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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욱 Jul 08. 2020

일단 들어보세요

오늘날의 논리적 믿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얼마 전 검도를 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큰 손해를 보고 말았다. 비싼 가격을 주고 산 죽도, 그러니까 검도를 할 때 사용하는 대나무로 만든 무기가 운동을 하던 중 모두 부러져버린 것이다. 보통의 것보다 두 배는 더 비싸게 주고 산 죽도가 구매한 지 한 달 만에 못 쓰게 되어버리자 난 큰 상심에 빠졌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인터넷을 열심히 검색해본 결과, 죽도에 기름을 바르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되었다. 죽도에 바르는 죽도유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바르면 죽도를 오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죽도유를 인터넷으로 구매한 뒤 죽도에 발라보았는데, 과연 죽도에서 영롱한 빛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 이젠 죽도를 몇 년은 너끈히 쓸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마침 그때 나와 똑같은 고민에 빠져 있던 검도 후배 한 명이 검도장 근처 카페에서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죽도가 자꾸 부러지고 갈라져서 없는 처지에 골치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나는 죽도에 죽도유를 바르지 않아 그렇게 되었다며 그에게 충고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전 그냥 팔에 힘을 너무 많이 줘서 그렇게 된 줄 알았는데, 죽도유라니요?"


난 이 단순한 친구에게 그동안 사회가 자신을 은폐시킨 채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해 온 방식을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이용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내 요지는, 죽도가 쉽게 부러지는 건 우리의 힘 탓이 아니고 죽도유를 바르지 않아서라는 걸세. 일종의 제품 결함인 셈인데, 그걸 소비자가 대신 보완하는 실정이란 말이지."

"죽도유가 대체 어떤 기능을 하길래 그걸 바르면 죽도가 쉽게 안 부러진다는 건가요?"


이 가여운 친구에겐 하나하나 설명해줄 필요가 있는 듯했다.


"죽도는 대나무로 만들지? 대나무도 나무니까 그냥 놔두면 수분이 빠져나가는데 겨울철엔 그게 더 심해진다네. 죽도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면 어떻게 되겠나. 더 쉽게 부러지겠지? 그걸 막으려고 죽도 표면에 죽도유를 바르는 걸세."

"그런데 지금은 여름이 아닙니까?"

"지난겨울과 봄에 죽도에서 습기가 빠져나갔고, 이제 여름이 되어 그 영향이 드러난 것이지!"

"그럴듯하군요. 그럼 그 죽도유라는 것은......?"

"말 그대로 죽도에 바르는 기름이지."

"기름이라면 어떤 기름인가요?"


난 이 질문 많은 친구에게 진절머리가 날 것 같았다. 죽도유를 바르면 좋다는 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사실 나도 죽도유가 정확히 어떤 성분인지 잘 몰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죽도유의 성분은 업체의 중요한 비밀로, 그걸 밝힌다면 업체에 막대한 손해가 날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 친구는 그 성분을 알아야겠다며 나서고 있으니 문득 그가 과격한 좌파 인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난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따라서 섣불리 그를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가 정 그렇게 그 성분을 알고 싶다 하니, 그럼 성분이 정확히 밝혀져 있는 제품은 어떤가? 동백유 역시 죽도에 바르기에 무척 좋은 기름이라네. 특히 나가사키산 동백기름을 최고로 치고 있지."


그는 동백기름 중에서도 나가사키산이 최고인 이유를 물었다. 이 친구는 정말로 아는 게 없는 듯했다. 나가사키산 동백기름은 다른 지방의 것보다 올레산과 불포화지방산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으뜸으로 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자 그제야 그 친구는 나를 다소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선배님은 어떻게 그런 것도 다 아시느냐고 추어올려주는데 그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문득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자신 없는 말투로 묻기 시작했다.


"그런데 올레산과 불포화지방산이 많아서 좋다는 건 사람한테나 그런 거지, 죽도는 아니지 않나요? 수분 증발 방지가 목적이면 다이소에서 WD-40을 사서 뿌려도 될 거 같은데요. 그 있잖습니까, 공엄용 윤활제."


이 친구는 대나무가 식물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는 듯했다. 식물에 쇳덩어리에나 바르는 공업용 WD-40이라니! 그는 기본을 몰랐다. 사람 몸에 좋은 게 다른 동물은 물론 식물에도 좋을 거라는 당연한 이치를 왜 묻고 있단 말인가? 이러다가는 산수마저 가르쳐야 할 판이니 난 이쯤에서 죽도용 기름에 대한 설명을 접기로 했다. 죽도에 콧기름을 바르든 양초를 바르든 WD-40을 바르든 그의 선택이었다. 죽도가 깨지고 나서야 전용 죽도유와 식물성 기름을 사용하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되리라.


이제 이 친구에게 죽도유를 어떻게 발라야 하는지 설명해야 할 차례였다. 난 이미 상당히 지쳐 있었지만, 후배를 위해 인내심을 조금 더 발휘하기로 했다. 일단 죽도를 분해한 뒤 죽도의 뒷면에 천천히 죽도유를 바르라고 일러 주었다. 그러자 그는 그새를 못 참고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죽도 앞면에는 바르지 않고 뒷면에만 바르냐고 질문 공세를 펼친 것이다. 그는 근래 들어 소크라테스의 책을 읽었거나 자신의 일곱 살배기 조카를 흉내 내기로 한 듯했다. 끊임없이 질문해대는 소크라테스에게 판사가 사형 집행을 명령한 것은 참으로 마땅한 일이었다.


"죽도 앞면엔 발라봐야 소용이 없어! 뒷면에 숨구멍이 있어서 그리 발라야 효과가 있지. 뒤쪽에 잘 바른 다음에 기름이 공기 중에 날아가지 않게 비닐로 잘 싸맨 다음 5일 정도 거꾸로 매달아 두게! 질문은 그다음이야!"


그는 질문은 그만하라는 내 호통을 듣고서야 잠자코 앉았다. 이제 막 내가 주문한 아메리카노가 나온 참이었다. 난 얼음이 올려져 있는 아메리카노를 한입 쭉 빨아들였는데 그 맛이 그만이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잔을 식탁에 내려놓는데 그걸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영 마뜩하지 않았다. 설마 아까 그 일 때문인가 싶어 이유를 물었다. 다시 죽도유 얘기를 한다면 불호령을 내릴 참이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이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게 뭐가 맛있다고."

"여기 아메리카노가 뭐가 문제란 말인가?"


난 그의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이 의아스러워 물었다.


"커피 맛은 커피 원두가 70%, 그라인더가 20%, 에스프레소 머신이 10%를 결정하죠. 그리고..."

"아니, 그 차이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

"많은 전문가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죠. 일단 들어보세요. 원두는 아라비카 종이 훨씬 맛이 깊은데 여기는 보니까 로부스터 혼합을 쓰는 거 같네요. 원두는 갓 볶은 걸 써야 하는데 볶은 지 며칠 지난 원두를 쓰고 있고요. 그래서 향미가 50% 이상은 날아갔을 겁니다. 게다가......"

"나는 차이를 모르겠던데?"

"그거야 선배님이 비전문가시니까 그렇죠. 게다가 그때그때 원두를 그라인딩 하는 게 아니라 미리 갈아둔 걸 꺼내서 쓰고 있어요. 맛보단 자기들 편의를 우선하는 거죠. 원두는 가루가 되자마자 분당 2%씩 산화가 진행된단 말입니다. 심지어......"

"잠깐 미리 갈아둔 걸 썼다고 큰일이 난 것처럼 말하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군."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들죠. 그 차이 때문에 고급 커피가 있는 거고요. 심지어 이 집은 RO 필터를 사용하고 있지 않아요. 수돗물을 그대로 쓰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이 카페 주인이 정수된 물과 일반 물맛의 차이를 모른다는 명백한 증거죠. 정수된 물로 만든 커피는 맛이 훨씬 깊습니다. 물을 적정한 온도로 관리해야 한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난 이 교육이 덜된 친구와 더 대화하는 것을 단념하기로 했다. 주관적인 맛을 비약을 통해 객관화시키고는 그것을 고급이라고 칭하는 현상이 만연했다. 외국보다 월등한 대학 진학률을 자랑하는 이 사회에 여전히 비과학적인 믿음이 퍼져 있어 개탄스러웠다. 하지만 열성적인 믿음에는 이성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법이니 그가 그의 뜻대로 살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차이를 존중하자는 이 사회의 숭고한 이상이 결국 수준의 차이만을 나누게 되었음을 드러내는 명백한 증거였다.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곧장 도장에 들렀다. 죽도유를 듬뿍 발라둔 죽도를 꺼내 타격대를 향해 힘차게 내리쳤는데 아뿔싸. 죽도가 부러지고 말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범은 죽도를 오래 쓰려면 우선 팔에서 힘을 빼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주관적인 면을 무조건 사용자의 힘과 연결하는 비약이 이곳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하기야, 어디는 안 그러겠는가. 난 사범을 힐끗 쳐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도의 수명은 대나무의 품종이 70%, 대나무 재단용 칼이 20%, 죽도유가 10%를 결정합니다......" 


난 괴이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범을 뒤로한 채 다음번엔 죽도유를 조금 더 두텁게 발라야겠다고 주억거리며 부러진 죽도를 들고 도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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