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이름 이야기는 한번은 정리해 보고 싶어서. 별거 아닌데 별거인 부분.
우리나라는 호칭사회다. 팀장님, 과장님.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심지어 이름을 부르는게 존중하지 않는 듯한 인상마저 있다. 유명을 달리할 때 저승사자가 이름을 세 번 부르는게 두려워서 미리부터 이름을 숨기는 풍습이 내려왔나. 아무튼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적정한 호칭을 찾아 부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꽃이 된다.
우리나라 밖에서 산다는 것은 호칭사회에서 이름사회로 나아가는 일이었다. 호칭보다 이름으로 서로 부르는 것은 참 좋았다. 우리가 존재 그 자체로 서로 존중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름사회도 나름 애환이 있다. 예를 들면 무슬림 동료들에게 흔히, 그래서 너는 family name과 first name이 어떻게 되는지 물었을 때 마치 내가 우리나라에서는 성을 이름보다 앞에 쓴다고 설명하던 표정 비슷한 것을 보았다. 지금도 내가 정확하게 이해하는지 자신은 없지만, 무슬림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을 뒤에 붙여서 함께 쓰고(그래서 길다), 또 보통 선지자 마호메트의 이름에서 따온 변형된 이름들이 많았다. 가령, 모하메드, 무하마드, 무함마드, 모함마드.. 이런 식이다. 약간 당혹감과 그리고 조금 미소가 나오는 면구스러움을 숨긴 채, 내가 당신을 어떻게 불러드리는면 좋을는지 묻는 것은 내 나름의 존경법이었다. 내가 가장 친애하는 팀 동료 "임란 무함마드"는 M이 두개 들어가는데, "Single M, right?"라는 글로벌 조크도 가능해졌다.
좀더 난처했던 순간은 회의장에서 가령 내가 모더레이터가 되어 진행을 할 때, 다양한 나라에서 오신 손님들을 소개하는 경우다. 보통 미리 같은 문화권에서 온 다른 동료들에게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사전에 확인하고, 그래도 혹시 확실하지 않은 경우에는 시작 전 위와 같은 방식으로 내가 어떻게 당신을 불러드려야 내 존경심을 충분히 표할 수 있는지 여쭙는 식이었다. 대개 Spanish, Chinese, MENA(중동) region 등 많은 경우 연습과 준비로 해결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French였다. 프랑스 헌병경찰(French Gendarmerie, 프랑스는 일반경찰과 헌병경찰로 이원화된 체제) 사이버국장님이 스피커로 오셨는데, 아직도 종종 생각나는 인자했던 그 분은 내 형편없는 불어 발음을 너털웃음으로 이해해 주셨다. 동료들과 연습했던 대로 이게 맞는지 여쭈었다가 적당한 선에서 둘이 타협했다. 나로서는 도저히 발음할 수 없던 그 단어를 넘어 우리는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인간에 대한 존경을 서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반대로 이벤트를 다니다 보면 생각보다 이런 부분에 대해 섬세한 고민이 없는 경우도 꽤 있다. 채텀하우스 룰(the Chatham House Rule, participants are free to use the information received, but neither the identity nor the affiliation of the speaker(s), nor that of any other participant, may be revealed)을 적용하는 경우 등 first name으로 서로 편하게 호칭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언어 문화권이 다른 나라에서 오는 패널들에 대해, 그저 원래 이름이 있던 것을 로만 알파벳으로 표기했을 뿐인 것에 대해 별다른 고민이 없다. 내가 처음에 무슬림 동료들에게 family name이 무엇이냐고 재차 물었을 때에도 아마 그랬을 수 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면 부끄러운 일들이 점점 많아진다.
나는 영어이름이 없다. 애초에 영어와 이름이라는게 매칭되지 않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영어는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고, 이름은 원래 내 이름이지. 소통 편의를 위해 내 정체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달까. 물론 이 지점에서 많은 코리안 동료들은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앵글로 문화권에 맞추어 당연히 first name인 이름을 먼저 이야기하거나, 영어식 닉네임을 병용하기도 한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선호의 차이다. 그래서 나도 물어보아 주는 동료들에게 굳이 더 자세히 설명하게 되는 경우, 우리 코리안들은 이렇게 해 가 아니라 통상 한글로 표기할 때엔 이러한데 나는 그걸 선호한다, 라고 이야기해주곤 했다. 더 중요한 건 그렇게 묻는 이들에게서 한국 문화에 대한 존중이 엿보였다.
동료들은 내 이니셜을 따 J.K.라고 부른다. 영어이름이라 할 순 없고 말하자면 약칭 정도. 아주 오래된 미드 '웨스트윙'에서 내가 참 좋아하는 캐릭터인 백악관 대변인 크렉이 C.J.로 불리는데, 그 느낌도 나고 좋다. 정체성과 소통편의를 모두 잡았다. 물론 공식 이벤트에서는 풀 네임으로 불리운다. 위와같은 배경으로 나는 헤이그 유로폴 본부에서 또박 또박 한글 발음으로 My name is "유정기"(You Jung Kee), I represent INTERPOL Financial Crimes. 라고 소개했다. 북한에는 김정은이 있지 정은킴이 아니니까.
- 2019년 3월. 인터폴 일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