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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 Jun 18. 2023

[에세이] 굽이친 삶, 아래 철도

1999년 겨울, 

단양역은 미지근한 냄새가 났다. 


북적이는 사람, 소란스러움에 고개를 쑥 빼고는 두리번거리던 역무원. 들낙이는 육중한 철문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찬 들숨과 구식 라디에이터의 날숨. 시골마을에서 찾기 힘든, 빼곡하게 사람이 함께 모인 그곳은, 너무 차지도 너무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우리의 삶 그 자체였다.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외지로 먼 곳으로 갈 때면 언제나 기차를 탔다. 기차역까지 가는 길은 긴 여정이었다. 1시간 남짓 차를 타고 나와 꼬불거리는 충북 단양의 고습제를 넘어서야  타지로 가는 여행이 시작됐다. 멀미라는 존재는 여행과 동일시하는 단어였으며, 이를 뛰어넘어 타지로 향하는 역으로 끌어낸 것은, 언제나 앞으로 나가기 위한 갈망과 희망이었다.          


1999년 세기말로 전국이 떠들썩한 그 시절 아빠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서울로 향했다. 정확하게 말해 용인에 사는 친적집을 방문하기 위한 긴 여행이었다. 엄마는 딸 3명과 아들인 나를 데리고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미리 예약해 둔 표는 없었다. 2장의 좌석표와 3장의 입석표를 받아 들었다. 2장의 좌석표조차 내 차지는 되지 못했다. 엄마는 꾸부렁하게 허리가 굽은 할머니에게 자리를 내어주고는 열차 끝에 자리 잡았다. 열차와 열차 사이를 사람들이 지날 때마다 섰다 앉았다를 반복했다. 내심 미안했는지 자리를 양보받은 할머니는 나를 자리 옆으로 끼워 앉게 했다. 시골민심은 언제나 어른을 그리고 아이를 생각했다.         

  

청량리역에서 인파에 떠밀려 구겨지듯 겨우 내려 지하철을 타고 다시 1시간 30분을 이동해야 했다. 지하철 표를 구매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고, 길을 제대로 몰라 표를 파는 직원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다. 토큰을 넣고 빼는 법을 몰라 당황하기도 했고, 닫히는 지하철문에 가방이 끼어 화들짝 놀랐다. 친척집으로 향하는 길은 산 넘고 물 건너, 지하철도 건너야 하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40평대 아파트에 살고 있던 나와 동갑내기 쌍둥이 친구 친척집은 평범한 아파트였지만 초등학생의 눈엔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살고 있는 집이 몇 평인지 조차 모르는 내게, 쌍둥이 친구는 40평이라며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았다. 자신들의 방엔 레고가 가득했고 쌍둥이 아빠에겐 서재가 있었다. 높게 쌓인 신문, 책장을 빼곡하게 수놓은 책들. 눙치듯 은은한 자랑이, 사진처럼 남긴 서재의 모습은 꽤 오랫동안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은 기자라는 직업으로 이어지게 한, 강렬한 인생의 한 장의 사진이 됐으니 행복했던 추억이라고 해야 할까?.          


2015년 겨울,     


25살이 되던 해 둘째 누나가 결혼했다. 어머니는 아니 엄마는 여전히 생활전선에 있었다. 어의곡리라고 불린 산골마을에서 20년이 다 되도록 식당을 이어갔지만, 입에 겨우 풀칠할 정도였을 뿐. 맛은 좋았지만 성공을 말하기엔, 언제나 뭔가가 부족했다. 시골마을 끝자락은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단양환상선눈꽃열차’는 희소식이었다. 엄마는 식당 집기를 챙겨 단양역으로 향했다. 여느 때처럼 국수를 한솥 끓여내고, 고추지를 담았다. 겨울의 꽁꽁 언 몸을 녹이기에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손님이 줄을 서 현금을 내밀 때마다 엄마의 얼굴엔 미소는 추위가 언제 있었냐는 듯 잔잔히 퍼지고 있었다.     

겨울 한 달을, 손님이 찾지 않는 가게를 지켰던 엄마는 단양환상선눈꽃열차를 기다리며 조금은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 추위에 떨며 국수를 담고, 김치를 만들었지만 마음까지 춥진 않았다. 자신의 자식을, 축복하기엔 충분한 기회였고 시간이었으리라...     


둘째 누나는 그렇게 결혼했다. 겨우내 엄마가 눈꽃열차 앞에서 손님들과 함께한 그 시간이 있었다.           

2018년 여름,     


서울역에 KTX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첫 직장, 첫 번째 정규직은 야속하게도 날 연고 없는 부산으로 떠나보냈다. 대학을 복학 한 뒤부터 만남을 가졌던 여자친구는 업무 배치 소식을 듣자마자 눈물바다가 됐다. 금방이라고 만남이 끝날 것 같이 느껴져서일까. 수유리 자취방에서부터 서울역까지 그리고 서울역에서 KTX가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눈에서 눈물은 마를 생각 하지 않았다. 그렇게 눈물을 닦아주며, 이불 한 장 없는 짐을 들고선 부산으로 향했다.       

    

사람에 떠밀리 듯 탄 열차에 몸을 털썩 내려놓고서야 현실이 느껴졌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소리를 높였지만 노래리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시선을 돌린 창밖은 아주 빠르고 흐릿하게 스쳐지나고 있었다. 어린 시절 탔던 무궁화호, 단양역으로 미끄러워 들어오던 ‘눈꽃열차’ 그리고 내가 탄 이 KTX까지.           

첫 직장은 야속하게도 실패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여자친구의 쏟아지는 눈물이 미안해서일까. 아니면 내가 이루고 싶었던 미래에 대한 미련이었을까. 서울 자취방은 끝내 정리하지 못했고, 그 대신 직장을 정리했다.      

이불 한 장 없는 짐은, 돌아올 때도 똑같았다. 여름이 지나기도 전 한아름 짐을 KTX에 싣고 돌아왔다. 또 다른 희망과 내일을 꿈꾸며.      

         

2023년 봄,     


아침 일찍 아내는 나갈 준비를 모두 끝내고선 나를 서둘러 깨웠다. 아래 침대에서 자고 있던 17개월 아이도 잠과 짜증을 반씩 머금은 채 서서히 눈을 떴다. 이제 막 여름을 맞이하고자 하는 봄의 끝자락에서 조금은 미지근 한 바람이 휙 하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핸드폰을 충전기에서 뽑아낸 뒤 아이를 채근해 거실로 보냈다. 아이를 의자에 앉히는 것을 본 뒤에야 화장실로 향했다.           


환갑을 앞둔 장모님 댁을 방문하기 위해, 오늘은 차가 아닌 기차역으로 향했다. 20분 남짓 차로 달려 오송역에 내렸다. 기차를 보고는 ‘치치’라고, 모형 기차만 봐도 ‘치치’라는 아이를 위해 차가 아닌 기차를 택했다. 아내와 나의 선호는 사라졌고, 남은 것은 아이의 웃음. 그리고 무언가 경험해주고 싶어 하는 기대만 남았다.           

아이는 기차 플랫폼을 빠져나가자마자 ‘오오’를 연발했다. 내짐, 아내의 짐보다 더 많은 아이의 짐을 양쪽 팔에 끼고는 그 작은 입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타야 할 KTX 들어올 땐, 아이에게 호기심은 더 이상 발휘하지 않았다. 굉음을 내는 기차에 놀라 한바탕 눈물을 흘리고선 고요하게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아내도 쌓인 피로에 그대로 지쳐 잠들었다.          

기차는 언제나 내 인생을 어디론가 데려가고, 내 가족의 기쁨을 가져왔고, 또다시 어디론가 데려가려 한다. 굽이치는 인생 아래엔 철도가 있었고 지나온 길이 언제나 직선이라고, 내가 희망과 꿈을 품고 살아왔다고 자부했으나 뒤를 돌아봤을 땐 언제나 굽이쳐 있었다.          

나는 다시 뜨거운 여름을 지나, 추운 겨울을 보내고 다시 새싹이 돋아나는 봄을 맞겠지. 내가 그래왔던 것처럼 내 아이가 또 그 철도 위에 서겠지. 그것이 인생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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