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들려주는 아빠의 이야기
모두가 대학에 목숨을 거는 고등학교 학창 시절, 나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여자 친구, 우정 쌓기에 더 관심을 뒀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바람이 어떻게든 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결과를 받는데 1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첫 수능에서 받은 성적은 처참했다. 그나마 잘했던 언어는 가채점에서 비가 내렸다. 역대급 쉬운 언어영역에서 오답 투성이 시험지를 받아 든 뒤 정확한 점수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약 한 달의 시간이 흐른 뒤 결국 언어, 외국어 6등급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형편없는 점수를 받아 들고서 미래를 고민했지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갈 수 있는 지방대학을 찾고, 최대한 많은 지원을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1, 2, 3 지망 모두 지방 사립대를 지원했다. 공무원 준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행정학과를 1 지망으로 지원했고, 대학에 붙기만을 바라며 모집 단위가 많은 경영학과를 2 지망으로 했다. 최후의 보루는 문헌정보학과였다. 대학에 붙기라도 하자는 막무가내식 ‘묻지 마 지원’이었다.
하지만 1년 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나의 시간은 결국 ‘불합격’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지방대 이름 모를 학과 추가 합격까지도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다음의 선택지는 어쩔 수 없는 ‘재수’였다.
물론 재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넉넉하지 못한 생활이 갑자기 나아질 리 만무했다. 지방의 작은 재수학원에서 쪼들리며 1년을 보냈다. 학원비가 밀리기도 했으며, 학창 시절 그러했든 점심값, 저녁값은 항상 부족했다.
그러나 반복된 가난의 수치심을 뚫어낸 입시학원의 효과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6등급이 1 또는 2라는 숫자로 바뀌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단 6개월 만에 변화였고, 뜨거운 여름 모의평가에서 받았던 최고 점수는 수능점수가 됐다.
부러움과 혐오에 가까웠던 입시학원은 말도 안 되는 반전을 가져다주었고, 결국 공부는 의지뿐 아니라 자본의 노력이 함께해야 가능함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수능’이라는 제도는 공정을 가장한 불공정 경쟁 테스트가 아니었을까 싶다.
생활수준, 정보격차 등 과정은 철저하게 배제된 채 결과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 만 명 가운데 하나가 나올까. ‘개천의 용’을 만들 수 있으나 용으로 선택되지 못한 수많은 피라미를 양산하는 구조기도 했다.
모두가 같은 시험을 본다는 ‘공정’이라는 틀을 통해 고득점자에게는 승리감을 안기고,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는 알 수 없는 패배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들 시스템은 다시 한번 모두가 같은 경쟁으로, 공정한 경쟁으로 포장되어 사람들을 설득한다.
물론 조금 나아진 수능점수가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낮에도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던 학원에서 보낸 1년은 우울감을 배가 시켰다. 또다시 실패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나를 채찍질했고, 이는 여전히 떨쳐낼 수 없는 우울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