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이 Jun 06. 2022

(8) 여덟 개의 원서, 그리고 재수

아이에게 들려주는 아빠의 이야기

모두가 대학에 목숨을 거는 고등학교 학창 시절, 나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여자 친구, 우정 쌓기에 더 관심을 뒀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바람이 어떻게든 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결과를 받는데 1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수능에서 받은 성적은 처참했다. 그나마 잘했던 언어는 가채점에서 비가 내렸다. 역대급 쉬운 언어영역에서 오답 투성이 시험지를 받아   정확한 점수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달의 시간이 흐른  결국 언어, 외국어 6등급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형편없는 점수를 받아 들고서 미래를 고민했지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갈 수 있는 지방대학을 찾고, 최대한 많은 지원을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1, 2, 3 지망 모두 지방 사립대를 지원했다. 공무원 준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행정학과를 1 지망으로 지원했고, 대학에 붙기만을 바라며 모집 단위가 많은 경영학과를 2 지망으로 했다. 최후의 보루는 문헌정보학과였다. 대학에 붙기라도 하자는 막무가내식 ‘묻지 마 지원’이었다.      


하지만 1년 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나의 시간은 결국 ‘불합격’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지방대 이름 모를 학과 추가 합격까지도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다음의 선택지는 어쩔 수 없는 ‘재수’였다.     


물론 재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넉넉하지 못한 생활이 갑자기 나아질  만무했다. 지방의 작은 재수학원에서 쪼들리며 1년을 보냈다. 학원비가 밀리기도 했으며, 학창 시절 그러했든 점심값, 저녁값은 항상 부족했다.


그러나 반복된 가난의 수치심을 뚫어낸 입시학원의 효과는 내가 생각했던  이상이었다.

 

6등급이 1 또는 2라는 숫자로 바뀌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단 6개월 만에 변화였고, 뜨거운 여름 모의평가에서 받았던 최고 점수는 수능점수가 됐다.

     

부러움과 혐오에 가까웠던 입시학원은 말도 안 되는 반전을 가져다주었고, 결국 공부는 의지뿐 아니라 자본의 노력이 함께해야 가능함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수능’이라는 제도는 공정을 가장한 불공정 경쟁 테스트가 아니었을까 싶다.

생활수준, 정보격차 등 과정은 철저하게 배제된 채 결과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 만 명 가운데 하나가 나올까. ‘개천의 용’을 만들 수 있으나 용으로 선택되지 못한 수많은 피라미를 양산하는 구조기도 했다.

모두가 같은 시험을 본다는 ‘공정’이라는 틀을 통해 고득점자에게는 승리감을 안기고,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는 알 수 없는 패배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들 시스템은 다시 한번 모두가 같은 경쟁으로, 공정한 경쟁으로 포장되어 사람들을 설득한다.


물론 조금 나아진 수능점수가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낮에도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던 학원에서 보낸 1년은 우울감을 배가 시켰다. 또다시 실패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나를 채찍질했고, 이는 여전히 떨쳐낼 수 없는 우울로 남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