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이 Jul 15. 2022

(9) 부산 동'구', 누군가의 터전

부산과는 도무지 연이 없었다. 

대학시절 친구들과 KTX를 타고 갔던‘해운대’는 처음이자 마지막의 부산행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XX군 XX리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바다는 본적도 없다. 20살 넘어 생활은 모두 서울에서 보냈기에, 당연히 내 삶의 터전은 수도권 또는 충청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두의 삶이 그렇듯, 예정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첫 직장 ‘유한양행 부산지점 발령’은 나를 부산에 가게 했고, 부산이 나에게 들어오게 했다. 

부산지점 발령 후 동구는 터전이 됐다. 매일 아침을 알리는 주차위반단속 차량은 허겁지겁 사무실에서 나와 차를 옮기게 했다. 부산MBC를 보며 부산을 읽었고, KNN 라디오를 들으며 운전하는 것은 일상이 됐다.     


여름 내 해운대, 송정을 누볐다. 평일이고 주말이 만취가 되어 거리를 해메고 다녔다. 부산사람이 된 것처럼, 부산에 놀러 온 또 다른 이방인이 된 것처럼.

그래야 이 도시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더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보고 싶었고, 말투 중간중간 설익은 사투리가 끼어들기도 했다. 하루는 서울이었고, 그 다음날은 부산에 정착한 뜨내기였다.     

부산이 온전히 나를 맞아 주지 않는 것이라생각했다. 


거래처를 방문할 때면 어김없이 “서울사람이 와 여기까지 왔노”

“고생 마이 할낀데, 은제까지 있을낀데, 짧게 할라문 잘 생각해보소”라고 반문했다. 


도시가 나를 멀리하는 것처럼, 온몸으로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화의 시작점부터 나는 ‘여기’사람이 아닌 ‘저기’ 사람이 됐고, 부산진역을 지키던 회사 건물은 나를 낯설게 만들었다.      


여름휴가를 기다리며 후텁지근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부산 토박이였던 팀장님은 나를 조용히 불렀다. 타지생활이 많이 힘들 테니, 회사 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오라고 했다. 회사에서 제공한 아파트 한 채에 5명이나 모여 사는 모습이 퍽이나 안쓰러웠던게 분명하다. 매일 술에 절어 붉은 얼굴을 하고, 퉁명스럽게 ‘뭐하노’라며 던지던 그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밥을 함께 먹는 것은 아니었지만, 챙겨줌으로서 식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처음 아침을 먹으러 들어간 가게는 조금은 낯선 풍경이었다.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집에서도 먹지 않았던, 밥을 부산에서 처음 먹게 됐다. 엄마의 따뜻한 밥 대신 팀장님의 배려가, 싫지는 않았다. 술을 마신 날이면 황태국을 들이켰다. 멸치맛이 진하게 나는 김치찌개를 먹고 난 뒤 입맛에 맞는 황태해장국만 찾아 주인장의 걸죽한 사투리가 섞인 핀잔을 들어야 했다. 싫지 않았다. 사람 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부산을, 부산 동구를 따뜻한 정이 있는 동네로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일하는 일터였고, 부산의 자부심이었다. 부산의 테헤란로를 지키는 곳에서 일한다는 사실은 부산을 사는 사람이라면 심장을 뛰게 하기 충분했다.


입사 전, 언론사를 준비했다고 했던 나를 처음 반겨준 A과장님은 나에게 창문을 열고 부산일보를 보여주었다. 부산을 지키는 자부심이라고 했다. 그리고 드높은 빌딩숲은 은행, 증권사 등 금융회사가 즐비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옥상으로 기어코 데려가 부산을 보게했다. 

크기가 가늠되지 않는 초록색, 빨간색 컨테이너 박스가 테트리스 게임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의 상쾌함을 잠시 느낄 새도 없이 부산의 산업이, 항만의 낭만이 머리를 스쳤다. 


A과장님은 별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저 부산을 보여주고 싶어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서야 부산이 그저 해운대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봤다.      


그곳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자 자부심, 자존심이다. 의도 없는 행동에 뭍어나온 것은 지루한 업무시간을 떼우기 위함이 아닌 자신이 살아온 지역을 사랑하는 방식이 아니었나 싶다.      


부산토박이가 보인 사소한 행동은 부산을 사는 나를 달라지게 했다. 이방인으로 남아있지 않게 했고, 서울에서 떨어져 나온 낙오자가 아닌 새로운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부산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자, 생활도 바뀌었다.      


나를 밀어 내던 부산이,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서툰 사투리를 감싸주었고, 일은 신이 났다. 타지 사람이었던 내게 손을 내민 것은 또다른 타지사람이 아닌 부산 토박이었다. 열심히 한다며 더 찾아주었고, 나에게 먼저 연락을 주었다.


그래, 이런게 사람사는 거지. 부산 동구는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고 자부심이었다. 

이전 07화 2010년 여름, 아스팔트는 내 직장이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