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욱 Jul 15. 2020

당신은 우유부단한 성격입니다

성격 유형 검사로 오늘날의 미덕을 알아보는 방법

저 자신과 상대방의 속마음을 알고 싶다는 근원적 욕망은 그 기원만큼이나 복잡하고 난해하다. 지난 세기의 점성술과 수상술, 풍수지리학과 사주명리학, 관상학과 골상학은 그런 욕망에 미래의 예언을 더하여 우리의 불가해한 의문에 답해 왔다. 보이저호가 태양계 너머를 탐험하고 있는 오늘날엔 IT 기술을 접목한 성격 진단 프로그램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의 생존 경쟁에서 승리한 이후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고 우리가 노동에서 벗어나 더 많은 여가를 누릴수록 강화되었으니,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주장한 자본의 자기 증식, 다시 말해 잉여 가치에 오염된 삶을 살고 있는 나 역시 그런 욕망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IT 기술의 축복이 이 땅에 퍼지기 전엔 그 비밀 의식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두꺼운 책을 빌려 오랜 시간 탐구하거나,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해가며 삼신을 모신 법당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컴퓨터에 잠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누구인지를 쉽게 알아낼 수 있다. 난 오래도록 신비에 감춰져 있던 '나'라는 존재를 찾을 수 있다는 두근거림을 진정시키며 "성격 진단 프로그램에 응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예"라고 답했다.

곧 "당신은 눈물이 많은 편입니까?"라는 질문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 아래엔 '매우 그렇다'에서 '중간 정도'를 거쳐 '매우 아니다'로 이어지는 7개의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 난 이 질문을 놓고 상당히 고심했다. 이 질문은 대단히 논리적 사고를 요구하는 것이어서, 시간의 연속성과 무한의 의미에 문제를 제기했던 제논의 역설과 그 역설에 답을 제시했던 게오르크 칸토어의 무한 집합 논문을 찾아보지 않고서는 선택을 하기가 어려웠다. 성격 유형 검사의 첫 질문은 "이마가 얼마나 벗어져야 대머리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하는 것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마가 벗어지다 보면 '대머리'라고 부를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런데 그 지점이 정확히 어디인가? 여기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같은 이유로 내가 눈물이 많은 편인지 적은 편인지, 혹은 적당히 흘리는 편인지를 판별하기는 어려웠다. 난 이제 두 살이 된 내 딸아이에 비하면 눈물을 아예 흘리지 않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크렘린궁에 앉아 대숙청 명령서에 서명했던 스탈린보다는 눈물을 많이 흘렸을 것 같았다. 그럼 어떤 선택지를 골라야 할까? 대강 고를 수는 없었다. 성격 검사 같은 중요한 시험에 불성실한 자세로 임한다면 안 하는 것만 못했다. 결국, 고민 끝에 '중간 정도'를 선택했다. 눈물이 많은 것도 아니고 적은 것도 아니니 그럴듯했다.


다음 질문도 만만치 않았다. "당신은 사회의 규칙을 중시합니까?" 역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질문에서 말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 사회와 민주주의 사회, 그리고 열강이 식민지를 지배했던 제국주의 사회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의 규칙은 존중하지만, 공산주의 사회의 규칙은 거부하는 사람은 어떤 선택지를 골라야 할까? 법을 존중하기는 하지만 악법은 따르지 않겠다는 사람은? 규칙은 로마 제국의 5현제가 공들여 만든 규칙일 수도 있었고, 인질을 산 채로 바다에 처넣으며 럼주로 가슴을 적시던 바르바리 해적단의 규칙일 수도 있었다. 어떤 사회의 규칙이냐에 따라 답은 달라질 수 있었다. 첫 질문에서 논문을 찾아보느라 상당한 시간을 소비한 탓에 시간을 오래 쓰기 어려웠다. 결국 이것도 '중간 정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규칙을 따를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으니 '중간 정도'가 그나마 적절해 보였다.


다음 질문은 "당신은 타인을 많이 배려하는 편입니까?"였다.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난 남을 잘 배려할 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었다. 사람들의 평가도 각기 달랐다. 어떤 사람은 나를 착하다고 했지만 어떤 사람은 이기적이라고 했다. '많이'라는 부사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의문이었다. '중간 정도'를 선택하려 하니 '많이'라는 단어의 해석이 모호해졌다. 그래도 '중간 정도'를 선택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이번에는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기를 바라며 다음으로 넘어갔다. "국제법을 무시하는 군사행동을 때때로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안타깝게도 이 역시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먼저 어떤 국제법인지를 확인해야 했다. 그 국제법이 강대국에 의한, 강대국을 위한 법이라면 약소국들의 생존을 위해 그 법을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합당한 국제법인데도 몇몇 국가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 법을 어긴다면 용인하기 어렵다. 질문을 왜 이렇게 애매모호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또 끙끙대다가 '중간 정도'를 선택하고 말았다.

비슷한 형식의 질문들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애매모호한 질문들이 계속 이어졌고 난 매번 '중간 정도'라는 선택지를 골랐다. 그러다가 아직도 서른 개나 되는 문항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저으며 '나가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프로그램은 "당신은 우유부단한 성격입니다."라는 판결문을 내게 보여주었다.


난 프로그램에 적혀 있던 제작자의 SNS로 메시지를 보내 항의했다. 중간에 검사를 그만뒀는데 왜 진단을 내렸느냐는 항의였다. 제작자는 내가 설문 항목 어느 하나에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며 고민했던 걸 생각해 보라고 대꾸했다. 우유부단하다는 결론은 매우 정확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21세기는 자사의 성격 진단 프로그램이 없이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 지켜보라고 예언했다. 난 21세기는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내가 그걸 확인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그러자 그는 바로 그래서 자신의 예언과 성격 진단 프로그램은 틀릴 수 없는 것이라고 응수하고는 모바일 메신저에서 나를 영구 차단했다. 그러고는 "답변할 때 되도록 '중간 정도'를 선택하지 말아 주세요.'라는 문구를 성격 검사 프로그램에 추가했다. 참으로 고약한 성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사실 그의 말은 틀릴 수가 없었다. 왜 그걸 이제야 깨달았을까? 누가 내게 내일 날씨를 물어오면, 비가 오거나 오지 않을 거라고 답하는 게 제일 현명했다. 나의 예측은 빗나갈 수가 없었다. 그럼 그는 절대 틀리지 않는 내 예언에 깜짝 놀랄 것이고, 곧 정확도 100%의 인간 날씨 예보기가 있다는 소문을 퍼트려 날 흡족하게 해줄 터였다. 이렇듯 그 프로그램의 엄청난 인기에는 실로 이유가 있었다. "당신은 시간표를 잘 지키려고 노력합니까?"라는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면 "당신은 계획적인 사람입니다."라고 알려주는 것, 즉 평소에 내가 생각하던 나를 동어반복으로 정확하게 비춰주는 것, 바로 그것이 성격 유형 검사가 지닌 미덕이었다. 


과거의 지혜는 어리석음을 구분해 내고 그를 일깨우라고 가르쳤다. 반면 오늘날의 지혜는 우리가 소피스트처럼 살기를 바라고 있다.


이전 06화 설마요, 이건 깨끗한 쓰레기인데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