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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다쟁이 Oct 22. 2023

같은 책, 다른 생각(10)

-이어령의 마지막수업-

(아이가 읽은 -마지막 수업-)

마지막 수업이라, 마지막이라고 하면 뭐든지 더 여운이 남는다. 당연히 그렇겠지. 다시는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니까.

아직 나는 마지막을 논하기에는 나이가 어리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나에게는 아직 내가 한 번 더 해보고 싶은 모든 것들을 다시 해볼 만큼의 시간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수업을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렵다.


그러나 마지막 수업과 첫 수업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이, 첫 수업의 설렘이나 긴장이 마지막의 안도와 아쉬움으로 묘하게 연결되듯이, 설렘에 들뜬 사람이 이것이 사라지면 느끼게 될 아쉬움에 관해서도 더 잘 자각할 수 있기에 어쩌면 라스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퍼스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last와 first의 묘한 공통점이라고 해야 할까.


이 책은 인생을 살아야 알 수 있는 탄생과 죽음, 운명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은 어떤가?


나는 태어났고, 부모님을 만났고, 새로운 것들을 배웠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인채로 살아나가고 있다. 살아나간다고 하니 무언가 대단한 것을 헤쳐나가면서 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내 또래면 다 겪으며 살고 있는 것들일 뿐. 그리고 나는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끔씩 왜 사는지에 관해 스스로에게 짜증스럽게 물을 때도 있긴 하지만, 그건 그저 투정일 뿐 별다른 불행도 슬픔도 없이 잔잔하게, 그러나 가끔씩은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내 삶을, 나는 이 정도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이 운명을 탓할 때 언제나 한 걸음 뒤에서 그 장면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아직 운명의 장난이라던지, 운명은 왜 그렇게 불공평하냐면서 세상을 원망해 볼 만한 그런 상황을 만나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어령 선생님은, 다양한 주제로 당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개중에는 전혀 삶과 죽음에는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도 있었지만, 결국은 마지막 삶을 살아가고 있는 당신의 이야기의 일부라는 점에서 어떤 식으로든 죽음과 관련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스토리들은 다소 무겁고 슬프게 느껴질 법도 했지만, 사실 대부분의 이야기 속에서 그런 감정들이 눈에 띄지는 않는다.


지성은 지능이다. 생각하고 사고하고 추론할 수 있는 능력. 반면에 영성은 신 없이도 영적일 수 있는 능력이다.

류시화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무신론자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말 그대로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

둘째는 신이 없어도 종교적일 수 있다고 믿는 사람.

내가 생각할 때 내가 믿는 방향은 후자인 것 같다. 신에 관계없이 자신의 믿음대로 사는 것.

사실 영성은, 어려운 말이다. 보통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던지 초능력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신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는 이상 설명될 수 없는 그런 능력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성에 접한 사람을 단순히 신내림 받은 무당이나 교황청의 교황님처럼 신에 대한 지식이 높으신 분으로 지칭하고는 한다.

 

그러나 나의 관점에서, 영성을 가진 사람이란 이어령 선생님처럼 자신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누구는 두려워하고, 누구는 회피하고, 누구는 비참해지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그것에 관해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람. 이어령 선생님은 그런 분이셨고, 그렇기에 이렇게 마지막 수업도 하실 수 있으시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읽은-마지막 수업-)

가끔 뭔가에 깊이 놀라거나 감동했을 때 소름이 돋거나 머리카락이 쭈뻣쭈뻣 서는 것을 느낀다.

이어령박사의 마지막수업은 읽는 내내

오싹함을 느끼고 전율이 흘렀다.


평범한 사람들이 고뇌하는 현실적인 질문을

이어령박사는 짐작할 수 없는 비유로 

물결치는 언어로 대답을 했다.

감히 짐작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전개가 이어져서

때론 길을 잃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똑같은 길을 찾아 내려와야 하는 일이 많았고,  아직도 그 깊은 길의 발자국을 100분의 1조차 헤아리기 어렵다.


막연하게 이해하는 건 누구나 고민하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죽음에 대한 생각은 결국은  삶에 대한 생각이고,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언젠가는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원점회귀 원리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정답과 가깝다는 것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그런 삶의 과정을 나는 나답게 나만의 이야기로 존재했느냐? 고 묻는 이어령박사의  말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바보 같은 인생이 어쩜 더 값지고 귀한 인생이라는 것의 의미를 지금이라도 다시 되돌아보고 싶었다.

바보 같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시간들에 대한

어리석음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비록 삶이 어떤 운명에 이끌려 내가 알 수 없는 고통으로 데려가도 나의 10분의 3 할인 나의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싶다.

가끔은 운명 같지만 나의 의지로 일궈낸 어떤

기억들을 떠올려지는 걸 보면 말이다.

노력하는 자에게 아마도 세상은 행복한 운명이란 프레임을 씌워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아이 엄마인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도 마치 아이가 나의 소유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리 자식을 사랑해도 나는 자식이 될 수  없고, 자식도 부모가 될 수 없다는 말을 꼭 기억해야겠다.

'타자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이 사랑이다.'라는

의 진리가 깊숙이 파고들어 또 한 번 고개가 숙여졌다.


죽음의 아픔을 살아있을 때 하지 못했던 말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는 이어령박사의 말씀처럼

언제 간 맞이할 나의 죽음이 슬프지 않게

지금 바로 내 옆의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미안함을 얘기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십이 넘어 삶에 대한 무력감이 슬며시 자리 잡은 시간에 이어령박사의 마지막수업은 걸음마를 하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주듯 따뜻한 체온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조금은 의연하게 조금은 담담하게 지금의 시간들을 채워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삶과 죽음의 시작은 같은 카테고리 안의 영역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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