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들려주는 아빠의 이야기
#1. “야이 씨발새끼가”
거친 욕설과 함께 뒤통수가 번쩍했다. 고개를 돌리자 K고 선배 두 명이 서서 노려보고 있었다. 치사하게 게임을 하던 K고 선배에게 진 뒤 오락기 스틱을 손으로 치며 불만을 표한 대가였다.
#2. 화성침공 오락실을 나오는 길 골목 어두운 곳에서 “야, 야!”라고 외쳤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뛰었다. 순진하게 따라갔다가는 주머니가 털리고 뒤통수를 맞았으리라. 자존심보다는 실리를 택했다. 상대는 다섯이었다. 그리고 실업계고 교복이었다.
#3. 학교 준비물을 사기 위해 받은 1만 원짜리 한 장을 오락실에서 모두 탕진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다. 제대로 된 게임의 룰도 익히기 전이었던 그 시절 2D 그래픽에 하염없이 동전이 투입됐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빈 주머니와 빈 손은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기에 너무나 좋은 소재였다.
오락실은 학창 시절 일탈의 장소이자 폭력적 공간이었다.
그 시설 삼봉 오락실, 88 오락실, 화성침공의 수많은 게임기는 학원으로 학교로 향하는 발을 붙잡았다. 피아노 학원에 머무르는 시간은 1시간 20분, 그러나 그 시절 나는 30분을 과감하게 오락실 ‘철권’에 투자했다. 오락실을 들어갈 때면 묘한 설렘이 함께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기술표를 모아 한 장씩 프린트하고, 쉬는 시간이면 가상의 스틱을 돌리며 기술을 연습했다. 친구와 뛰듯 경쟁하며 오락실로 향했다. 때로는 주말 하루를 오락실이 문 여는 아침 9시 출근도장을 찍고 오락실에 죽치고 앉아있었다. (오락실을 가기 위해 집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30분가량 이동해야 했다.)
일탈의 공간은 때로는 나의 찌질함을 극도로 드러나게 만들기도 했다. 그 시절 CCTV 한 대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은 어두운 공간의 오락실은 소위 노는 이들의 아지트였다. 게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죄악시되던 시절이었기에 그곳을 찾아가는 이들 모두 비공식으로 공인된 일탈의 공간을 이해하고 있어야 했다. 자기 몸을 스스로 지켜야 했다는 얘기다.
오락기에 기대어 지나는 학생에게 100원을 달라고 했던 형들도, 좋은 오락실 노래방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새치기를 서슴지 않는 형도 있었다.
무서운 형들이 있을 때면 발길을 돌리기도 했고, 최대한 게임을 깔끔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락실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처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