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들려주는 아빠의 이야기
군대를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가로지르는 그 시절, 막연하게 통일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군대는 나에게 닥치지 않을 일이라 자부했다. 남북이 손을 맞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금강산을 오가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구호가 다시금 방송가에 등장했다. 의심하지 않았다. 통일, 평화 그리고 군대 가지 않음을
나의 막연한 기대는 제출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숙제처럼 군대라는 고민을 골방 구석으로 힘껏 밀어 두었다.
1년의 재수, 대학교 입학.
불과 몇 년 만에 군, 입대는 TV 속 환상이 아닌 현실이 됐다. 구석으로 밀어 둔 숙제를 끄집어내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2007년 12월 인터넷으로 행한 몇 번의 클릭은 ‘육군훈련소’로 나를 안내했다. (강원도를 가지 않기 위한 나의 최후의 발악 있었지만, 결국 강원도 화천에서 보병으로 군 복무했다)
1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고, 혹한이 추위가 지속됐다. 나는 그 시절 군으로 자원입대(?)해 끌려갔다. 어머니, 아버지, 누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연병장을 한 바퀴 도는 그 순간에도 현실은 여전히 사회인과 군인 사이에 있었고 저 멀리서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와 누나를 허망한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입대 1일 차, 사회와 격리되는 순간은 옷을 벗는 행위부터였다. 내가 입고 왔던 자유의지, 개인적인, 개성 있는 그 모든 것은 그 자리에서 모두 벗겨짐을 당하며 사회와 격리됐다. 닭장 같은 내무반에 30여 명이 받은 같은 모양의 택배 박스에 간단한 메모를 적고, 살아왔던 인생의 허물을 벗어냈다.
크기만 다를 뿐 모두가 같은 전투복을 받았으며, 구멍이 난 모포를 둘둘 말아 덮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하루 종일 낯 섬과 싸워야 했다. 몸은 그 어느 때보다 노곤했지만 알지도 못하는, 이름 한자 모르는 타인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저기요, 다음 순서예요. 불침번 서야 한 대요”
몸을 뒤척일 세 없이 깜짝 놀라 옷을 갈아입고 무의미하게 허공을 바라보면 문 앞에 섰다.
운이 좋은 친구는 육군훈련소로 입소하기 전 대기하는 3일간 불침번을 한 차례도 경험하지 않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예외가 없었다.
새벽 4시 사회의 아쉬움도 군대에 대한 두려움도 느끼기 전 잠에서 깨어났고, 한 시간 뒤 곧바로 잠에 들었다. 허약한 몸은 내 미래를 감당하기엔 너무나 초라했고 쉽게 무너졌다.
재수, 대학 입학에서 누렸던 자신감과 미래에 대한 기대는 잠시 접어둔 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바리 한 남자이자 성인이 됐다. 비만이 되어 뒤뚱거리는 몸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한 치수 큰 전투복이었으며 깊게 눌러써도 멋이 나지 않는 전투모였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게 만드는 사실만큼이나 괴롭힌 것은 씻는 것, 싸는 것이었다. 1월 칼바람이 부는 계절 뜨거운 물은 15분이면 멈추었다.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 모두 얼음장 같은 찬물을 온몸에 끼얹혀야 했다.
화장실은 더 최악이었다. 기억에서 사라진 푸세식 화장실이 그곳에는 존재했다. 시간을 20년가량 멱살을 잡고 끌어내렸고, 그 결과 비틀고 쥐어짠 코를 뚫고 온갖 화장실의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육군훈련소에 정식 입소하기도 전에 나는 지쳐버렸다.
그러나 3일 뒤 육군훈련소에 입소해 158번이라는 숫자를 받은 뒤에야 이곳이 천국이란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