었다. 혹시 몰라 그것보다 빨리 캐나다로 떠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 특약 맺은 공모자 간병인이 존재하는 거였다.


영민이 이 병원으로 옮겨진 것은 교통 사고 이후 ‘가망없다’라는 선고가 내려진 직후였다. 영민이 차로 친 여자는 현장에서 사망했지만 이후 뒤따라오던 차에 치인 영민은 살았다. 그것은 은주에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 병원 옆에는 은주가 자란 고아원이 있었다. 은주가 아는 가장 은밀하고 조용한 곳이 이 동네였다. 영민이 탄 보험금은 고스란히 병원비로 소진되었다. 이는 연훈도 희영도 모르는 은주의 외출이었다. 은주가 보기에 그것은 처리될 것이기 때문에 알릴 필요 없는 존재 가치 바닥의 문제였다.




“은주가 훔쳤다니까요. 저는 진짜 아니에요. 저는 아까 제 것만 먹었어요.”

“은주 정말로 몽쉘통통 하나 더 가져갔니? 솔직히 말해야 해. 거짓말이 더 나빠.”

“저 아니네요. 저 정말로 아닌데.”

“애들은 전부 은주가 먹었대. 은주 정말 아니야? 그럼 애들이 왜 그래?”

“모르세요? 매년 저러잖아요. 아직 여기에 일 년도 안 계셨으니까 모르죠. 매년 돌아가면서 아무나 먹었다고 한다고요. 진짜 먹은 애는 뒤에서 웃고 있겠죠.”


은주가 자란 고아원은 늘 음식이 부족했다. 정확히 말하면 음식이 부족했다기보다는 간식이 모자랐다. 아이들은 바글바글했고 그 나잇대 아이들이 손에 넣고 싶어 하는 먹거리는 간당간당했다. 크리스마스 날은 늘 후원 단체에서 보내는 몽쉘통통 파티였다. 최후의 절차는 기차가 마지막 역에 도착하듯 도둑잡기였다. 정확히 아이들 머릿수에 맞게 나온 몽쉘통통은 매번 모자랐다. 그리고 매번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작년엔 A가 훔쳐 먹은 것으로 의심되다가 올해는 B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식이었다. 그해는 은주가 지목되었다. 모든 아이들이 일제히 은주를 몽쉘통통 도둑으로 가리켰다. 은주 역시 작년에 지목된 범인이 그렇듯 발뺌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해엔 은주가 정말로 몽쉘통통을 하나 더 먹었다는 것이다. 은주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하는 것엔 내심 자신 있었다. 실제로 그해에 정말로 그걸 입증해내면서 은주는 자신감을 현실에서 저만 알게 증명했다. 그것은 성공이었다.


반대로 실패는 번식성이 강했다. 실패는 곰팡이 냄새가 났고 곰팡이는 번식이 뛰어났다. 실패는 쥐처럼 어둠을 찾았고 쥐는 번식을 잘했다. 은주는 고아원에서 자라며 그렇게 생각했다. 영민이 반짝했던 야구선수로서 삶을 막 내렸을 때 그의 삶은 이미 끝났다. 영민이 밤에 운전하는 일을 시작했을 때 은주는 더 깊은 어둠이 삶에 밀려드는 걸 느꼈다. 은주는 그때 희영만 임신하지 않았다면 영민 따위는 던져버리고 떠나고 싶었다. 은주는 실패와 어둠을 이렇게 연결지어 결론 내렸다. 이것은 실패가 가진 고유의 특성이자 어둠 속에서 번식하는 기민한 법칙이었다. 은주는 빠르게 전파하는 그런 실패의 기운이 딸인 희영에게는 전달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런 기운은 가족일수록 더 빨리 퍼졌다. 고아원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날이면 세상 떠나갈 것처럼 웃고 떠들다가도 티브이에 단란한 가족 얘기가 나오면 일순간 어두워졌다. 은주가 보기에 그들은 늘 음울한 그늘을 뿔 달린 도깨비처럼 머리통 위에 달고 다녔다. 그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한텐 그것부터 보이는 분칠 같은 거였다.


은주는 고아원의 그 기운이 싫었고 어둠을 살라먹으며 사는 그 삶에서 구린내를 느꼈다. 시작부터 평범하지 못한 환경에서 부족하게 자라야 한다는 그 기운은 곧 실패를 의미했다. 그런 낙인은 등급처럼 매겨져 도장 찍힌 것처럼 꿈에서도 나타났다. 그리하여 은주 자신은 곧 죽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버둥거렸다. 버둥거림을 위한 최고의 방법은 거짓말을 잘하는 것이었고 거짓말은 들켰을 때만 거짓말일 뿐 들키지 않았을 때엔 진실의 한 조각처럼 사실로 존재했다. 은주는 말끔한 연훈을 만나 이제는 그 어둠의 음습함을 완벽히 떨어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깨끗하고 맑은 상태를 희영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이제는 영민이 세상을 떠나야 했으며 그것은 영민이 스스로 떠나지 않은 것에 대한 은주 자신의 심판이었다. 영민이 떠난 뒤엔 은주와 희영과 연훈의 캐나다행을 막는 유일한 장애물인 시어머니도 곧장 사라져야만 했다.


“다음 주에 해결하시죠. 그런데 하나 더 추가할 사항이 있어요. 이건 소개 사무소 사람한테 조용히 전달해주세요.”


은주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간병인 앞에서 눌러왔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누워있는 영민 옆에서 하릴없이 시간이나 때우던 간병인의 얼굴엔 그제야 화색이 돌았다. 이것은 거래였다. 추가 사항이 있다는 것은 그에겐 곧 또 다른 보너스를 의미했다. 은주의 눈앞엔 캐나다가 어른거렸다. 어둠의 시절 맛봤던 몽쉘통통의 단맛이 입에 퍼졌다. 그때의 달콤함은 머리에 달린 도깨비 뿔을 걷어낼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뱃속의 건강이는 연희영이 된 지 오래였다. 거짓말은 시작되었고 끝은 진실의 조각처럼 사실이 될 터였다. 은주에게 어둠은 그렇게 살라먹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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