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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욱 Sep 01. 2020

설마요, 이건 깨끗한 쓰레기인데요

분열된 세상을 이야기하는 방법

재활용 분리수거를 할 때의 일이다. 물 닦은 키친타월을 버리고 있었는데 그걸 지켜보던 아파트 경비원이 화장지는 분리수거가 안 되니 종량제 봉투에 버리라고 했다. 나는 이게 더러운 걸 닦은 화장지가 아니라 물만 묻은 깨끗한 키친타월이라서 분리수거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벼락 같은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려! 저런 놈한테는 벌금을 받아야 해!"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허옇게 센 여자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고 일그러진 피부가 만든 주름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난 경비원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이건 더러운 휴지가 아니라 깨끗한 거라서 분리수거가 가능해요."


하지만 그 노인은 내가 대꾸한 것에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낀 것 같았다. 붉게 핏발이 선 눈을 더 크게 뜨고 증오심을 쏘아 내듯이 머리칼을 떨더니 납작하고 길쭉한 검지손가락으로 나를 찌를 듯 위협하면서 끔찍할 정도로 목청을 높여 소리 질렀다.


"너 같은 놈에겐 벌금을 물려야 해! 어디서 쓰레기를 버려, 쓰레기를!"


그 노인에겐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난 난생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 노인은 대체 누구지? 왜 갑자기 내게 소리를 지르는 거지? 내가 뭘 잘못한 거지? 그 노인은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은 채 못에 박힌 듯 그 자리에서 서서 할 말이 있으면 한번 해보라는 듯 독기로 충혈된 눈으로 계속 나를 노려보았다. 암굴에서 뛰쳐나온 악마의 군대마저도 그 노인의 기세등등한 태도에 줄행랑을 칠 것 같았다. 아니, 그 노인을 적이 아니라 자신의 동지라 착각할 것만 같았다. 문득 잘못된 소비자 고발로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었다는 소상공인들의 하소연이 떠올랐다. 인터넷 카페의 한 회원이 어느 가게에 갔다가 업주에게 맞고 욕설을 들었다는 거짓을 카페에 올렸는데, 해당 카페 회원들이 전후 사정을 알아보지도 않은 채 무작정 가게에 전화를 걸어 업주에게 심한 욕을 해댔다는 사연이었다. 그런 일을 겪은 가게 주인들은 결국 폐업하거나 가게를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난 가게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욕을 내뱉은 뒤 전화를 끊어버린다는 무리가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노인과 비슷한 부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이 노인에게 분리수거법을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갑자기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그러시면 안 되죠......"


그 노인은 내가 걸려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버티기 어려운 최고의 일격을 가했다. "어디서 따지고 들어! 넌 애비 애미도 없냐, 어! 이 천하에 없는 후레자식 같으니!"


난 마치 5백 년 전쯤의, 발푸르기스의 어두운 전설과 마녀의 혈통을 수군거려도 조금의 비웃음도 사지 않았던 신비의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난 이런 느닷없는 증오의 시선을 기껏해야 공포 영화에서나 느껴보았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실체로 나타나 내 앞에 서 있었다. 전설로만 알던 것이 벼락과 함께 내 눈앞에 떨어져 이제 내가 덤벼들기만을, 그래서 내가 자신과 함께 추악한 나락으로 떨어지기를 발작 같은 경련과 함께 고대하고 있었다. 난 물러서지 않을 참이었다. <볼숭 사가>에 나오는 영웅 시구르드가 되어 파프닐의 피를 기꺼이 뒤집어쓸 참이었다. 그런데 경비원이 날 막아섰다. 경비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내 등을 떠밀며 이제 그만 들어가라고 권유했다.


"아니, 아저씨 정말이에요. 이거 보세요. 깨끗한 타월이에요. 이건 재활용이 돼요......"


난 키친타월을 펼쳐 깨끗하다는 걸 보여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경비원은 알겠으니 얼른 들어가라며 나를 밀었다. 노인은 계속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걸어가자 술수가 통하지 않았다는 울분이 노인의 깊이 파인 미간 위에서 꿈틀거렸다.


당시 난 당황했고 이어 속에서 화가 났다. 화를 낼까 생각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화를 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마음에 병이 있는 힘없는 노인네일 뿐이었다. 살짝 밀치기만 해도 넘어지며 사소한 일에도 분노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가녀린 사람이었다. 노인은 갑작스러운 울부짖음으로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드러냈으니 난 차분히 대처하기만 해도 돋보일 터였다. 이것은 변하기 어려운 진실이었다.


그러나 그 진실은 내 관점에서나 가능한 진실이었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생각해 보라. 위협을 가했을 때 그 자리를 피하면 우리는 위협을 가한 자를 강자로, 피한 자를 약자로 본다. 피한 자가 웃으면서 태연하게 자리를 떴다고 해도 궁여지책으로 볼 뿐이다. 위협을 가한 자가 노인이면 노친네에게도 겁을 먹었다며 비웃음을 사는 판국인데 그가 문신한 건장한 사내였다면 평가가 어떠했겠는가? 자리를 피한 사람을 강자로 생각해줄 자는 어디에도 없다. 정 믿기지 않는다면 가정 폭력의 사례를 보라. 구타당하던 여자가 오른쪽에 이어 왼쪽 뺨을 내밀었을 때, 혹은 남자를 피해 잠시 방으로 도망쳤을 때, 그 행동을 두고 참 잘했다고, 당신은 참으로 강인한 사람이라고 해줄 사람은 없다. 그 여자는 좋게 봐줘야 어쩔 수 없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한 사람이고, 나쁘게 보면 당하는 게 싼 미련한 낙천주의자이며, 중간자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맞고 사는 불쌍한 인간일 뿐이다.


우리는 도덕을 강조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 도덕적 이상향이 착한 사람들을 얼마나 궁지로 몰아넣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내가 상대보다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지적으로 뛰어나며 정서적으로 안정적이라고 해도 쉴 새 없는 저주의 말을 듣고 있으면 기분이 언짢아지게 된다. 그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비난받더라도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오래도록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한 도덕적 가르침은 우리가 떳떳하면 비난의 말을 들어도 기분 나쁠 게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명 좋은 교훈이었다. 하지만 이 가르침은 선한 자뿐만 아니라 악당들에게도 유용했다. 악당들은 곧 이렇게 주장했다.


"내가 욕설을 퍼부어도 너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면 넌 기분 나쁘지 않아야 한다. 기분이 나쁘다면 네게 켕기는 게 있다는 증거다."


이것은 중세 마녀재판에서 선악을 판별하던 방식과 다를 게 없었다.


"이제 너의 손발을 묶어 물에 던질 것인데 네게 아무런 죄가 없다면 물에 가라앉을 것이다. 네가 부정하다면 물이 널 거부하여 물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인데 이는 네게 죄가 있다는 증거다."


이런 방법으로 심판대에 오른 여자들은 숨을 참지 못해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가 마녀라는 이름으로 화형을 당하거나 물속에서 숨을 거둬 그의 자녀가 마녀의 자식이라는 돌팔매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불타는 조약돌 위를 걸었을 때 고통을 느끼면 마녀라는 주장은 정신 나간 소리였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를 진지하게 믿었으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마녀로 몰릴까 봐 입을 다물었다. 지금 다시 그런 시대가 도래했으니 우리가 언제나 우리 편이 되어 줄 것만 같은 패거리에 합류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게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쳤던 노인도 그를 감싸주는 공동체로 돌아갔을 것이다.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어. 네가 참아.' 나 역시 나를 무조건 감싸주는 공동체가 있어야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많이 참았네. 나한테 걸렸으면 그 틀딱이랑 경찰서까지 갔다.' 이런 '썰'이 인터넷에 퍼지며 사람들의 자극을 돋우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니 괜찮다. 분노 표출이 당연한 권리이자 흥행 수단이 된 세상에서 주눅 들지 않는 건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정부와 인터넷 업체는 불미스러운 일을 막고자 인터넷 댓글 이력을 공개하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돌아가는 현실을 잘 모르는 듯하다. 이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 난 상태라 댓글 이력을 공개하더라도 '그까짓 거 해볼 테면 해보라.' 하는 반응을 보일 테다. 고대와 중세의 악마는 자신을 비현실적인 형상으로 묘사하여 다른 세계의 존재처럼 보이고자 애썼지만, 오늘날의 악마는 인간처럼 세속화되었다. 그는 인간의 형상을 한 채 그의 분노를 터트려 줄 미세한 자극을 기다리며 인터넷 네트워크를 떠돌고 있다.


이런 현실에 이르면 예수 그리스도가 했던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문장 하나만으로도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박애의 지평을 열었다. 그런데 십자가 아래에서 울고 있던 자들은 평범한, 그리고 착한 사람이었다. 이 착한 사람들은 모욕을 당해도 상대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인간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자비심을 내비치며 전지전능한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자신을 구원해줄 때까지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인내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너무 길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제 손으로 그 시간을 단축하고 말았다. 그러자 현세의 이단심문관이 나타나 마침내 그의 죄가 증명되었다며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아무래도 경비원 아저씨의 생각이 옳았던 것 같다. 깨끗한 물을 닦았든 뭘 닦았든 폐기물로 취급하는 게 속 편한 것들이 있었다. 난 깨끗한 키친타월을, 폐기물들을 종량제 봉투에 담아 버렸다. 이 회생 불가능한 쓰레기들은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화형 의식을 선보이며 소각 더미 사이에서 뜨겁게 타올랐고, 난 불기둥 주위를 뛰어다니며 끓어오르는 흥분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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