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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 Jul 30. 2023

2010년 여름, 아스팔트는 내 직장이었습니다

군대를 전역한 뒤 복학을 위한 돈벌이를 찾아 나선 그때, 친구는 소위 말하는 ‘노가다’를 제안했다. 새벽 5시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5:30 편의점에 들러 공사용 장갑을 산 뒤 의기양양하게 ‘XX인력 사무소’에 죽치고 앉아 있기로 했다. 30분, 1시간이 흘렸지만, 나와 친구를 태워줄 봉고차는 없었다. 아침햇살이 쨍쨍하다 못해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이었다.      


이렇게 포기할 수 없다던 친구는 주변을 수소문해 새로운 일을 물어왔다.      


“노가다이긴 한데, 공사현장은 아니래.”

“그런 게 어딨냐? 일당은, 돈은 많이 준대?”

“하루 10만 원”     


더 물어볼 것도 없었다.

‘아스팔트 도로도색’ 일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했던 업무는 그렇게 시작됐다.      

공사현장에서의 헬멧도, 안전화도 없었다. 그저 막 입는 옷을 입고 오라고 했다. 한 여름 내리쬐는 해가 무서워 밀짚모자, 헌 옷박스로 가기 직전의 긴팔, 청바지 그리고 좁쌀만 한 구멍이난 스니커즈를 신고 의기양양하게 직장으로 향했다.      


얼굴이 새까맣게 탄 이사님, 그리고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라 얼굴이 하얗게 뜬 부장님 그리고 형님이라고 부르라던 등치가 좋은 형들까지. 두 개 팀으로 운영된다던 도로도색 업무는 마케팅, 홍보, 총무 같은 부르는 이름조차 없이 행위가 직업이었고, 나는 일원이 됐다.     


통성명도 채 마치기 전 일은 시작됐다.      


아침 6시 출근, 믹스커피를 한 잔 마신 뒤 업무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도로도색에 필요한 가루포대를 믹서차로 옮기는 작업. 1시간 남짓 한여름 창고에서 반복하다 보면 몸은 이미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작업이 어렵기로 소문난 이사님 팀과 조금은 느슨한 형님은 각자 ‘오야’가 되어 선수를 직접 픽업했다. 하루 중 가장 떨리는 시간. 그날의 업무 난이도를 결정짓는 ‘운명의 7시’다.      


“XX아 알지?, 오늘은 가경동으로 간다”

“네? 네..”     


이사님 눈을 피해, 친구에게 얼굴을 한번 찌푸리고선 차에 탔다. 선크림 부장님, 이사님, 나 이렇게 3명은 고정적인 한 팀이나 마찬가지였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모두가 출근으로 바쁜 그 시간 우리는 희미해진 아스팔트 위 각종 선을 긋기 위한 ‘별동대’가 되어 도로로 아니 직장으로 향했다.      


아침의 태양이 내리쬔다는 느낌이라면, 오후의 점심을 지나 오후의 태양은 그야 말고 ‘폭’ 자가 붙어야 하는 태양 그 자체다. 태양은 세상을 밝게 할 뿐 아니라, 그 열로 전기까지 만드는 이로운 존재인데, 아니 세상에는 없어선 안될 존재인 것을. 누군가에게 고통이 될 것이라 생각이나 했을까.     


하늘에서 준 총애와 같은 태양을 티셔츠와 청바지로 막고 있노라면, 아스팔트에서 복사된 열은 나를 찜통으로 밀어 넣는다. 아스팔트 한가운데서 뜨거운 아스팔트 도로도색 장비 옆에서 연신 철판을 댔다 떼었다 반복한다. 차량 통제라도 시켜주면 좋으련만, 그런 좋은 업무 따위가 나에게 올리 없다. 이사님은 그렇게 날 총애했다.      


점심을 먹고 쓰러지듯 그늘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는 몇 번이고 나에게 물었다.      

“도망갈까, 도망갈까, 도망갈까”     

‘자 일하자’라는 이사님 한마디에 조건반사처럼 두 손으로 무릎을 밀어 올렸고, 몸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통제 없는 뻥 뚫린, 도로 옆 그늘가에서 나는 자본이라는 판옵티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내 몸의 조건반사로 알게 됐다.     


‘폭염주의보’, ‘체감온도 40도’ 따위의 말은 현장에서 용인되지 않았다. 2시간 태양, 10분 그늘은 그곳의 룰이었다. 현대의 작업중지권이나 ‘내 몸을 다치면서까지 중요한 일은 없다’는 구호 따윈 존재하지도, 존재하더라도 먹히는 곳이 아니었다.      


몸이 금방이라도 지쳐 스러져 갈 때쯤, 오후 3시. 음료를 입으로 밀어 넣었고,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봤을 땐 일이 주는 성취감 대신 자괴감이 몰려왔다. 땀에 절어 옷은 소금으로 세 하얗게 변해 카페조차 들어갈 수 없는 몸. 이사님, 부장님과 나는 도심 한가운데서 외딴섬이 되어 일했다.      


비가 오늘날이 아니면, 여름 내내 업무는 계속 됐다. 7말 8초 여름휴가 따위는 딴 나라 얘기였다. 작업을 하기 어려운 겨울철 대신 봄, 여름, 가을 일을 해야 했기에 자연이 허락한 쉼을 제외하면 쉼 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물론 근로계약서도, 통장사본도 필요 없는 일이었기에 가능했다. 언제나 월급은 ‘현금’으로 줬다. 그것이 돈을 버는 맛이라면서...     


뜨거웠던 여름은, 일생에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까맣게 탄 얼굴과 함께 마무리 됐다. 약간 밝은 톤을 띤 피부는 어딜 가도 튀는 ‘까만 얼굴’이 됐다. 한여름 아스팔트가 내게 준 선물이라고 해야 할까. 피부가 두 어번 정도 허물을 벗겨낸 그해 겨울이 지나서야 얼굴은 돌아왔다.      


그때가 돼서야 지난 시간을 온전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한여름 아스팔트 위, 공사현장에서 ‘자연의 휴식’을 기다리며 일한다. 그리고 그 일들은 때론 목숨을 위협한다. 어떤 이는 40도가 넘는 공사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어떤 이는 33도 폭염 속 마트에서 수십 킬로를 움직이며 과로로 쓰러져 세상을 저버렸다.      

10년 전,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의 세상에서, ‘주 52시간’ ‘중대재해처벌법’ 등 노동자를 위한 많은 변화가 있음에도, 여전히 도로에서, 건물에서 일하다 죽는다.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하지만, 삶을 그곳에서 끝이 난다.      

그 시절 함께했던 친구는 가끔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린다.      


“너무 덥고 힘들었는데, 그일 왜 했지?”

“그 정도면 돈 많이 줬잖아, 그래서 했지 뭐”     


돈 때문에 나는 아스팔트 위에 섰고, 여전히 돈 때문에 누군가 아스팔트 위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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