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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욱 Jul 30. 2020

나를 알리면서 나를 알지 못하게 하는 방법

누구에게나 자신을 알리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이런 욕구는 사회화 과정의 산물로, 배고픔이나 성욕 같은 자연적인 충동과는 달리 개인차가 있다.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는 오래 살 수 있지만 명성이 없는 삶보다는 단명하지만 명성을 얻는 삶을 선택했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다. 널리 알려지고자 한다면 그만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아킬레우스에게 주어졌던 단 두 개의 선택지는 그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소박한 평판을 원하는 사람도 있다. 명성에 따르는 위험은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은자처럼 살 수도 없으니 그 중간을 택하는 것이다. 혹자는 그에게 왜 처음부터 원대한 꿈을 꾸지 않느냐고 나무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좋은 점이 있다. 우선 나르시시즘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고로 우리는 잘난 체하는 자들을 경멸해 왔다. <그리스 신화>만 봐도 그렇다. 사실상 <그리스 신화>는 교만한 인간에게 벌을 내리는 신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최악의 상황을 면할 수 있다.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 실격>에서 자기애가 강했던 아이들이 얼마나 쉽게 나락으로 떨어지는지 잘 드러낸 바 있다. 마지막으로, 비밀이 지닌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다. 장 그르니에가 <섬>에서 말한 바대로, 담장 너머에 있어 보이지 않는 꽃의 향기는 아름다움을 상상케 하는 훌륭한 요소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라고 했던 그의 말은 분명 진리에 가깝다. 그럼 어떻게 해야 소박한 평판을 얻을 수 있을까? 시작은 나를 알리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알려져야 평판도 생긴다. 다만 소박한 시민들은 타인에게 나를 알리면서도 나를 알지 못하게 하길 원했다. 자신에 관해 너무 많이 떠들면 자기애가 강하다거나 명예욕이 있다는 식의 오해를 살 수 있었다. 나를 말하면서도 나를 알지 못하게 한다? 그때 사람들은 '백문백답'을 떠올렸다.


백문백답은 문자 그대로 100가지 질문에 100가지 답을 하는 것으로, 모든 항목이 작성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묻고 있다. 그래서 100가지 질문에  100가지 답을 적어 인터넷 어딘가에 올려두면 누군가 그걸 읽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어째서 이런 방식이 유용한가. 일단 양으로 독자를 제압할 수가 있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글자 수가 많은 글을 읽으면 ‘스크롤의 압박’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세 줄 요약'을 찾게 되었는데, 바로 그런 특성을 이용한다. 우리가 본문보다 댓글을 더 사랑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댓글이란 대체로 세 줄을 넘어가는 법이 없어서 우리는 댓글을 읽을 때마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독서를 했다는 느낌, 마치 다독왕이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힐 수 있다. 요즘 같은 바쁜 시대에 그런 효과가 주는 심리적 위안은 치료 행위에 가깝다. 그런데 백문백답처럼 100가지나 되는 아주 긴 질문 글은 그런 미덕에 어긋난다. 그래서 우리는 백문백답의 제일 윗부분에 자리하기 마련인 ‘이름’, ‘성별’, ‘나이’ 정도까지만 읽고 더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그 덕분에 자신에 관해 100가지나 적어 두었음에도 실은 단 몇 가지만 독자에게 알리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왜 문답의 제목이 천편일률적으로 ‘백문백답’인지 알 수 있다. ‘질문에 답하기’ 혹은 ‘나는 누구인가’ 따위의 제목을 달면 남은 항목의 개수가 얼마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독자가 본문을 모두 읽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런데 독자 중에 끈기가 있어서, 혹은 백문백답을 올린 인물에 아주 관심이 많아서 100가지나 되는 항목을 모두 읽어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대목에서 백문백답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난다. 백문백답을 해보거나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백문백답에선 절대 이런 걸 묻지 않는다. "성별 할당제에 찬성하십니까?" "유명인사는 유명하기에 유명한 사람일 뿐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십니까?" "가난을 오직 개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질문은 고리타분하고 공리주의적 즐거움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데가 있어 위험하다. 특히 요즘처럼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그런 질문에 더욱 거리를 두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의도와 반대로 명성ㅡ악명도 명성이라면ㅡ을 떨칠 수 있다. 그렇기에 백문백답은 이런 질문으로 채워져 있다. "어떤 색을 좋아하세요?" "당구를 칩니까? 치면 얼마나?" "애인은 있나요?" "노래방에 한 번 가면 얼마나 오래 부르나요?"  "몸무게는? (솔직하게)" 100개의 답변을 다 읽은 독자는 아마 매우 많은 것, 무려 100가지나 되는 것들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백문백답 작성자는 독자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셈이다. 그건 내 신체검사표를 읽은 사람이 "나는 너를 잘 알아."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 그리고 내가 쿠엔틴 타란티노의 프로필을 꿰고 있음에도 감히 그를 안다고 말하지 않는 이유와 같다. 결국 작성자는 상대방에게 자신을 알리면서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알리지 않은 효과를 누리게 된다.


그렇기에 백문백답을 억눌린 개인이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창이자 아름다운 비밀을 간직할 수 있게 해주는 보물상자이며 우리를 잇게 해주는 중요한 징검다리로 볼 수 있다. 또 백문백답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전적인 명제에서 가볍게 탈피할 수 있게 해 주고, 단순한 물음에 답만 하면 되기 때문에 자신을 설명할 때 흔히 겪는 거짓말과 정체성 혼란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 그렇기에 백문백답은 갈수록 소외되어가는 개인의 불안정한 욕구를 해소해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만일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이 백문백답을 소홀히 다룬다면 역사의 이음표가 될 수도 있는 중요한 주제 하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런 훌륭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백문백답은 개인의 고독을 키우는 데 더 큰 작용을 할 때가 있었다. 문답은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더 많은 문답으로 자신의 일부를 드러내려 시도했지만, 양산되는 문답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내용은 더 쉽게 잊혔다. 이런 상실은 고독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어렵게 작성한 글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지워버리곤 했다. 그럼에도 백문백답은 살아남았다. 이제 익명의 대상자를 벗어나 연인들끼리, 친구들끼리 백문백답을 주고받는다.


결국 문답을 작성하고 타인이 볼 수 있도록 인터넷 어딘가에 올려두기까지 했으나 자신의 고독은 거의 해결되지 않았다는 불안감, 혹은 문답을 읽고 나면 글쓴이와 더욱 멀어진 듯한 거리감을 백문백답의 매력 중 하나로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저녁에 노을이 어떻게 지는지를 알면서도 매번 그 광경에 감탄하는 것처럼, 파도가 어떻게 치고 바닷빛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잘 알면서도 매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 닮은 듯하면서도 닮지 않은 모습에서,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서로를 경계하고 안도하며 그리워했다. 알다시피 바다를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더라도 폭풍우 치는 바다까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두 눈으로 직접 보고자 하는 사람조차 없다. 그런데 삶의 문제는 대개 그 폭풍우에서 오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에 거리를 둔다. 백문백답이 주는 모호한 거리에 매혹을 느끼듯이.


어쨌거나 백문백답은 진지함을 거부한다. 우리는 그 산뜻함을 즐긴다. 그러니 그 사이의 문제는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의 몫으로 놓아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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