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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 Sep 14. 2022

[에세이]다시 바라본다

“후두둑, 후두둑”   

  

새벽부터 이어진 빗소리는 오전 내 그쳤다. 비를 기다렸던 새싹은 봄의 갈증을 느끼듯 여전히 붕어처럼 잎을 흔들며 뻐끔거렸지만, 야속한 비는 물러갔다. 처마 끝 비를 피해 자리 잡은 강아지는 머리가 반쯤 젖은 채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인적없이 고요한 오늘의 아침은 산허리에 메인 물안개만 다를 뿐 반복된 하루를 알려왔다.


충북 단양군 XX면 XXX 1리.


도로명 주소는 여전히 어색하기만 하다. 주변을 둘러봐도 집 한 채 없는 길가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나의 고향, 나의 집.      


20살 고향을 떠나 20년 만에 돌아왔다. 누군가 돌아오길 바란것도, 돌아가고 싶었던 것도 아니지만 돌아가야 했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서울의 대학, 기자, 대기업 누군가 부러워할 타이틀을 목에 걸고 부지런히 살았다. 정의의 사도가 됐고, 기레기가 됐다. 술독에 빠졌다. 월화수목금금금 치열하게 반복되는 삶을 피해 직업을 바꿨다. 더 나은 조건을 찾아 대기업 홍보팀에서 일했다. 높은 임금과 회사의 복지는 나의 삶에 긍정적 변화를 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술자리는 반복됐다. 오히려 상실에 가까운 일상이 시작됐다. 일하는 이유는 찾을 수 없었고, ‘나’라는 사람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없더라도,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누군가 당장 내일 사라지더라도 무색무취한 거대한 시스템은 끄떡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인정 받으며 성공했다 생각했지만, 정작 내 안에서 곯아가는 상처를 돌보지 못했다.      


선택, 목적도 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어린 시절 뛰어놀았던, 의미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조차 즐거웠던 고향의 냄새가 그리워졌다. 코끝을 스치는 풀내음 가득 담은 아침의 바람이 나를 끌어당기는 듯했다.

나는 그렇게 20년 만의 금의환향을 포기했고, 그저 돌아오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기대가 컸던 탓일까, 내가 너무나 훌쩍 커버린 탓이었을까. 고향은 나를 품어주고 있지 않았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로 보고 널찍하게 지은 현대식 흙집은 여전히 추억을 품고, 달큰한 사루비아 열매 끝 꿀을 품고 있었지만 세상에 상처입고 마비된 코가 반응할 리 만무했다.


어느 날, 집 앞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몇십 년간 푸르름을 간직했던 울창한 숲에 큰 생채기가 생겼다. 흉측하게 벌목된 나뭇가지가 옆으로 치워지자 발가벗은 듯 붉은색 황토만을 숲은 토해낼 뿐이었다.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숲은 변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그 생채기가 재선충이 남긴 흔적이라는 것을 알게됐다. 옆으로 번져나갈 것을 우려해, 코호트 격리하듯 바이러스가 남겨있지 않은 곳까지 벌목했다. 숲은 다른 이를 위해 희생하며 피 흘리는 열사처럼 벌목된 자리의 붉은 토양을 드러냈다.


내가 기대했던 숲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그저 흉물스러웠다. 아침의 상쾌함을 기대한 나의 시선에 박힌 초록 내음이 달아나는 듯 느꼈다. 아침의 볼거리가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눈요기 거리, 내가 힐링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존재해야 했던 숲이 흉측하게 변해 불쾌함까지 느껴졌다. 그깟 바이러스에 스러진 저 나무가 야속했고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바라보지 않으려 하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울창한 숲은 시선에서, 마음에서 귀양을 떠나버렸다.     

울창했던 숲이 사라지고, 낙엽이 떨어졌다. 그해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는 진부한 뉴스 멘트가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까치발을 든 어린이 키만큼 나지막한 돌담 위로 소복하게 쌓인 눈을 툭툭 털어내고 속살을 드러내는 것은 한겨울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마을로 향하는 길가를 싸리비로 쓸어내자 누런색의 얼어붙은 땅이 수줍은 듯 드러났다. 잊고 있던 집 앞의 생채기난 숲이 떠올라 문뜩 그리웠다.     


겨울은 그렇게 물러갔다.


얼어붙은 땅은 축축하게 녹아내렸고, 새가 지저귀기 시작했다. 싹이 돋아나고, 생명은 활기를 찾았다. 봄비는 지난 겨울을 씻어 내듯 다시 한번 “후두둑, 후두둑” 떨어졌다.


한해가 지났지만 내 삶이 바뀐 것은 없었다. 다시 일어나 보려했지만, “왜?”라는 질문이 따랐다. 상처받고 세상을 피해, 숨어 돌아온 고향에서 나는 눌러 앉지도, 그렇다고 박차고 일어나 다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어설픈 귀향자가 됐다.


봄비를 감상하는 시선은 그러한 ‘어설픈 귀향자’를 질타하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준 고향은, 숲은, 자연은 변해가고 있었다. 20년간 같은 자리에 있었던 상처받은 숲에도 봄은 찾아왔음을 그제야 느꼈다. 겨우내 흰눈으로 소복하게 쌓여있던 자리에는 듬성듬성 파아란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멀리서도 붉은 황토빛이 초록과 겹쳐져 숲이 변해가고 있음을 알렸다.


“아, 숲은 살아있었구나”


흉물스럽게 변했다고 느꼈던,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없을것이라 생각한 자연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차디찬 소백산 자락의 겨울을 이겨냈고, 바이러스로 오염된 신체를 일으켰다. 외면 당해야하는 서러움을 극복해낸 것이다.


돌아봤다. 혼자 상처받고, 스스로 어설픈 귀향자가 된 나를 돌아봤다. 새로운 환경에서도, 익숙한 집에서도 무기력하게 무너져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자연의 위대한 재생력, 상처를 극복해 가는 숲의 모습에서 도피를 선택한 나를 돌아본다. 내가 겪은 고통이 과연 저 숲의 제 살을 도려내는 고통과 무엇이 다른가. 묵묵히 겨울의 추위를 이겨낸 숲에는 무언가 답이 있으리라.    

 

사람 발길 하나 닫지 않았던 그 숲으로 향했다. 수년 쌓인 나뭇잎은 켜켜히 쌓이고 쌓여 발걸음 하나하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옭아매는 가시밭을 지나서야 움트는 새싹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 발짝 내딛자 봄비에 축축하게 젖은 황토는 신발 밑창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과거에 매달려, 현실에 녹아들지 못하는 집착스런 나의 과거가 아니었을까. 숲은 그 집착을 토양으로 삼아 새싹을 돋아나게 했다. 반면 나는 그 집착을 여전히 붙잡고 있는데 그쳤기에, 살아있었으나 살아나지 못했음을.    

 

숲을 빠져나와 일상으로 돌아왔다. 과거의 나를 부정한다고해서 새로운 내가 태어나지 않는다. 켜켜이 쌓인 나뭇잎이 숲의 재생을 돕는 거름이 된 것처럼, 과거의 내가 있어야, 현재의 나를 존재하게 한다. 이런 단순한 명제를 이해하느라 1년이 필요했다.


파아란 새싹이 움트듯 나의 내일은 고향에 뿌리내리게 했다. 매일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켰던 숲처럼, 고향땅에 서 땅을 가꾸고 씨를 뿌린다. 흠뻑 젖은 싸구려 티셔츠 위로 살랑거리는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자 나도 모르게 베시시 웃음이 나왔다. 더이상 어설픈 귀향자가 아닌, 그 순간 나는 숲에 녹아든 귀향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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