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가 흔한 현대사회에서도 대접받는 메뉴는 따로 있다.
산에서 나는 송이, 바다에서 건져낸 옥돔, 랍스터 등 그리고 땅에서는 소. 소고기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오죽하면 우스갯소리로 ‘이유 없는 소고기는 얻어먹지 말라’는 말까지 있을까.
특히, 우리나라에서 소고기가 갖는 위치는 특별하다. 우리 소 한우는 좋은 사람과의 자리에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다. 아이를 낳은 산모는 한 달을 지겹도록 소고기미역국을 입에 털어 넣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매년 생일을 맞아 미역국을 찾는다. 언제나 소고기는 약방의 감초처럼 함께한다.
풍족하지 못한 유년시절을 보냈기에, 소고기가 갖는 의미는 내겐 조금 더 특별했다. 닭고기, 돼지고기조차 마음껏 누리지 못한 그 시기, 소고기는 언감생심이었다. 밥상 위 올려진 소고기뭇국은 이름이 무색하리만큼 ‘소고기’를 찾아볼 수 없었고, 소고기를 ‘구워 먹는’ 경험조차 많지 않았다.
어릴 적 찾은 싸구려 고기뷔페에서 먹은 소고기는 언제나 질기고, 육즙조차 찾아볼 수 없었기에 소고기는 으레, 그런 맛없는, 돼지고기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겨졌다. 소고기는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음식솜씨가 참 대단했다. 떡볶이, 김치볶음밥조차 특별했다. 값이 비교적 저렴했던, 큰 멸치를 내장과 똥을 제거하고 다듬어 고추장과 물엿에 볶아낸 멸치볶음조차도 내겐 밥도둑이었다. 어릴 적, 식욕이 왕성해 모든 걸 맛있게 먹었다고 하기엔, 역류성 식도염을 달고 사는 지금도 그때의 음식을 찾을 때면 사라졌던 식욕이 거짓말처럼 돌아와 고봉밥을 마다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가난, 그리고 부족한 살림살이는 때때로 뛰어난 음식솜씨조차 그늘에 가렸다. 적절한 비율을 맞춰야 하는 음식에는 언제나 부족함이 앞섰다. 소고기 미역국에는 소고기가 없었고, 육개장대신에 닭개장으로 갈음했다. 소갈비가 올라야 할 곳엔 돼지갈비가 상에 올랐다. 물론 이들 메뉴조차 특별한 날, 특별한 음식인 경우가 많았다.
하루는 교류가 많지 않았던 이모가 부티나는 얼굴을 하고, 양손엔 소고기를 가득 안고 집을 찾았다. 소고기 외에도 많은 선물을 잔뜩 싣고 왔지만,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양손 가득 검은 봉지 안 가득한 소고기만 뇌리에 남았다.
부엌으로 향한 엄마는 미역국을 한솥 끓여냈다. 미역과 소고기 비율은 1:1에 가까웠다. 아니 소고기가 미역을 압도했다. 평생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소고깃국에 가까운 소고기미역국이었다. 엄마의 음식철학과 맞지 않는 고기가 너무 많아 오히려 미역이 뻣뻣해져 버린, 그 미역국을 나는 식탁에 앉아 고개를 처박고는 쉴 새 없이 퍼먹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먹는 아들을 보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20년이 훌쩍 지나서야 그때 엄마가 가졌던 마음을 헤아리며, 가슴이 저릿하다.
집을 나와,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 전까지 미역국을 한참이나 멀리했다. 과거 크고 작은 기억 때문이었을지 모르지만, 그저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싫어하는 음식이라 일러두곤, 생일을 맞이한 어느 날이면 으레 그렇듯 “미역국 싫어하는데”라며 피했다.
결혼한 뒤, 아내는 생일이라며 미역국을 끓였다. 아이를 낳고 3명의 가족이 함께 맞이한 생일날에도 미역국을 끓였다. 이제 막 이유식을 끝낸 아이를 위해, 소고기를 잔뜩 산 아내는 미역국에도 아낌없이 소고기를 넣었다. 생일날 아침, 하루종일 소고기 끓이는 냄새로 집안 곳곳이 쿰쿰했을 정도다.
특별한 것 하나 없는 소고기 한점, 미역국 한 그릇은 과거의 기억으로 특별해졌다. 조금은 마음 아팠던 과거의 기억이, 그렇게 나쁜 기억만은 아닌 듯싶다. 아마도, 조금 더 성장하고, 조금은 더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이었으리라.
소고기 가득한 미역국 한 그릇이 따스하고,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