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플린에서 그랜드캐니언까지
유보의 땅 모하비 사막
낙타나 오아시스도 없고 모래나 습기도 없다. 다만 답삭나룻한 텀블링 트리(Tumbling tree)가 있고 어느 화가의 디테일한 산수화가 있고 지평선이 있을 뿐이다. 멀리 보이는 검은 산에서는 아르헨티나의 전설을 영화화한 ‘나자리노’의 늑대가 나타날 것만 같다. 사랑과 슬픔이 달빛 아래 처연하도록 아름답게 묘사된 장면들. 영화 속에서 심장을 뒤흔들던 그 음악이 시나브로 가까이 다가온다. ‘콜로라도의 달 밝은 밤’을 연상하며 차창 밖으로 목을 빼니 희끄무레한 선인장과 마른 풀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콜로라도의 달 밝은 밤은 물결 위에 비치네
콜로라도의 달그림자를 밟는 마음 쓸쓸해
반짝이는 은빛 금빛 물결 고요한 달빛이여!
콜로라도의 달 밝은 밤을 나 홀로 걸어가네. “
낭만을 노래하던 콜로라도강은 모하비 사막의 라플린(Laugh lin)이란 휴양 도시를 끼고 유유히 흐르고 있다. 잠시 무르춤하니 졸음이 화산재처럼 내려 쌓여 졸다가 눈을 뜨니, 이번에는 영화 '콰이강의 다리'의 휘파람 행진곡이 경쾌하게 귓전을 맴돈다.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헛기침을 해 봐도 우두망찰하다. 몇 달 전 그랜드캐니언을 가기 위해 모하비 사막을 지날 때의 이야기다.
라플린에서 출발한 버스의 맨 앞자리에서 서부 개척 영화의 주인공인 듯 고삐를 잡고 채찍을 신나게 휘두른다. 안내원이 그랜드캐니언을 가면 턱 빠지지 않게 오른손으로 턱을 받치라고 한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메리카 인디언의 모하비 족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모하비 사막에서, 벌써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모하비란 말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모하비족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미국인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공존하는 땅. 미 대륙의 동서를 횡단하는 일마일 트레인의 끝없는 이어짐. 심심치 않게 보이는 현대 로고가 가슴 뭉클하게 하던 땅이다.
이 엄청난 사막을 15센티만 걷어내면 옥토로 변하여 전 세계의 식량을 책임질 수 있다고 한다. 우리 남한의 1.5배라고 하니 그 규모를 알만하지 않은가. 지금 캘리포니아 평야가 전 미국을 먹여 살린다는데, 전 세계를 먹여 살릴 수 있다니 과연 넓이가 대단하다.
나무가 없는 그 시커먼 산은 우리가 친환경 소재라고 선호하는 맥반석이란다. 우리가 그 돌이 내뿜는 좋은 기운을 받으려고 찜질방이다 돌침대다 하여 귀히 여기는 돌이 아닌가. 산 전체가 텅스텐 등 여러 가지 지하자원이 무궁무진하단다. 성냥갑 같은 하늘 허리에 사는 나로선 그 넓은 땅을 개발하지 않는 것이 당연히 의심스러워서 질문한다.
그 사막을 개발하지 않는 이유는 200년 후손들의 제국을 위해 유보한다는 거다. 앞으로 100년간은 미국이 제국으로서의 준비가 되어 있지만 200년 후에는 알 수 없으므로 그 후손들의 몫이라고 한다. 200년 후를 설계하는 미래지향 정신을 보면서 오늘의 헤게모니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문득 며칠 전 큰아들이 사는 위스콘신에 갔을 때의 일이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난다.
큰아이가 연구실과 학교 이곳저곳을 소개하겠다고 했다. 얼른 여행 가방에 찔러 넣었던 88올림픽 기념주화 한 케이스를 내놓았다. 빈티지 어미의 궁여지책이었지만, 훗날 아들을 위해 쓸려고 구입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살짝 뽐냈다.
아이가 우리 부부를 소개하고 나서 “부모님께서 우리나라에서 개최한 88올림픽 기념주화를 미래의 아들 지도교수에게 선물하려고 구매했었답니다.”하며 내놓았다.
뒤통수와 코는 완전 피라미드를 쌓은 것처럼 뾰족한 지도교수는 주화를 하나하나 꺼내 들고 이리저리 살피고 창 쪽을 향해 햇살에 비춰보기도 하며 귀히 여긴다. 88올림픽이 코리아에서 개최된 것을 자기도 기억한단다.
“아들도 훌륭하지만, 부모님이 더 존경스럽다.”고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의 과장된 제스처가 재미있고 기분이 좋다. 모처럼 자존심이 안동포만큼이나 빳빳해졌다.
지금은 코리아가 위상이 높아져서 모르는 이 드물겠지만, 그때 생각으로는 혹시 코리아란 작은 나라에서 간 아이가 주눅이라도 들 것을 염려하여 긴 줄을 섰었다.
소중한 것은 아들아이에게 항상 내일을 대비하라는 산교육이 되었으므로 더 흐뭇했던 기억이다.
후손을 위하여 모하비 사막의 그 많은 지하자원을 묻어두는 대국의 자세에 비하면 작은 선물 하나 미리 준비한 것 두고 설레발 칠 일은 아니지만, 작을 일들이 하나하나 모이면 큰일을 도모할 수 있으니 허투루 생각할 일은 아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라던 말을 되뇌게 하는 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