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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비두비두밥 Oct 18. 2023

6. 교수님의 메모

2023.09.27

 나는 핸드폰에서 기본 메모 어플을 사용한다. 내용이 길어지거나 손으로 적고 싶을 때면 노란 리갈패드를 쓴다. 거의 다 쓴 내 리갈패드에는 교수님의 메모도 붙어 있다.


 형광초록색 정사각형 포스트잇에 '빌라 사보아 경사로 각도'라고 적은 메모다. 이해를 돕기 위해 경사로를 단순화한 선 두 개도 그려져 있다. 다음 면담을 위한 과제였다. 유명한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빌라 사보아라는 건물의 경사로 각도를 찾아오면 되었다.


 그 메모는 추석 연휴 중 황금 같은 3시간을 잡아먹었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아무도 빌라 사보아의 경사로 각도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한국어로 구글에 검색하다가 연휴의 즐거움이 몽땅 사라졌다. 영어로 검색해도 좀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절망 속에서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평면도에서 경사로의 길이와 높이를 알면 각도도 구할 수 있지 않으려나. 수학을 손에서 놓은 지 꽤 되었지만 경사로는 모양이 직사각형이니 뭐든지 가능해 보였다.


 한 시간 동안 제대로 된 평면도를 구하려고 난리를 쳤다. 전에 빌라 사보아 3D 모델링을 해 놓은 파일을 찾기 위해 15분을 먼저 날리고 시작했다. 파일의 위치가 오리무중이라 즐거운 구글 검색 시간을 잠시 가졌다. 공식적인 평면도에는 치수가 나와있지 않았다.


 치수를 정확히 알려면 제대로 된 도면 파일을 돈을 주고 사야 했다. 공짜로 얻은 파일은 영 수상쩍었다. 게다가 숫자가 더러워서 계산이 예쁘게 나오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구글 번역의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근대 건축의 거장이자 빌라 사보아의 설계자인 르코르뷔지에가 썼던 언어로 검색을 시도했다. 프랑스어 번역기를 열 번을 돌려도 원하는 검색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30분 후에 나는 내가 ramp(전등)과 lamp(경사로)를 헷갈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검색 결과에 빌라 사보아의 조명 시설만 나오길래 구글이 잘못된 줄 알았다. 그럴 일은 없었다. 인간은 항상 기계를 의심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의심해봐야 한다.


 여전히 검색 결과는 시원찮았고 나는 웹사이트를 뒤적였다. 그때 누군가 빌라 사보아를 조사하며 치수를 잔뜩 적어 놓은 페이지가 보였다. 내 눈을 사로잡은 부분은 숫자가 아니라 퍼센트 기호였다.


 경사도는 퍼센트로 표시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30도, 45도는 경사각도였다. 경사도에 관한 숫자가 분명했다. 그런데 출처가 불분명했다.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프랑스어 페이지를 보니 경사도에 대한 더 정확한 용어가 나왔다. 'pante.' 알파벳 다섯 글자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과제를 다 해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끈질긴 노력 끝에 나는 빌라 사보아의 공식 페이스북 계정에서 답을 찾아냈다. '숫자로 알아보는 빌라 사보아' 게시물에서 경사도가 12%라고 나왔다. 당장 노트북 화면을 캡처하고 교수님의 메모 밑에다가 숫자 12를 적고 난리를 쳤다.


 그날 이룬 승리의 증거로 나는 교수님의 메모를 보관했다. 사실 포스트잇보다 그 아래 볼펜으로 휘갈겨 쓴 '12'가 더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메모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다. 메모에 얽힌 사연과 그때의 기억이 우리를 훨씬 즐겁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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