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트롯(트로트)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현철을 최고로 치셨다. 노래도 음색도 좋아했다. 할머니와 시간을 보낼 때면 언제나 ‘이름표를 붙여 내 가슴에~’ 로 시작되는 현철 ‘사랑의 이름표’를 들어야 했다.
96년, 초등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고 몇 해뒤엔 세기말 분위기가 찾아왔다. 그 시절 현철은 TV를 수놓은 인기가수도 hot도 젝스키스도 아니었기에 즐기지 않았다. 지금처럼 트롯이 선풍적 인기를 끄는 시대도 아니었으니,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습관의 무서움이었을까 어린 시절 입 밖으론 현철 노래를 흥얼거렸다.
과거의 기억은 흥얼거리는 노래를 타고 몇 가지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았다. 빛바랜 사진 뭉텅이처럼 흐릿하지만, 소중히 저 멀리 전두엽 어딘가의 기억장치 속, 절대 잊히지 않는 무언가처럼.
할머니는 살가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내겐 누구보다 따뜻했다. 어린 시절 노란색 장판과 육중한 갈색 장롱, 직사각형의 방에서 검버섯이 피고 거칠어진 손으로 볼을 매만져 주며 사랑을 주었다.
할머니 죽음과 죽음으로 가는 시간의 기억마저 추억으로 미화되진 않는다. 정복되지 못한, 여전히 조기발견조차 어렵다는 췌장암. 20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오른 그때도 그랬다. 발견은 늦었고, 복수가 차올라 배가 부풀었다. 시골병원에서 지낸 시간조차 짧았다. 복수가 내려앉았을 때, 할머니는 퇴원했다. 병이 다 나은 것이라 생각했다. 어른들은 그렇게 얘기했다.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노란 장판, 갈색장롱이 지키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할머니 곁에서 한 시간을 앉아있었다. 홀로 손을 꼭 쥔 채로. 가족들이 왜 내게 그런 시간을 주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할머니가 누워있는 그 공간, 죽음이라는 공간에 내가 앉아있었다.
어른들은 익숙하게 병풍을 쳤다. 장의사는 염을 했다. 기분 나쁜 나프탈렌 냄새가 코를 찔렀다. 냄새를 피하기 위해 나는 코를 틀어쥐었고, 친척 누나는 아무 말 없이 자연스럽게 손을 치웠다. 갈색장롱이 무겁게 자리를 지켰던 그 공간, 그 자리엔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상징물들로 채워졌다.
시골 마을 장례식엔 수많은 사람이 오갔다. 넓디넓은 양계장을 했던 터에 돗자리를 깔고, 쓸고 닦았다. 유리솜을 울퉁불퉁한 바닥에 깔고 창고에서 돌돌 말린 장판 더미를 덮었다. 뭐가 그리 신났는지 뛰어다니며 바닥을 닦았다. 그러던 와중 발이 작은 못에 찔려 피가 났다. 녹슨 못에 상처가 깊게 파였고 아픔에, 파상풍이 무서워 눈물이 났다. 할머니의 죽음은 순간 잊었다. 성냥개비 머리를 갈아 인을 상처 부위에 넣고 불로 지졌다. 소리를 지르며 또 한 번 울었다.
마을 보건소에 들러 항생제를 조금 처방받아먹었다. 절뚝거리며 상을 닦고, 손님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장례식에 찾아온 5학년 담임선생님에게 대견하다는 소릴 듣고 어깨가 으쓱했다. 그 순간에도 할머니를 잊었다.
작은아버지는 장례식장을 지켰지만, 친척 형은 오지 않았다. 대학의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다고 했다. 부산 한 지방사립대 법대를 다니고 있었다. 그 시절 집안에서 공부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었고, 할머니 죽음조차 미룰 정도로 대접받았다.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존재가 죽음이라는 소식을 듣지 못한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장례가 다 끝나가는 시간에 찾아온 형에게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슬픔은 보이지 않았다. 괜히 섭섭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옆이 아닌 집 뒷마당에 자리했다. 매해 찾아뵐 것 같았지만, 저 먼 산의 할아버지 산소만큼이나 뒷산의 심리적 거리는 참 멀었다. 기억에서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졌고, 수 없이 지나치면서도 할머니라는 존재의 기억은 쉬이 돼 살아나지 않았다.
겨울이 지나 봄이 내렸다. 6:48분을 가리키는 내비게이션 시계 뒤로 어스름한 해가 떠올랐다. 라디오에서는 임영웅의 드라마 ost가 흘러나오고 있다. 나는 37살이 됐다.
노랠 들으니 그때가 떠올랐다.
현철의 구수한 목소리도 흥겨운 트롯가락은 아니었는데, 임영웅의 애절한 목소리는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되어 나를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